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오, 갑자, 기묘, 을사 사화를 4대 사화라 하는데 우선 그 배경을 살펴 보면 다음과 같다.
조선 개국 이래 역대의 임금이 문치(文治)에 힘을 쓰고 유학(儒學)을 장려했기 때문에 우수한 학자가 많이 배출되고, 선비사회, 즉 유림(儒林)은 활기에 차 있었다. 그러나 세조∼성종 때에 이르러 그들 사이에 주의 ·사상 ·감정 ·정실(情實) ·향토(鄕土)관계 등으로 여러 파별(派別)이 생겼는데, 개중에는 기미가 상통하는 파도 있었으나 서로 대립 ·반목하는 파도 있었다. 이를 네 파로 대별하면 훈구파(勳舊派) ·절의파(節義派) ·사림파(士林派) ·청담파(淸談派) 등이다.
그 중의
훈구파는 세조의 찬역(簒逆)을 도와 높은 지위와 많은 녹전을 차지한 부귀가 겸전한 일파인데, 정인지(鄭麟趾) ·최항(崔恒) ·이석정(李石亭) ·양성지(梁誠之) ·권람(權擥) ·신숙주(申叔舟) ·강희맹(姜希孟) ·서거정(徐巨正) ·이극돈(李克墩) 등이다.
절의파는 세조의 찬역행위를 절대반대한 김시습(金時習) 등의 생육신(生六臣)을 중심으로 한 파이다.
사림파는 경상도 밀양(密陽) 출신인 김종직(金宗直)을 중심으로 한 일파이다. 사림파의 중심인물인 김종직은 동방성리학(性理學)의 정통을 이어받은 대학자로서 그의 제자 중에는 김굉필(金宏弼) ·정여창(鄭汝昌) ·조위(曺偉) ·김일손(金馹孫) ·유호인(兪好仁) 등이 있었다. 이들은 세조의 찬역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점에서는 절의파와 일맥상통하지만 적당한 기회를 얻으면 조정의 요직에 들어가 포부를 펴보려는 점에 있어서는 절의파와 생각을 달리하였다. 그러므로 훈구파에 있어서 정면의 적은 사림파였다.
청담파는 중국의 죽림칠현(竹林七賢)을 본떠 서울 동대문 밖 죽림에 모여 고담준론(高談峻論)으로 세월을 보낸 일파로서 남효온(南孝溫) ·홍유손(洪裕孫) 등이 대표적이다.
훈구파는 조정의 요직에 있어 세조∼성종 시대의 여러 가지 관찬사업(官撰事業), 즉 조정에서 간행하는 서적 편찬에 큰 공헌을 한 사람들이며, 따라서 한 나라의 문화 발전에 이바지하였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또 그들의 녹전은 주로 경기도 ·충청도에 있었기 때문에 지역적으로 볼 때, 이들은 기호파(畿湖派)이고,
김종직과 그의 제자들은 대개 경상도, 즉 영남(嶺南) 지방에 있었기 때문에 이들을 영남파라 하였다.
훈구파와 사림파는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그 대립과 반목이 점점 심각해졌는데, 1498년(연산군 4) 두 파는 정면충돌을 하였으며, 그 결과 권력을 쥐고 있던 훈구파의 일격에 사림파는 패배하였다.
김종직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을 김일손이 사초(史草)에 게재(揭載)한 것에서 발단이 된
1)무오사화(戊午士禍)에 의하여, 김종직은 이미 죽은 후였으므로 부관참시(剖棺斬屍)의 욕을 당하고 그 밖의 많은 제자들은 처형되거나 귀양갔다.
두 번째의 사화는 1504년(연산군 10)의 갑자사화(甲子士禍)이다.
2)갑자사화는 투기가 심하여 왕비(王妃)의 자리에서 쫓겨나 사약을 받은 성종의 비(妃) 윤씨(尹氏)의 소생인 연산군이 성종의 뒤를 이어 임금이 된 후 생모(生母)에 관한 사실을 알게 되자, 폐비에 찬성한 신하들과 평소에 연산군의 학정을 불평하던 일부 사림파의 선비들을 한데 묶어, 큰 옥사(獄事)를 일으켜서 일어났다. 이것은 무오사화처럼, 훈구 ·사림파 간의 대립으로 일어난 것은 아니지만, 선비가 많이 죽음을 당하였다는 의미에서 사화이다.
