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 정약용 선생의 목민심서
다산은 조선후기 사람으로 개혁의지를 갖고 있는 정조 임금의 신임을 받고 정사에 몰두하며 정치, 과학, 문화, 경제 등 다양한 능력 있는 목민관으로써 최선을 다합니다. 그러나 정조가 승하하자 남인, 북인, 노론, 소론이라는 사색당파싸움의 희생양이 되어 전라남도 강진으로 귀양살이를 떠나며..
유배 생활은 무려 18년간 지속됩이다.
그는 긴 유배생활동안에 한 번도 남을 원망하는 일이 없이 나라를 구하는 길은 백성들을 깨우치는 일이라며 저술 활동에 몰입합니다.'국가와 나' 나라가 있기에 나도 존재한다는 굳은 신념을 가지고 '목민심서'를 비롯해 155권이라는 역작들을 저술한 것입니다.그것도 붓글씨로 만든 점을 생각할 때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다산은 젊은 시절 서울의 창동 집에서 그의 형 정약전과 함께 살면서
과거시험 준비를 하였습니다.
그 때 문간방에 살고 있는 목수가 자신이 발명한 솜틀기계로 많은 재산을 모아 그 발명 댓가로 거금을 건내 주자, 한사코 거절하였고, 부인까지도 절대 받으면 안 된다고 타이른 것을 보면 그의 청렴도는 오늘의 목민관들에게 귀감이 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다산이 지은 목민심서 48책을 간추려 정리하면 다산의 애민(愛民)사상을 6등급으로 구분 정리할 수 있습니다. 그 올바른 복지정치, 첫째가 양노(養老)에 두고 올바른 정치는 노인들이 안락하게 살아갈 수 있고, 둘째는 유아(幼兒)들이 안전하고 행복하게 자랄 수 있는 환경을 만들며,셋째는 장애인 병자, 홀아비, 과부 즉 사궁지수를 꼽았으며, 넷째는 가난한 백성, 다섯째는 상가(喪家)백성, 마지막으로는 재난당한 백성을 돕는 것으로 애민(愛民)사상을 베풀고 실천하는 삶을 살은 것이다.저출산고령사회인 21세기
목민심서의 부활과 역량을 엿볼수 있는 대목입니다
다산은 세상을 떠나기 전 당시의 당파싸움과 부정부패의 행태를 보면서 이대로 가다가는어느 땐가는 나라가 망하고 말 것이라고 예견하였다합니다. 그 예견은 적중하여 우리나라는 1910년 경술국치를 겪게 되고 나라를 일본에게 넘겨주고 말았습니다. 오늘의 현실을 바라볼 때 21세기 목민심서의 부활과 역량이 절대적으로 요구됨과 동시에 청렴과 친절을, 공과 사를 뚜렷하게 구분 지을 줄 아는 다산 정약용과 같은 목민(牧民)관이 나라 여기, 저기에서 나와 애민(愛民)정치를 해야 할 때가 지금인 것입이다.
우리는 민족의 큰 스승이요 대 사상가인 다산 정약용의 위대한 저술 작품인 ‘목민심서(牧民心書)를 내 삶의 경전이라 생각하여 읽고 또 읽어 너와 내가 모두 훌륭한 목민관(牧民館)되는 것이기를 소망합니다.
다산 정약용 선생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대학자로 특히 실학사상을 집대성한 분으로 널리 알려저 있는 역사적 인물입니다. 실학이란 공리 공론을 버리고 국가의 발전과 백성의 삶을 향상시키기 위한 학문이라고할 수 있으며 다산 정약용 선생의 학문은 국가와 백성에 봉사하고자 하는 깊은 뜻이 담겨저 있다 할것입니다.
