소로 [Henry David Thoreau]미국 수필가·시인·철학자 브리태니커
소로 요약정보
태어난 때 | 1817. 7. 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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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어난 곳 | 미국 매사추세츠 콩코드 |
죽은 때 | 1862. 5. 6 |
죽은 곳 | 콩코드. |
소속 국가 | 미국 |
직업 | 수필가·시인·철학자 |
미국의 수필가, 시인, 실천적 철학자.
개요
걸작 〈월든:숲속의 생활 Walden:or, Life in the Woods〉(1854)에서 다룬 초절주의 원칙대로 살면서 평론 〈시민의 반항 Civil Disobedience〉(1849)에서 주장한 대로 시민의 자유를 열렬히 옹호한 것으로 유명하다(→ 색인 : 논픽션 산문).
초기생애
소로는 1817년 매사추세츠 주 콩코드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족은 이듬해 이사를 했다가 1823년 콩코드로 돌아와 그곳에 정착했다. 그가 후에 성인이 되어 마을에 대해 애증의 감정을 느꼈다고 하나 그곳의 아름다운 숲, 계곡과 초지에 대해서는 변함없는 애정을 간직했기 때문에 그곳은 여전히 그가 속한 세계였다. 그의 집안은 그리 대단한 가문은 아니었다. 그는 무능한 소규모 사업가 존 소로와 부산하고 수다스런 신시아 던바의 셋째 아이로 태어났다. 1828년 부모는 그를 콩코드 아카데미에 보냈다. 그에게 좋은 인상을 받은 그곳의 교사들 덕분에 그는 대입 준비를 할 수 있었다. 아카데미를 졸업하고 1833년 하버드대학교에 입학한 그는 모범생이었지만 학점에는 무관심했으며, 도서관에서 자기가 원하는 책을 읽는 것을 좋아했다. 1837년 중간 정도의 성적으로 졸업한 뒤 교직을 지원해서 이전에 다녔던 콩코드의 그래머 스쿨에 자리를 얻었다. 그러나 엄격한 교사 역할이 맞지 않아 고민 끝에 2주일 후 그만두었고, 가업인 연필제조업을 꾸려가던 아버지를 돕게 되었다. 1838년 6월 형 존의 도움으로 작은 학교를 세웠는데, 이 학교는 진보적 성격에도 불구하고 3년 동안이나 유지되다가 존이 병에 걸리는 바람에 문을 닫았다.
1839년 소로는 존과 함께 콩코드 강과 메리맥 강을 따라 카누 여행을 하면서 자신은 교사보다 자연시인이 더 어울린다는 확신을 얻게 되었다. 1840년대에 접어들면서 그는 시인의 길을 택했다. 시인으로 남기 위해 부단히 애를 쓴 끝에 1840년대를 성공적으로 보냈으나 1850년대에는 좀 주춤해졌다.
에머슨과의 우정
소로가 쉽게 시인의 길로 들어서게 된 것은 단순한 우연으로, 그가 하버드대학교 2학년에 재학중일 때 콩코드에 정착한 수필가이자 시인인 랠프 월도 에머슨의 친절한 지도 덕분이었다. 1837년 가을 무렵 그들은 친구가 되었다. 에머슨은 소로에게서 에머슨식의 자기 신뢰를 지닌 진정한 제자를 찾아냈고, 소로는 그로부터 지도자·아버지·친구의 모습을 발견했다. 에머슨의 사고방식에 이끌려 많은 사람이 콩코드로 모여들었다. 그들의 현명한 사고와 확신이야말로 뉴잉글랜드 초절주의의 초석이 되었다. 돌이켜보면 그것은 19세기 미국에서 최소한 두 사람의 세계적 작가 소로와 에머슨의 명성을 바탕으로 생겨난 가장 중요한 문예운동이었다(→ 색인 : 미국문예부흥). 그것은 본질적으로 낭만주의와 개혁을 조화시켰다. 대중보다는 개인을, 이성보다는 감성을, 인간보다는 자연을 예찬했다. 또한 지식을 얻게 되는 경로로는 감각과 직관 2가지가 있음을 인정했지만, 직관이 교육보다 우월하다고 주장했다. 이와 마찬가지로 정신과 물질은 공존하지만 정신의 실재는 물질의 실재를 넘어선다고 역설했다. 또 개혁을 위해 분투했지만 개혁은 단체나 조직이 아닌 개인에서 시작되어야 함을 강조했다.
