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미/요리조리(食)

인삼

土談 2011. 11. 23. 22:22

 

유럽인들이 아프리카를 돌아 아시아로 오고자 했던 가장 중요한 이유는 후추를 얻기 위함이었다. 후추를 비롯한 동남아시아의 향료, 중국의 비단, 도자기, 차 등은 세계사를 변화시킨 아시아의 특산품이자, 수출품이었다. 한국사에서 이와 같은 수출품을 찾자면, 단연코 인삼이라고 할 수 있다.

 

 

인삼의 약효


인삼이 한국의 대표적인 수출품이 되었던 까닭은 탁월한 약효 때문이었다. 인삼은 독성이 거의 없고, 만병에 효과가 있다고 알려져 있다. 사포닌(Saponin), 진세노사이드(Ginsenoside) 등의 성분을 함유한 인삼은 심장 등 오장(五臟)을 보호하고 정신을 안정시키며, 눈을 밝게 하고, 또 오래 복용하면 몸이 가벼워지고 오래 살 수 있다고 알려져 왔다. 실제로 인삼의 신진대사 촉진 작용, 진정작용, 혈당강하, 혈압강하, 면역력 향상, 암세포 억제, 피로 회복, 노화 방지 등 다양한 효능은 현대 의학으로도 입증되고 있다.

 

 

인삼에 관한 최초의 기록


인삼에 대한 최초의 기록들은 중국 쪽 문헌자료에 등장한다. 전한의 원제(B.C. 48~33) 때 사유(史游)가 지은 문자교본인 [급취편(急就篇)] 1,900자 가운데 ‘삼(蔘)’ 글자가 등장한 것으로 볼 때, 약 2천년 이전부터 인삼이 세상에 알려졌다고 할 수 있다. 후한 헌제의 건안(196〜220)연간에 장중경이 저술한 의서[상한론(傷寒論)]에서는 처음으로 인삼을 이용한 21개 처방법이 등장한다. 이것으로 보아 인삼이 약재로서 이미 사용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백제와 고구려의 인삼

 

도홍경(陶弘景:456〜536년)이 쓴 [본초경집주(本草經集註)]에는 인삼의 생산지, 품질을 비롯하여 그 약효와 사용법 등 인삼에 관한 많은 정보가 담겨있다. 이 책에는 아래와 같은 기록이 등장한다.

“인삼은 백제의 것을 중요시하는데, 모양은 가늘지만 단단하고 희며 기운과 맛은 상당(上黨)삼보다 부드럽다. 다음으로는 고구려산을 사용하는데 고구려는 바로 요동이다. 모양은 크지만 속은 성글고 연하여 백제의 것보다 못하다. 백제가 요사이 사신을 고구려에 딸려 보내어 인삼을 가져오는 것이 (백제산과 고구려산) 두 가지이다. 오로지 사용처에 맞추어 골라 사용할 뿐이다. 실제로 사용해보면 상당삼보다 못하다.”

여기에 등장하는 상당(上黨)은 중국 산서성(山西省) 지역이다. 그런데 상당삼은 이미 당나라 시대에 멸종되었고, 초롱꽃과에 속하는 만삼(蔓蔘)이며, 도라지와 비슷한 것으로 인삼이 아니라고도 한다. 5〜6세기 중국에서 널리 소비된 것은 백제 인삼과 고구려 인삼이었다. 537년에 양나라 숙자현이 쓴 [남제서(南齊書)] ‘고려전(高麗傳)’에는 “고구려에서는 은산에서 은을 채취하여 재화로 삼았고, 인삼과 담비가죽 또한 그러하다.” 는 기록이 있다. 중국 기록에 특별히 인삼, 담비가죽, 은 등이 소개된 것은, 중국인들이 고구려에서 수입하고자 하는 것들이었기 때문이다. 인삼은 고구려와 백제의 주요 수출품이었다. 특히 5〜6세기 전성기를 맞이한 고구려는 백제로부터 양나라에 대한 인삼 교역권을 빼앗기도 했을 만큼, 교역의 이익이 컸던 물건이었다.