다산 선생의 삶은 1800년을 기점으로 전기와 후기로 나뉠 수 있습니다.1800년 이전 38년간의 삶은 정조 대왕의 탕평정책 아래 훌륭한 관료로서 살았던 삶이라면 1800년 이후 36년간은 18년간에 걸친 유배로 은둔의 생활을 했던 삶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오랜 유배생활의 마지막 해인 1818년 선생의 나이 56세에 완성한 목민심서는 관료생활에서 쌓은 경험과 유배생활에서 겪은 백성의 삶을 토대로 한 사색의 결정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목민심서는 지방관리들의 폐해로 인해 백성의 삶이 궁핍해지고 있는 상황을 비판하고지방관리들이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를 제시한 글로서 개혁과 개방을 통해 부국강병을 주장한 글입니다. 이를 위해 선생이 강조한 대목으로 부정부패의 척결입니다.관리들의 부정부패는 곧 백성들의 삶에 궁핍으로 귀결될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오늘날 우리사회도 고위층의 고질적인 부정부패가 사회적 문제로 국민들에게 상대적 박탈감을 심어주므로서 사회적 통합을 제어하는 요인으로 발생하며 또한 국민들의 건전한 근로의욕을 저하시켜 사회와 국가의 발전을 가로막는다는 것입니다.
특히나 경제문제로 어려움을 겪는 오늘날 지난 시기의 역사가 보여주듯이 위기극복의 근본적인 국민통합과 공직자들의 애국심과 헌신성 그리고 무엇보담도 투명하고 정직한 마음 가짐의 자세가 절실히 요청되는바 큼니다. 다산 선생의 목민심서는 오늘날 공직자들이 지침으로 삼아야 할 금과옥조와 같은 귀중한 서적으로 옛것을 익히므로서 새것을 얻는다는 온고이지신의 교훈을 세삼 깨닫게 해줍니다.
복지정책 좋고 함께 잘 사는 것 너무 좋지요
이 좋은 정책만 시행하면 만백성은 다
잘 살게 되는 것인지요?
이 어리석은 백성은 좋아만 할 수 없습니다.
나랏일 하는 분들이여~
무엇이 백성을 위하는 길인지
다산 정약용 선생님의 말씀을 숙고하시며
당신들의 잘못이 나라를 삼키지 않도록
그 허울 좋은 위선의 껍질을 깨십시오.-이룻-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은 경학자(經學者), 경세가(經世家)는 물론 과학기술자, 의학자, 언어학자, 지리학자, 시인 등 이루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방대하고 다양한 영역에서 업적을 쌓은 위인이다. 이런 다산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그 전체상(全體像)을 한마디로 말하기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일제강점기와 근ㆍ현대에 이르기까지 그려진 서로 다른 초상화만 해도 일곱 개 정도가 된다. 그럼에도 우리가 알고 있는 다산은 주로 경학(經學)과 경세학(經世學) 등 182책 503권이라는 전무후무한 방대한 저술(著述)에다 인정사정없이 탐관오리(貪官汚吏)를 고발하는 목민관(牧民官)이다. 이러한 다산은 논리와 이성으로 무장한, 오로지 공부밖에 모르는 차가운 사람으로 보이기 일쑤다. 하지만 이것이 인간 다산의 전체적인 모습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오히려 시, 글씨, 그림과 같은 문예(文藝)가 증언하는 다산은 자유분방(自由奔放)한가하면 비분강개(悲憤慷慨)하고 다정다감한 기질의 소유자다.
<다산의 모습을 담은 다양한 초상화> |
1935년 7월 16일자 동아일보에 수록된 삽화 '다산인물상' |
1992년 안보선이 그린 '다산인물상', 개인소장. |
2009년 4월 김호석이 그린 '다산인물상', 강진군 다산기념관 소장. |
장우성의 '다산인물상'을 토대로 설경숙이 그린 '다산인물상', 강진군 다산기념관 소장. |
우선 다산이 어울린 시 짓기 모임인 ‘죽란시사(竹欄詩社)’를 살펴보자. 이 모임은 다산이 중심이 되어 만들어진 남인계열 초급관리들의 사교모임이다. 다산은 출사(出仕) 초기, 즉 정조의 총애를 받으며 관직에 나갈 때인 30대 초반에 채홍원, 이주신, 남태응, 정약전 등 모두 15인으로 죽란시사를 조직한 바 있다. 자신의 서울집인 명례방에 모여 정원에 만발한 꽃을 감상하며 술과 시화(詩畵)로 우의(友誼)를 다졌던 것이다. 재미있는 사실은 모임 시기가 더 시적(詩的)이니 데에 있다. 다산이 적은 죽란시사 서문에 의하면 그들이 모임이 열리던 때는 ‘살구꽃 필 때’, ‘복숭아꽃 필 때’, ‘국화가 필 때’, ‘늦여름 연꽃이 한창일 때’, ‘오이가 익을 무렵’, ‘큰 눈이 내리면 한번’, ‘세모(歲暮)에 분매(盆梅)가 필 때’ 등이다.