세 번째의
3)기묘사화(己卯士禍)도 훈구파와 사림파 간의 대립에서 발생한 사화이다. 훈구파의 중종반정(中宗反正)의 공훈에 비판적이던 조광조(趙光祖) 등의 신진사류(新進士類)들이 위훈삭제사건(僞勳削除事件)을 일으켜 심정(沈貞) ·남곤(南袞) ·홍경주(洪景舟) 등에게 타격을 가하려다 그들의 반격을 받아 패배한 사건이다. 조광조 ·김식(金湜) ·기준(奇遵) ·한충(韓忠) ·김구(金絿) ·김정(金淨) ·김안국(金安國) ·김정국(金正國) 등의 기묘명현(己卯名賢)이 죽거나 유배되었다.
네 번째는 1545년(인종 1)의
4)을사사화(乙巳士禍)이다. 이것은 왕실의 외척인 윤임(尹任), 즉
대윤(大尹)과 같은 파평(坡平) 윤씨인 윤원형(尹元衡),
즉 소윤(小尹) 사이의 권력다툼에 말려들어 많은 선비가 타격을 받은 사건이다. 이것도 갑자사화의 경우처럼 선비사회 사이의 싸움은 아니지만 많은 선비가 희생되었기 때문에 사화라고 한다.
4대사화는 1575년(선조 8)에 이르러 당쟁(黨爭)이 일어나기 전의 선비들에 대한 옥사였다. 그러나 사화는 소수인의 음모에 의하여 일어난 것이 아니고, 파당을 가진 다수인의 공공연한 논쟁이 따르는 대립과 투쟁에서 패자는 반역자로 몰려 지위를 빼앗기거나 목숨을 잃고, 한 파가 승리하면 이에 대하여 새로운 반대파가 또 생겨 그것이 또다른 사화를 야기시켰다. 이러는 동안 정치의 기강은 더욱 문란해지고, 뜻있는 선비들은 관직을 버리고 서원을 세워 유생(儒生)들의 집합 또는 강학(講學)의 장소로 삼는 동시에, 그들 일족의 자녀교육을 하고 이를 통하여 동족적인 당파의 결합을 굳게 하였다.
이와 같이 사화에 의하여 육성된 정치비판과 반대파에 대한 복수관념은, 서원의 발전과 더불어 조선 후기의 당쟁을 격화시키는 원인이 되었다. 그러나 뜻있는 선비들의 향토 복귀와 교육 실시는 고관대작이 되는 것을 유일한 목표로 삼는 공리적 ·세속적인 관학(官學)에 대하여 수양과 사색을 주로 하는 진리탐구의 참다운 학문을 하겠다는 사조와 경향을 낳게 하고, 이로 인하여 사학(私學)의 대연원(大淵源)이 열리게 되었다.
조선시대의 당재의 원인을 알고자 한다다면 우선 당쟁의 역사에 대해 아셔야하니다.
당쟁은 조선 역사에서 어떤 역할을 했을까? 익히 들어온 대로, 나라를 쇠망케 한 망국병이기만 했을까?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이 쓴 <조선시대의 당쟁사>보면 조선 중기 이후 정치의 중심이었던 당쟁을 통사적으로 서술해 이런 의문에 대한 하나의 답변을 제시하고있습니다.
사림정치는 세조연간 사림파의 등용에서 기원한다. 계유정난으로 권력을 잡은 세조는 공신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지방의 젊고 야심찬 사림을 정계에 불러들였다. 주자학의 이념으로 무장한 사림파는 도덕적 수양을 앞세우며 훈구파를 공격했다. 이들의 싸움에서 최종적으로 승리한 것이 사림파였다. 그 사이 왕권은 약해져 신권에 밀리게 됐다. 그러나 대적할 세력이 없어진 사림은 곧 자기분열해 붕당을 낳고 이들 사이의 당쟁이 치열해졌다. “당쟁은 사림정치의 부산물이었다.”
최초의 붕당은 선조 8년에 관직을 놓고 갈라진 동인과 서인이었다. 동인은 다시 북인과 남인으로, 북인은 다시 대북과 소북으로 나뉘어 다투었다. “당쟁이란 근본이 권력 투쟁이었기 때문에” 자기 당에 유리한 명분·의리를 억지로 끌어들이는 경우가 많았다.
대표적인 것이 효종이 죽었을 때 벌어진 예송논쟁이다. 인조의 후취 왕비인 조대비가 어떤 상복을 입어야 하는가를 가지고 서인과 남인 사이에 논쟁이 붙었다. “예송 논쟁은 이론을 앞세운 전형적인 권력투쟁이었다.”