작품활동
시인이 되고자 한 소로의 희망은 에머슨과의 관계 덕분에 적절할 뿐 아니라 가능성도 있어 보였다. 1837년 후반부터 에머슨의 제안에 따라 일기를 쓰기 시작했는데, 죽기 2개월 전까지 계속 쓴 분량은 수천 페이지에 이른다. 대학시절에 썼던 몇 편의 글을 다듬고 더욱 훌륭한 새 글도 썼으며 수년에 걸쳐 몇 편의 시도 썼다. 에머슨의 지도 아래 초절주의자들은 잡지 〈다이얼 The Dial〉을 창간했는데, 1840년 7월에 발행한 창간호에 소로의 시 〈연민 Sympathy〉과 로마 시인 아울루스 페르시우스 플라쿠스에 대한 평론 발췌문이 실렸다. 그후에도 〈다이얼〉지에 소로의 시가 계속 실렸고, 1842년 7월에는 자연에 관한 첫번째 수필 〈매사추세츠의 자연사 Natural History of Massachusetts〉가 실렸다. 서평 형식을 취하긴 했지만, 이 글은 뛰어난 자연작가가 탄생했음을 보여주었다. 그후로는 여러 편의 서정시를 발표했는데, 그중 훌륭한 작품으로는 〈동부의 처녀에게 To the Maiden in the East〉 등이 있다. 뒤이어 발표한 또다른 자연 수필 〈겨울 산책 A Winter Walk〉에서는 자연에 대한 적절한 표현이 돋보인다. 1844년 4월호를 끝으로 〈다이얼〉지는 폐간되었다. 그러나 이 기관지를 통해서 소로는 어떤 잡지보다 더 풍부하고 다양한 작품들을 발표했다.
1840년 그는 콩코드를 방문한 매력적인 여인 엘런 시월과 사랑에 빠져 청혼했다. 그녀는 이를 받아들였지만 그녀의 부모가 반대하는 바람에 그들의 약혼은 곧 깨졌다. 1841~43, 1847~48년에는 거의 에머슨의 집에 머물렀다. 그러나 에머슨의 보살핌과 우정에도 불구하고 소로는 점차 안정을 잃었고, 1842년 1월 형 존이 손가락을 자른 뒤 발병한 파상풍으로 사망하자 그 슬픔 때문에 상태가 악화되었다. 1842년 스테이튼 섬에서 에머슨의 형 윌리엄 집에 가정교사로 머무르면서 뉴욕 문학시장을 개척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의 문학활동에 대한 반응은 냉담했고, 뉴욕을 정복하려던 노력은 좌절되었다. 도시생활에 염증을 느끼고 계속된 실패에 좌절한 그는 1843년 후반에 고향 콩코드로 돌아왔다.
월든 호반생활
소로는 다시 연필과 연필심 제조업으로 돌아갔다. 1845년초 무력감이 더욱 심해지자, 그전에 쉬기도 하고 독서도 할 수 있는 움막을 강가에 지었던 한 하버드대학교 동창생의 아이디어를 실현하기로 결심했다. 그해 봄 콩코드에서 남쪽으로 3.2km 떨어진 얼음으로 덮인 작은 월든 호숫가에서 마땅한 자리를 찾아냈다. 1845년 이른 봄 27세가 된 소로는 월든 호숫가의 큰 소나무들을 베어 그 나무로 집의 기초를 세웠다. 처음부터 그는 이곳으로 이사하는 것에 몹시 만족했다. 일단 정착한 후 그는 자신이 심은 콩과 야생과일 및 채소로만 식단을 차렸다. 한가할 때에는 콩밭의 잡초를 뽑거나 굶주린 마못으로부터 콩밭을 지켰고, 낚시·수영·뱃놀이를 즐겼으며, 그곳의 식물군과 동물군을 관찰하고 기록하며 독서로 기나긴 시간을 보냈다. 그곳에서 〈콩코드와 메리맥 강에서 보낸 1주일 A Week on the Concord and Merrimack Rivers〉(1849)을 썼고, 이때 쓴 일기는 후에 다듬어서 〈월든:숲속의 생활〉에 포함시켰다. 또한 명상을 하면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이러한 생활과 생각 속에서 탄생한 〈월든:숲속의 생활〉은 단순한 생활 속에서 경험과 자유롭게 여가를 누리려는 노력을 서술한 18편의 글로 이루어져 있다. 여러 편의 글에서 소로는 노동과 여가에 대해 독창적인 견해를 서술했으며, 가능한 한 단순하고 자족적인 삶을 영위하려 한 자신의 실험적 생활을 보여준다. 다른 글에서는 작은 동물들과의 친교, 계절에 따라 달라지는 숲과 호수의 소리·내음·경치, 전선에 스치는 바람소리 등 월든 호반에서의 다양한 생활을 묘사하면서 단순하고 자족하며 살아가는 방법을 습득해가는 기쁨을 보여준다. 월든 호반에서 실제로 하루하루 살았다는 점 때문에 이 작품에 권위를 더하는 것도 사실이지만 분명하고 직설적이며 세련된 문체야말로 이 작품을 고전의 차원으로 끌어올릴 수 있었다.