약효가 뛰어난 것으로 알려진 우리 인삼은 일찍부터 중국으로 수출되는 교역품이었다. <출처:gettyimages>

 

 

 

7세기에 쓰인 [한원(翰苑)]에는 “고려기(高麗記)에는 마다산은 나라 북쪽에 있다. 고려(고구려)의 중앙이다. 이 산이 가장 크다. 거기에서 인삼 등이 많이 난다.”라는 기록이 있다. 고구려 인삼의 생산지까지도 중국인의 관심 대상이었던 것이다. 관정(灌頂:561〜632)이 쓴 [국청백록(國淸百錄)]에는 “고구려 영양왕이 인삼을 수나라에 보냈다.”는 기록이 보인다. 7세기 초 고구려는 유성(현 요령성 조양시) 지역에 한번에 2만 명의 돌궐 상인단을 맞이할 수 있는 거대한 국제시장을 운영하고 있었다. 이곳에서 고구려는 인삼 등의 약재, 사향, 담비가죽, 식량, 실크, 각종 공예품, 다시마를 비롯한 해산물 등을 교역했다. 인삼은 가죽제품, 사향 등과 함께 수-당나라가 이곳에서 고구려로부터 수입해가는 주요 상품이었다.

 

 

인삼에 관한 노래


도홍경이 쓴 [명의별록(名醫別錄)]에 실린 <본초경집주(本草經集註)>라는 책에는 고구려인의 작품인 인삼 노래가 전해오고 있다.

“줄기는 셋이고 잎은 다섯 갈래이네, 해를 등지고 그늘과 같이하나니,
인삼이 나를 찾아온다면, 잎 큰 나무 아래에서 만나리라.”
(三柯五葉, 背陽同陰, 欲來求我, 柯樹相尋)

당시 인삼은 재배삼이 아니라, 산에서 심마니들이 채취하는 산삼이었다. 인삼 노래에 등장하는 것처럼 사람이 인삼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인삼이 사람에게 보여주어야만 하는 신비한 약물로 여겨졌음을 알 수 있다. 도홍경은 당시에도 심마니들이 산삼을 채취하는데 엄한 법칙이 있었다고 전하고 있다. 고구려, 백제, 신라는 중국에 다수의 약재를 수출했었다. 이 중에는 금가루(金屑), 다시마(昆布), 말린 지네(蜈蚣), 우황(牛黃) 등도 있었지만, 대다수는 인삼, 세신(細辛-족두리풀의 뿌리를 건조시킨 약재), 오미자(五味子), 관동화(款冬花-머위의 꽃봉오리를 말린 것), 여여(䕡茹-미나리아재비과의 오독도기풀), 무이(蕪荑-큰잎느릅나무의 열매를 말린 약), 백부자(白附子-미나리아재비과의 여러살이풀의 덩이뿌리), 남등근(藍藤根-식물성 약재) 등의 약초들이었다. 삼국시대에도 심마니, 약초꾼이 하나의 직업으로서 존재했던 것이다.

 

 

신라의 인삼 수출


백제와 고구려만 인삼을 수출한 것은 아니다. 신라 역시 인삼 수출에 나섰는데, 734년의 경우 당나라에 한번에 200근 이상을 수출하기도 했다. 신라에서는 1척 남짓한 인삼을 삼나무를 양편에 대고 붉은 비단으로 싸서 수출했다. 신라 출신으로 당나라에서 관리생활을 했던 최치원(857〜?)은 자신의 상관에게 인삼을 따로 챙겨 줄만큼, 인삼은 신라를 대표하는 상품으로 당나라에 알려졌고, 당나라의 소비층 또한 많았던 것이다.

 

신라는 인삼을 일본에도 수출했다. 701년에 만들어진 일본의 고대 법령인 ‘대보령(大寶令)’에 인삼 관련 조문이 있을 정도다. 752년 일본인들이 신라의 물건을 구하고자 신청한 문서인 ‘매신라물해(買新羅物解)’에는 인삼을 구해달라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신라뿐만 아니라, 발해의 경우도 739년에는 문왕이 일본에 인삼 30근을 일본에 보내기도 했다. 백제와 고구려 인삼의 평가처럼, 신라 인삼은 발해 인삼보다 더 높은 평가를 받았다. 인삼은 토질에 따라 그 품질이 달라진다. 일본에서는 에도시대(1603〜1867)에 인삼 수요가 크게 늘어났다. 수요가 늘자 인삼을 자급하려는 노력이 나타나, 1728년 일본에서 인삼 재배에 성공하기도 했다. 하지만 품질이 좋지 못해 결국 조선에서 인삼을 계속 수입 할 수 밖에 없었다.