예송 논쟁으로 당쟁의 골이 더욱 깊어진 붕당들은 이후 피를 부르는 싸움을 계속하다 “체제가 붕괴될 위험에 처하기까지 했다.” 이때 시행된 것이 영·정조 연간의 탕평책이었다. 그러나 노론/소론, 노론벽파/노론시파의 정쟁을 다독이려던 탕평책은 외척세도정치의 길을 열어주고 말았다.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외척을 끌어들인 결과였다. 순조 이후 정치는 안동 김씨를 중심으로 한 외척에 완전히 장악됐다. 지은이는 이 시기를 이미 당쟁이 끝나고 일종의 `일당독재'가 행해진 기간으로 보고 있다. 따라서 이 무렵 벌어진 수많은 실정과 탐학을 당쟁 그 자체의 산물로 보아선 안 된다고 지적한다. 당쟁이 외척세도정치로 이어지기는 했지만 그 결과만 보고 당쟁 역사 전체를 매도하는 것은 무리라는 것이다.
이성무씨의 <조선시대의 당쟁사>中
우선 왜 당파가 나누어졌는가!
남인과 북인의 대립은 정여립 사건 때로 거슬러 올라갑니다.정여립 사건 때 유성룡이
심문관으로 있었는 데(이것은 실은 오해라고 합니다) 당시 이발이나 최영경 등이 억울하게
죽는 것을 모른 체 하고 넘어가 조식의 문인들의 원성을 샀다고 합니다.(이것은 당시 심문관이던
정철이 후에 북인들에게 말했다고 합니다.) 여기에서 갈등이 생겨나 조식의 문인 들과 이황의
문인들이 나누어지는 계기가 되었다고 합니다. (물론 그 전부터 전조가 있었죠)
혹은 정철이 정치적으로 과오를 벌이게 되는 사태(정철이 이산해의 계략에 넘아가
광해군을 세자로 추천하여 선조가 격노함)때 정철 등 서인의 축출에 대해 유성룡이 온건론을 펴
남인과 북인이 척을 지게 되었다는군요
서인중 소론과 노론의 나뉨은 윤증과 송시열의 대립 때문이죠 윤증의 아버지는 윤선거 인데 남인인 윤휴와 친했다고 합니다. 송시열이 이를 못 마땅히 여기다가 윤선거에 대해 호란 당시 강화도에서
자진미수사건(윤선거의 부인만 자살하고 윤선거는 강화도에서 살아서 나옴)을 이유로 제자인 윤증이윤선거가 죽은 후 비문을 쓰자고 하자 형식적으로 비문을 써주는 일 때문에 스승과 제자 사이가
크게 벌어졌다고 합니다. 당시 이 논쟁을 회니논쟁이라 하는 데 스승의 의리가 중요하다고 판단하여
송시열을 지지한 사람이 노론, 아버지의 의리가 중요하다는 쪽이 소론입니다. 물론 결정적인 분류는
대남인에 대한 강경책이 노론, 온건론이 소론이겠지만 근저에는 이러한 점이 깔려있습니다
시파와 벽파의 차이는 사도세자에 대한 의리(임오의리, 임오년에 사도세자가 죽음)를 중요시하는 쪽이 시파, 영조에 대한 의리를 중요시 하는 쪽(신임의리,영조와 노론과의 의리) 이 벽파라 하네요.(학설이 많이 갈립니다)
-당쟁의 직접적 원인은-
당쟁이 직접적인 원인이 된 것은
선조 때 이조전랑이라는 관직을 두고 김효원과 심의겸의 대립에서 시작되었다.
이조전랑이란 직책은 비록 그 직위는 낮았으나 관리의 임면을 장악하고 있는 중요한 자리였다. 그래서 그 직책의 임면은 이조판서도 간여를 하지 못하였고 반드시 그 전임자가 후임자를 추천하도록 되어 있었다.
처음에는 김효원이 그 자리에 추천을 받았는데, 이조참의로 있었던 심의겸이 그를 권력에 아부하는 자라고 하여 반대한 일이 있었다. 그 후에 김효원의 임기가 다 되어 후임자를 물색할 때 심의겸의 아우 심충겸이 물망에 올랐으나 김효원이 이를 거절하여 서로간에 불화가 생기게 되었다.
그 당시 관리와 유생들은 모두 양쪽의 어느 하나에 붙어서 대립하게 되었다. 김효원의 집이 도성의 동쪽인 건천동에 있다고 하여 동인, 심의겸의 집이 도성의 서쪽인 정동에 있다고 하여 서인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동서분당이 생긴 초기에는 주로 동인 세력이 커서 서인을 압도하였다. 동인에는 대체로 이황과 조식의 문인이 많았고, 서인에는 이이와 성혼의 계통이 많아서 당쟁은 학파의 대립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그러나 그 후 동인은 남인과 북인으로 나뉘어지고, 서인은 노론과 소론으로 갈라져 이를 4색 당파라 부르게 되었다.
