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미/뿌리

구고서원

土談 2011. 8. 29. 18:34

 

 

 

명칭 : 구고서원 (九皐書院)

원소재지 : 경상북도 영주시 구구리 도인봉 아래

현소재지 : 경상북도 영주시 단산면 사천리 새내

건축주 : 지역사림

건축시기 : 1753년(영조 29)

소유자(관리자) : 달성서씨 문중(달성서씨 문중)

달성서씨의 세거지 새내에 들어선 구고서원

소백산 국망봉(國望峰)이 동으로 내려오다가 이루어진 미궐봉(薇蕨峰) 앞 기슭에 달성서씨의 500년 세거지 새내[沙川]가 자리 잡고 있다. 동쪽의 대마산(大馬山)이 청룡, 서쪽의 송학산(松鶴山)이 백호를 이루고 있으며, 마을 앞에는 순흥평야와 단산평야가 서로 만나면서 옥답이 펼쳐져 있다. 또 구계수와 죽계수가 마을을 좌우로 휘감고 있다. 이곳 새내에 세워진 것이 구고서원이다.

성명 : 서한정(徐翰廷)  (1407년(태종 5) ~ 1490년(성종 21))

본관 : 달성 (達城)

출생지 : 대구(大邱) 화원현(花園縣)

출신지 : 영천(榮川)

분묘지 : 영천(榮川)의 산이리(山伊里)

대구에서 영천(榮川)으로 이주하여 은둔의 삶을 살다

서한정의 생애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그리 많이 남아 있지는 않다. 그는 사마시에 급제한 이후 진사로서 벼슬에 아주 생각이 없었던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그러나 세조가 즉위한 이후로 벼슬을 접고 은거하면서 세상과 인연을 끊고 스스로를 돈암(遯菴)이라 하였다.

그 당시 서한정의 심경은 다음의 대사에서도 잘 드러난다. “세상이 지금과 같아서는 말을 하고 싶지 않구나. 어느 곳에 내 몸 숨길 별 천지가 있겠는가?” 서한정의 이러한 태도에 대하여 사돈이었던 회봉(檜峰) 권득평(權得平)은 공을 백이(伯夷)에 비유하기도 하였으며, 그 외의 많은 선비들은 영리를 선택하지 않은 그의 절개에 높은 가치를 부여하였다.

세조의 즉위 무렵 서한정은 증조 대부터 살기 시작하던 대구에서 영천의 산이리(山伊里)로 옮겨 왔고, 만년에는 순흥 지역 남쪽 아래, 궐봉(蕨峰)의 동쪽에 있는 마을인 풍기의 등강촌(登岡村)으로 옮겨 왔다. 단종이 보위에 있을 당시 비록 진사에 불과했지만, 세조 즉위 이후 이곳으로 옮겨와 벼슬을 접고 은둔의 삶을 살다가 8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분묘는 영천의 산이리 지역이다.

돈암의 절개를 닮은 새내의 맑은 샘, 음양천(陰陽泉)

 

 달성서씨들 중 새내에 사는 서한정의 후예를 새내서씨라고 부른다. 이 서한정의 후예는 자신들이 충  신   의 후예라는 점에 대해 대단한 자긍심을 가지고 있다. 이 마을 중심은 서한정의 절개만큼이나 차고 맑은  석간(石澗) 샘이 있다. 바로 음양천(陰陽泉)이다. 희한하게도 음양천의 물은 맑은 부분과 뿌연 부분이 반씩 나뉘어 있고 서로 뒤섞이지 않기 때문에 ‘음양’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새내 주민들은 지금도 이 샘을 식수로 쓰고 있고, 1년에 한번씩 이 샘에 제사를 지내오고 있다. 조선 후기 문과에 급제한 서한정의 후예 서재무(徐在懋)는 「음양천중수기문(陰陽泉重修記文)」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기이하구나, 이 샘물이여!

맑은 것과 뿌연 것이 반으로 나뉘었네

맑은 것은 거울 같고

뿌연 것은 하늘의 구름 같네

휘저어도 서로 섞이지 않고

담으면 고운 무늬가 생겨나네.

한여름엔 얼음처럼 서늘하고

엄동에는 온기가 스며있네.

오래도록 이 물 맛 전혀 변하지 않으니

샘의 근원이 깊고도 멀어서겠지.

 

성명 : 서한정(徐翰廷) , 1407년(태종 5)년 ~ 1490년(성종 21) 년
본관 : 달성(達城)
: 돈암(遯菴)
출생지 : 대구(大邱) 화원현(花園縣)
출신지 : 영천(榮川)
분묘지 : 영천(榮川)의 산이리(山伊里)
대구에서 영천(榮川)으로 이주하여 은둔의 삶을 살다

서한정의 생애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그리 많이 남아 있지는 않다. 그는 사마시에 급제한 이후 진사로서 벼슬에 아주 생각이 없었던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그러나 세조가 즉위한 이후로 벼슬을 접고 은거하면서 세상과 인연을 끊고 스스로를 돈암(遯菴)이라 하였다.