 

 

  

고려의 홍삼

 

천성산 관음사 목조관음보살상에서 발견된 인삼. 방사성 탄소연대 측정 결과 1060AD 전후의 시기가 밝혀져, 우리나라에서 유일한 고려인삼이라는 사실이 확인된 바 있다.


고려는 송나라 등과 활발한 무역을 했는데, 고려시대에 한번 사신이 방문할 때 가져간 인삼은 1,000근이나 되었다. 송나라 뿐 아니라 아라비아, 동남아 여러 나라와도 활발한 교역이 이루어졌는데, 고려에 온 아라비아 상인들은 그들의 토산품을 바치고 고려 인삼을 교역 했을 것이다. 원나라 황제들도 고려의 인삼을 대단히 좋아했다.

 

고려 시대에는 인삼을 장기간 보존할 수 있는 홍삼 제조기술이 등장했다. 1123년 고려를 방문한 송나라 사신 서긍(徐兢)이 쓴 [고려도경(高麗圖經)]에는 고려인삼에 관해 “여름을 지나면 좀이 먹으므로 쪄서 익혀 오래 둘 수 있는 것만 같지 못하다”고 하여, 인삼을 쪄서 만든 홍삼 제조 기술이 이미 개발되어 있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2010년 2월, 천성산 관음사 목조보살좌상(1502년 만들어진 조선의 불상)의 복장유물(腹藏遺物)에서 약 1,000여 년 전 고려시대의 것으로 보이는 홍삼이 발견된 바 있다. 복장유물이라 함은 불상을 만들 때 불상 안에 넣는 불경, 공예품, 각종 보석류와 같은 문화재를 일컫는 말인데, 오래된 홍삼이 귀한 것이다 보니 부처님께 공양하기 위해 불상 안에 넣어진 것이라고 하겠다.

 

 

  

인삼의 대량 재배

 

인삼은 조선 시대에 들어와 더욱 중요한 수출품이 되었다. 명나라는 조선에게 인삼을 조공품으로 바치라고 요구했다. 명나라 말부터 중국인들의 인삼 수요는 더욱 커져갔다. 조선은 사신단의 비용을 중국에 가서 인삼을 판 것으로 충당하기도 했다.

 

고려 시대까지 인삼은 산삼이어서, 생산량에 한계가 있었다. 그런데 조선 초기부터 서서히 인삼의 인공재배가 시작되었다. 특히 1724년 개경 사람 박유철 등이 해를 가리는 방법으로 인삼 농사법을 개발해 인삼을 대량으로 재배하는데 성공하게 되었다. 서유구(徐有榘 : 1764~1845)가 쓴 [임원십육지(林圓十六志)]에 제주도를 제외한 전 국토에서 인삼이 분포한다고 할 정도로 인삼 재배는 빠르게 전국으로 확대되었다. 청나라에 대한 인삼 수출은 계속해서 늘어나, 1851년에는 4만 근까지 늘어났다. 인삼이 아편에 찌든 사람들에게 특효라는 소식에 인삼 소비가 빠르게 늘어났기 때문이었다.


조선에 이르러 인삼의 인공재배가 이루어지기 전까지 인삼은 채취하는 방식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었다. <출처:gettyimages>

 

 

 

의주상인 임상옥은 1821년 사신단을 따라 청나라에 갔을 때, 베이징 상인들의 불매 동맹을 교묘한 방법으로 깨뜨리고 원가의 수십 배로 인삼을 매각하는 등 막대한 재화를 벌기도 했다. 인삼 무역이 확대됨에 따라 조선의 국가 재정에서 인삼을 통해 얻는 수익의 비중은 커져만 갔다. 점차적으로 조선은 인삼을 매개로 일본의 은과 중국의 비단 교역을 키워갔다. 인삼이 일본과 중국을 잇는 동아시아 삼국교역에서 핵심 물품의 위치를 차지했던 것이다.