-당쟁의 의미-
조선시대의 폐단중의 하나가 당쟁이라 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진실일까요?
물론 당쟁때문에 조선사회가 어려움을 격은것도 사실이지만 그 폐단만을 부각 시킨것은 일본인들이 일제시대때 부각시킨 것입니다.
"조선은 편을갈라 매일 싸우기만한다. 그래서 조선이란 나라는 멸망할수 밖에 없다. 그래서 우리 일본이 조선을 바른길로 인도하기위해 조선을 다스려야 한다."이렇게 조선 백성들을 주눅들게하고 그들의 식민 정책을 타당화 한면이 더 많았다는 것을 우리는 분명히 알고 있어야 합니다.
물론 당쟁이 처음에는 학문적인것에서 시대의 흐름에 따라 정권 탈취의 용도로 변질 된것은 사실이지만 당쟁의 장,단점을 확실히 구분하여 우리가 바로 알고 있었으면 합니다.
랑의 자대권自代權과 정 3품이하의 당하낭관을 추천할수 있는 당하통청권堂下通淸權
자대권이란 이조 ·병조 전랑銓郞(정랑,정5품 및 좌랑,정6품을 일컬음)에게는 자기의
후임을 선택하는 관례가 있었고, 특히 대간을 비롯한 당하낭관堂下郎官(정3품 당하관
에서 6품까지의 관료)을 추천하는 통청권이 있었다. 전랑, 특히 이조 전랑(정랑및좌랑)
은 이들에 대한 추천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권력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이를 차지하고자 하는 다툼이 영조때(1741년)까지, 이 제도가 폐지될 때 까지 지속
되었다.
세도기로만 구분해 본다.
정권은 외척 권신들의 손에 들어가게 된다. 인종·명종시절 윤임尹任· 윤원형尹元衡
등이 대윤·소윤으로 분리되었지만 이들은 집권의 명분도 뚜렷한 정치이념도 없었다.
이는 세조이래 펼쳐온 훈신정치의 연장선상이었다.
2.사림정치기(본격적인 당쟁시기) (선조 ~ 정조) 영·정조 탕평시기
선조 8년(1575년) 김효원이 이조정랑에 추천된것을 심의겸이 반대한 것에서 사람
세력이 동인과 서인으로 갈리었다. 김효원을 편든 사람이 동인, 심의겸의 편에 선
사람을 서인이라 불리었다. 김효원의 집이 한양 동쪽에 있어서 동인이라 불리었고,
심의겸의 집의 한양의 서쪽에 있는 정릉동에 있어서 서인이란 명칭이 붙게 되었다.
동인 - 허엽,유성룡,김성일,남이공,이발,이산해,이원익,이덕형 (이황과 조식의 문인)
서인 - 박순,정철,송익필,윤두수,이산보 (이이와 성혼의 제자가 많았음)
-동인내 남인·북인의 분열
정여립의 난을 다루는 과정에서, 동인을 해친 서인 정철과 서인을 엄하게 다스려
야 한다는 이발 ·정인홍등의 강경파가 북인, 온건파가 남인으로 분리된다.
이발의 집이 북악산 아래에 살고 있어서 북인이라 불렀고, 우성전은 남산아래 살
고 있어서 남인으로 불리게 되었다.
북인 : 이발,이산해,정인홍 (조식·서경덕 문인)
남인 : 유성룡,김성일,우성전 (퇴계문인)
광해군이 즉위하기까지 광해군을 지지한 세력이 대북으로, 영창대군을 옹립하려는
세력이 소북으로 분리가 된다.
-인조
동기를 살해하고 모후를 폐한 반 인륜적인 행동과 明에 대한 임진왜란때의 은혜를
저버리고 오랑캐(청)와 교분을 맺었다는 명분인 '인조반정'으로 서인이 집권하게
된다.
풍김씨 외척 세력이 경쟁하는 정도였다.
기회를 엿 보고 있던 남인세력이 있었는데 이들간에 두 차례의 예송이 일어난다.
한다고 한 송시열의 서인들과 3년복을 입어야 한다는 윤휴 ·허목등의 남인들의 논쟁
이 일어난다. 서인들의 승리로 귀결된다.
'갑인예송(1674년)'-효종의 비 인선왕후가 죽자 인조의 후비(자의대비)의 복제가
새롭게 논의가 된다. 서인의 기해혜송의 연장선상에서 次子婦로 다루어 대공복(9개
주의 도움을 받아 서인을 숙청하고 기년복을 확정지었다.