소로는 월든 호반에서 2년 동안(1845~47) 머물렀다. 그는 1847년 여름 에머슨이 그를 초청해서 가족과 합류시켜 유럽에 가자는 초청을 받아들여 그해 가을 자신의 오두막을 영영 떠나게 되었다.
월든 호숫가 생활 당시 소로는 감옥에서 하룻밤을 보낸 적이 있었다. 1846년 7월 어느날 밤에 경관이자 세금징수원인 샘 스테이플스가 그를 끌고가 여러 해 동안 납부하지 않았던 인두세를 낼 것을 정중하게 요청했다. 그가 거절하자 샘은 그를 감금시켰다. 다음날 아침 그의 숙모 마리아로 짐작되는 정체불명의 숙녀가 세금을 내주어 풀려난 사건이 있었다. 그는 자신의 입장을 정리하는 데 하룻밤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노예제를 묵인하고 멕시코와 제국주의 전쟁을 일으킨 정부를 지지할 수 없다는 것이 그의 입장이었다. 1849년 5월에 출판된 그의 가장 유명한 평론 〈시민의 반항〉에서는 다수의 편의주의에 맞서 개인의 양심을 옹호했다. 당시 그것은 무시당했으나 19세기말경 새롭게 인정받기 시작했고, 20세기 중반에는 열렬한 독자들이 나타났다. 민법보다 더 우위의 법이 존재하므로 설령 벌을 받더라도 이 법을 따라야 한다는 그의 주장은 많은 사람들에게 여전히 타당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 글의 결론은 "어느 한 사람이라도 부당하게 투옥하는 정부 밑에서 의로운 사람이 진정 있어야 할 장소는 감옥"이라는 것이다.
말년과 작품
월든을 떠나면서 소로의 황금기는 막을 내리고 황혼기를 맞게 되었다. 생계를 위해 감정사로 변신하면서 초절주의도 서서히 사그라들었다. 그는 자신의 몫으로 식물 표본, 하버드대학교를 위해 파충류 표본을 수집하면서 그 자세한 사항을 일기에 기록했다. 이웃사람들은 그를 지팡이와 측량기를 가지고 다니는 음향효과 담당자로 생각했다. 아버지가 죽은 뒤 완전히 인수받은 가업에 더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메인 숲, 케이프코드·캐나다로 여행하면서 얻은 소재로 잡지에 3편의 글을 발표했다. 〈유니온 매거진 The Union Magazine〉에 〈식과 메인 숲 Ktaadn(sic) and the Maine Woods〉(1848), 〈퍼트냄스 먼슬리 Putnam's Monthly〉에 〈캐나다 여행 Excursion to Canada〉(1853)·〈케이프코드 Cape Cod〉(1855)를 실었다. 이 작품들에서는 외부세계 탐험에 대한 소로의 열망과 그의 영혼을 그토록 오랫동안 지탱해준 자연환경에 대한 찬사를 볼 수 있다.
소로는 초절주의에서 벗어나 실천적인 노예폐지론자가 되었다. 콩코드의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이른바 지하철도를 통해 북쪽으로 도망가는 노예들을 도우면서 노예제에 반대하는 강연을 하고 글을 썼다. 1854년에 행한 강연 〈매사추세츠의 노예제 Slavery in Massachusetts〉는 가장 신랄한 고발이었다. 그는 노예폐지론자 존 브라운에게서 에머슨에 못지 않은 다감한 아버지상을 발견했고, 이 나이든 열광자가 소로의 이상이 되었다. 점차 건강이 나빠진 소로는 브라운이 하퍼스페리 마을 습격을 주동했다가 실패해 처형당하자 정신적인 충격을 받았으며, 이것이 그의 죽음을 재촉한 것으로 보인다. 1862년 결핵으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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