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세기에 쓰인 [한원(翰苑)]에는 “고려기(高麗記)에는 마다산은 나라 북쪽에 있다. 고려(고구려)의 중앙이다. 이 산이 가장 크다. 거기에서 인삼 등이 많이 난다.”라는 기록이 있다. 고구려 인삼의 생산지까지도 중국인의 관심 대상이었던 것이다. 관정(灌頂:561〜632)이 쓴 [국청백록(國淸百錄)]에는 “고구려 영양왕이 인삼을 수나라에 보냈다.”는 기록이 보인다. 7세기 초 고구려는 유성(현 요령성 조양시) 지역에 한번에 2만 명의 돌궐 상인단을 맞이할 수 있는 거대한 국제시장을 운영하고 있었다. 이곳에서 고구려는 인삼 등의 약재, 사향, 담비가죽, 식량, 실크, 각종 공예품, 다시마를 비롯한 해산물 등을 교역했다. 인삼은 가죽제품, 사향 등과 함께 수-당나라가 이곳에서 고구려로부터 수입해가는 주요 상품이었다.
인삼에 관한 노래
도홍경이 쓴 [명의별록(名醫別錄)]에 실린 <본초경집주(本草經集註)>라는 책에는 고구려인의 작품인 인삼 노래가 전해오고 있다.
“줄기는 셋이고 잎은 다섯 갈래이네, 해를 등지고 그늘과 같이하나니, 인삼이 나를 찾아온다면, 잎 큰 나무 아래에서 만나리라.” (三柯五葉, 背陽同陰, 欲來求我, 柯樹相尋)
당시 인삼은 재배삼이 아니라, 산에서 심마니들이 채취하는 산삼이었다. 인삼 노래에 등장하는 것처럼 사람이 인삼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인삼이 사람에게 보여주어야만 하는 신비한 약물로 여겨졌음을 알 수 있다. 도홍경은 당시에도 심마니들이 산삼을 채취하는데 엄한 법칙이 있었다고 전하고 있다. 고구려, 백제, 신라는 중국에 다수의 약재를 수출했었다. 이 중에는 금가루(金屑), 다시마(昆布), 말린 지네(蜈蚣), 우황(牛黃) 등도 있었지만, 대다수는 인삼, 세신(細辛-족두리풀의 뿌리를 건조시킨 약재), 오미자(五味子), 관동화(款冬花-머위의 꽃봉오리를 말린 것), 여여(䕡茹-미나리아재비과의 오독도기풀), 무이(蕪荑-큰잎느릅나무의 열매를 말린 약), 백부자(白附子-미나리아재비과의 여러살이풀의 덩이뿌리), 남등근(藍藤根-식물성 약재) 등의 약초들이었다. 삼국시대에도 심마니, 약초꾼이 하나의 직업으로서 존재했던 것이다.
신라의 인삼 수출
백제와 고구려만 인삼을 수출한 것은 아니다. 신라 역시 인삼 수출에 나섰는데, 734년의 경우 당나라에 한번에 200근 이상을 수출하기도 했다. 신라에서는 1척 남짓한 인삼을 삼나무를 양편에 대고 붉은 비단으로 싸서 수출했다. 신라 출신으로 당나라에서 관리생활을 했던 최치원(857〜?)은 자신의 상관에게 인삼을 따로 챙겨 줄만큼, 인삼은 신라를 대표하는 상품으로 당나라에 알려졌고, 당나라의 소비층 또한 많았던 것이다.
신라는 인삼을 일본에도 수출했다. 701년에 만들어진 일본의 고대 법령인 ‘대보령(大寶令)’에 인삼 관련 조문이 있을 정도다. 752년 일본인들이 신라의 물건을 구하고자 신청한 문서인 ‘매신라물해(買新羅物解)’에는 인삼을 구해달라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신라뿐만 아니라, 발해의 경우도 739년에는 문왕이 일본에 인삼 30근을 일본에 보내기도 했다. 백제와 고구려 인삼의 평가처럼, 신라 인삼은 발해 인삼보다 더 높은 평가를 받았다. 인삼은 토질에 따라 그 품질이 달라진다. 일본에서는 에도시대(1603〜1867)에 인삼 수요가 크게 늘어났다. 수요가 늘자 인삼을 자급하려는 노력이 나타나, 1728년 일본에서 인삼 재배에 성공하기도 했다. 하지만 품질이 좋지 못해 결국 조선에서 인삼을 계속 수입 할 수 밖에 없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