송시열(주자를 신앙적 차원에서 숭앙)과 윤휴(주자만을 절대시 하지 않는학계의 자
유주의자)와의 논쟁에서 송시열이 윤휴를 '사문난적'(주자학을 문란하게 만든 도적.
유교 사상에 어긋난 말이나 행동으로 교리를 어지럽히는 사람)으로 매도했다.
같은 서인이던 윤선거가 윤휴를 두둔하였다. 윤선거 사후 윤선거의 아들이자, 송시
열의 제자이던 '윤증'이 송시열의 윤선거에 대한 혹독한 비난으로 두 사람간에는 감
정이 골이 너무 깊게 되고 이 이 사태는 겉 잡을 수 없이 확대되고 노·소로 분열이
일어난다.
시파는 사도세자의 죽음을 동정하면서 정조의 정국운영에 동조한 세력, 즉 친 정조
세력이며, 벽파는 사도세자의 죽음을 당연시하면서 정조의 정국에 동조하지 않은
세력을 말한다.
노론에도 시파 ·벽파가 있었으며 소론에도 있었고 남인에도 시파 ·벽파가 있었지만
어떤 정파나 당파로 보기에 애매한 부분이 많다.
지만 6년만에 정국의 주도권은 '김조순(순조의 장인)'으로 안동김씨 중심의 외척세
력에게로 이양되어 외척 세도정치기가 시작되었다.
김조순은 반남박씨(박준원)가문과 풍양조씨(조득영)가문의 도움을 받아 벽파세력을
제거하는데 성공하게 된다.
-효명세자(익종,순조의 아들)대리청정시 세자의 장인인 '풍양조씨'조만영이 안동김씨
세력을 견제하게 하였다. 세자의 죽음으로 풍양조씨 세력은 일시 와해 조짐을 보인
다.
되고 이로 인해 안동김씨 세력이 재 집권하게 된다.
헌종이 1849년 후사가 없이 세상을 떠나자 왕실의 가장 어른인 순원왕후가 왕위
계통권을 강화도령 이원범(철종)에게 계승하게 한다. 이로 인해 순원왕후가 다시
섭정을 하게 되고 안동김씨 세력을 계속 집권하게 된다.
안동김씨는 철종을 무리하게 순원왕후의 아들로 입적시키면서까지 세력을 연장하
며 철종의 비를 김문근의 딸로 간택하게 하여 세도는 더욱 굳어졌다.
철종은 여러 아들을 두었으나 모두 일찍 죽었다. 후사가 없이 1863년 죽자, 대왕
대비 조씨(신정왕후/효명세자의 비,조만영의 딸)가 이하응의 둘째 아들 이명복을
고종으로 삼았다.
흥선 대원군(왕이 후사 없이 죽을때 새로운 왕의 아버지. 살아서 대원군이 된 유
일한 사람이 흥선대원군)의 섭정으로 안동김씨의 권한이 대원군의 세도로 바뀌게
된다.
중에서도 가장 미약한 가문으로 고아나 다름없는 민치록의 외동딸인 민비를 선택
하게 된다.
민비사이에 틈이 벌어지게 된다.
민승호,민겸호형제(대원군의 처남,특히 민승호는 아들이 없는 민치록의 양자가 되
어 민비의 양 오라버니가 됨)와 민규호,민태호형제들의 외척세력이 성장하게 된다.
이 시작된다. 1882년 민겸호가 군대 급료를 썩은 곡식이나 모래가 절반인 곡식을
나눠 준 것이 계기가 되어 임오군란이 일어나게 되고 민비가 쫒겨나게 된다.
새로이 대원군이 등장하였으나 청의 대원군 납치로 민씨 정권이 새롭게 서게 된다.
1884년 김옥균을 위시한 개화당 세력의 갑신정변은 민비세력을 제거하고 근대민
족국가를 수립할려는 계획은 새롭게 청의 개입을 받게 된다.
1885년 일본의 요구로 대원군이 환국하지만 민씨정권과의 잡음은 계속된다. 1895
년 민비가 일본 낭인에 의해 시해됨으로써 민씨정권도 종말을 고하게 된다.
세우고 있었다. 우리 어느 누구도 믿기 힘든 말기현상들이 연이어 졌다.
안타까운 잊지 못할 일들이 벌어졌던 것이다.
1.조선시대 당쟁사1·2 (이성무)
2.성공한 개혁 실패한 개혁 (이덕일)
3.조선을 뒤흔든 최대역모사건 (신정일)
4.왕의 투쟁 (함규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