 

 

서양에도 알려진 인삼


16세기부터 아시아로 진출하기 시작하던 서양인들도 조선 인삼의 가치에 대해 적잖게 파악하고 있었다. 17세기 암스테르담 시장을 역임한 학자인 니콜라스 비첸(Nicolaas Witsen)은 그의 저서 [북부 및 동부 아시아 지리지]에서 조선은 ‘인삼’이라는 대단히 중요한 교역 특산품이 있다고 강조했다.

 

‘Ginseng’이란 말은 1762년 프랑수아즈에 의해 공인된 말로, 당시 프랑스에서는 고려인삼에 대해 백과전서 한 페이지를 할애해 논할 정도였다. 이와 같이 서양인들은 중국에서 조선 인삼의 인기가 대단하다는 것을 알고 이와 유사한 종을 조선 밖에서 찾기 시작했다. 그들은 목적은 자신들의 소비가 아닌, 동아시아 시장에 팔기 위해서였다. 마침내 1715년 프랑스의 라피노(Joseph Francois Lafitau) 신부가 캐나다 퀘벡 지역에서 인삼과 유사한 종을 찾아낸다. 또 네덜란드 상인들을 중심으로 다량의 인삼이 애팔래치아 산맥에서 채집되었고, 1740년대에는 중국으로 수출되었다. 물론 효능은 조선의 인삼이 아메리카 인삼보다 더 탁월했지만, 문제는 가격이었다. 조선의 인삼은 약으로 비싼 가격에 팔렸지만, 월등히 싼 아메리카 인삼은 대중들이 건강식품처럼 구입했다. 아메리카 인삼 탓에 조선은 가격을 유지하기 위해 수출물량을 제한하기도 했다. 조선 홍삼의 1/5 가격의 아메리카 인삼은 1862년에는 무려 286톤(약 48만근)이나 수출되었다. 이것이 결국 조선 인삼의 독보적인 위치를 흔들어 놓았다. 지금도 세계 시장에서는 외국산 인삼들이 값싸다는 이유로 많이 팔리고 있지만, 약효만큼은 절대로 우리나라 인삼을 따라오지 못한다.

 

 

하늘이 이 땅에 내려준 귀한 선물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특산물인 인삼 덕분에 우리 조상들은 외국과 많은 교역을 할 수 있었다. 만약 인삼의 인공재배가 좀 더 일찍 이루어졌더라면, 고가의 홍삼 수출만이 아니라 저가의 인삼 수출에도 조선이 좀 더 적극적이었다면, 인삼은 세계 역사를 바꾼 상품이 될 수 있었을지 모른다. 인삼이 없었다면 우리 무역의 역사는 매우 소략했을 것이다. 인삼은 우리 조상들의 삶에 큰 영향을 끼친, 하늘이 이 땅에 내려준 귀한 선물이었다.

 

 

참고문헌:신순식 외, [한국한의학사 재정립- 보건복지부 연구개발사업 보고서], 한국한의학연구소, 1995; 양정필, 여인석, [중국인삼의 실체에 대한 비판적 고찰], “醫史學”, 12권 2호, 2003; 양정필, 여인석, [조선인삼의 기원에 대하여], “醫史學”, 13권 1호, 2004; 최광식 외 5인, [한국무역의 역사], 재단법인 해상왕장보고기념사업회, 2004; 자크 브로스 저, 양영란 옮김, [식물의 역사와 신화], 갈라파고스, 2005

 

 

 

 

김용만 / 우리역사문화연구소장
글쓴이 김용만은 고구려를 중심으로 한국 고대사를 연구하고 있다. 현재는 삼국시대 생활사 관련 저술을 하고 있으며, 장기적으로 한국고대문명사를 집필하려는 계획을 갖고 있다. [고구려의 그 많던 수레는 다 어디로 갔을까], [새로 쓰는 연개소문전], [광개토태왕의 위대한 길] 등의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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