그 당시 서한정의 심경은 다음의 대사에서도 잘 드러난다. “세상이 지금과 같아서는 말을 하고 싶지 않구나. 어느 곳에 내 몸 숨길 별 천지가 있겠는가?” 서한정의 이러한 태도에 대하여 사돈이었던 회봉(檜峰) 권득평(權得平)은 공을 백이(伯夷)에 비유하기도 하였으며, 그 외의 많은 선비들은 영리를 선택하지 않은 그의 절개에 높은 가치를 부여하였다.
세조의 즉위 무렵 서한정은 증조 대부터 살기 시작하던 대구에서 영천의 산이리(山伊里)로 옮겨 왔고, 만년에는 순흥 지역 남쪽 아래, 궐봉(蕨峰)의 동쪽에 있는 마을인 풍기의 등강촌(登岡村)으로 옮겨 왔다. 단종이 보위에 있을 당시 비록 진사에 불과했지만, 세조 즉위 이후 이곳으로 옮겨와 벼슬을 접고 은둔의 삶을 살다가 8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분묘는 영천의 산이리 지역이다.

가족이야기

: 서사민(徐士敏)
생부 : 서균(徐均)
대구 화원현(花園縣)에 자리를 튼 달성서씨

서한정의 본관은 달성이다. 고조 대 이전의 선계에 대한 기록은 자세하게 남아 있지 않다. 서한정의 고조는 생원(生員) 서원(徐遠), 증조는 좌사간(左司諫) 서충(徐衷), 조부는 통훈대부(通訓大夫) 서사민(徐士敏)으로 지청도군사(知淸道郡事)를 역임하였다. 부친은 생원 서균(徐均)이다. 증조부인 서충이 언관으로써 직언을 한 것이 잘못 되어 쫓겨난 뒤로 벼슬을 하지 않고 대구 화원현에 퇴거하여 살았으며 후손들도 대대로 그곳에 머물게 되었다.
생모에 대한 기록은 보이지 않으며, 처는 월성손씨(月城孫氏) 훈련참군(訓練參軍) 손권(孫權)의 딸이면서 한성 좌윤(漢城左尹)을 지낸 정도복(鄭道復)의 외손(外孫)이다. 자손으로는 1남이 있는데, 종사랑(從仕郞)을 지냈으며 권득평(權得平)의 딸과 혼인하였다.

학문이야기

향사 : 구고서원(九皐書院) 
학파 :
교유인물
권득평(權得平)
예(禮)에 충실했던 충신

서한정의 학문에 대한 언급은 많이 나타나 있지 않다. 다만 권득평이 쓴 제문에는 “청아한 절개와 탁월한 행실[淸操卓行]이 있었다.”고 칭찬하고 있다. 가장(家狀)에서도 학문과 관련한 것으로는 “과거를 폐하고, 어버이를 섬김에 효를 다하고 거상(居喪)에서는 정성을 다하여 예에 따라 어김이 없었다. 밤낮으로 단정히 앉아서는 성리의 학문에 마음을 다하였다.”라는 기록 정도가 남아 있다.
여기서의 예는 당대 학자들이 모두 실천하고자 했던 『주자가례』로 보여 진다. 이러한 구문을 통해 성리학을 체득하고, 몸소 실천하려 했던 조선 전기 학자의 모습을 서한정에게서도 잘 발견할 수 있다. 또한 단종의 폐위와 함께 벼슬길을 접었던 그의 행적은 선비의 고고한 절개와 신하의 충을 실천한 것으로 후대에도 길이 남겨지게 되었다.
돈암 서한정을 배향한 서원으로 구고서원(九皐書院)이 있었으나 고종 때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해 철거되어 구고서당(九皐書堂)이라는 현판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현재 구고서원 현판과 여러 부속건물의 현판은 책실(冊室)에 보관하였었는데, 근래에는 소수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다.

저작이야기

『돈암집』의 구성과 내용

『돈암집』은 돈암 서한정의 시문집으로 2권 1책이다. 시(詩)와 부록(附錄)으로 되어 있다. 시는 은둔하는 자신의 감정을 읊은 것이 많으며, 부록은 권득평이 쓴 정돈암신거(呈遯菴新居)·우후정돈암(雨後呈遯菴)·제문(祭文)·영주지(榮州志)·달성세보서(達成世譜序)·묘갈명(墓碣銘)·묘지명(墓誌銘)·가장(家狀)·등강기(登岡記)·등강지(登岡誌)·신편장릉지(新編莊陵誌) 등 22편이 수록되었다. 대부분 서한정의 생애와 그의 행적에 관한 기록이다.
그 외에 권득평이 쓴 정돈암신거·우후정돈암은 단종을 생각하며 세조 때 과감하게 벼슬을 포기하고 은둔한 그의 절개를 백이에 견주는 내용이다. 신편장릉지는 장릉 즉 단종에 대한 충절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로써 가치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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