술 한 잔에 시 한 수 – 운림(雲林)에 놀고 쉬며
다산의 놀음놀이는 이것만이 아니다. 한 가지 예를 더 살펴보도록 하자. 36세 때인 1797년 여름 어느 날, 다산은 근무지를 무단이탈한다. 조정의 휴가결재 없이는 도성을 못 나간다는 사실을 모를 리 없는 그였다. 공무상 피치 못할 사정도 아니었다. 알고 보니 약전(丁若銓, 정약용의 둘째 형), 약종(丁若鍾, 정약용의 셋째 형) 형님, 친척들과 고향 소내(초천, 苕川)에서 고기를 잡아 탕을 해먹고 천진암에서 술 한 잔에 시 한 수를 읊으며 날을 보내다가 사흘이 지나서야 돌아온 것이다. 이때 지은 시가 20수, 고사리, 두릅 등 먹은 산나물이 56종임을 [유천진암기(遊天眞菴記)]가 기록하고 있다. 딱딱한 목민관 이미지와는 달리 자유분방한 기질에다 풍류(風流)가 보통이 아님을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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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상시축(洌上詩軸)]의 부분. 1824년, 종이에 먹, 23.0×1990cm, 개인소장. 작품 보러가기 |
이와 같은 다산의 천석고황(泉石膏肓: 아름다운 자연의 경치를 사랑하고 즐기는 마음)은 유배나 해배 할 것 없이 전 생애에 걸쳐 확인된다. 예컨대 개인소장의 [열상시축(洌上詩軸)]은 총 길이 20m에 이르는 긴 두루마리 작품이다. 이것은 1824년(순조24) 9월 13일, 그러니까 다산이 강진에서 해배되어 열수(洌水,한강)에 돌아와 6년이 되는 63세 즈음에 고향 친구들과 형제 등 19명이 오랜만에 회포를 풀며 한강에서 뱃놀이를 하고, 사천사(斜川寺)에서 놀면서 지은 것이다. 사언사구(四言四句) 시를 중심으로 48수에 이른다. 시축(詩軸) 서문이 주목되는데 “흩어지고 모임이 일정하지 않음과 깃들고 그침에 자취가 없음을 생각하니 감개(感慨)스러웠다. 인하여 시를 지어 기록하고 나이에 따라 차례를 짓고 그 이름을 적어 뒷날 고증하도록 하였다. 사언사구(四言四句)를 지은 것은 시를 짓는 것으로 그 신령(神靈)을 가리지 않으려는 이유이다.”라고 적고 있다. 200여년 후 오늘을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아 작은 일에도 실학자 다산의 세심한 역사의식을 확인 할 수 있다. 다산의 첫 수를 보자. | |
조용한 저 운림은 / 窈彼雲林 푸르고 깊숙하네. / 靑窅深沈 여기서 놀고 쉬며 / 於焉游息 나의 마음을 즐기노라. / 聊樂我心
다산 정약용이 그린 열상상수도 <열상산수도(冽上山水圖)>, 27.0×33.8cm, 개인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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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정(嚴正)과 활달자재(豁達自在) - 활자체와 광초풍을 하나로
이러한 다산의 성정과 기질은 글씨에서 더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우선 보기에는 제자들이 ‘농묵초서(濃墨草書)를 조금만 덜 했더라면 도학(道學)이 더 높아 졌을 것이다’고 증언하고 있는 퇴계 이황(李滉, 1501~1570)을 보는 듯 하다. 하지만 다산의 글씨는 걷거나(해서), 뛰거나(행초서), 흐트러짐이 없는 퇴필(退筆)의 엄정(嚴正), 단아(端雅)한 짜임새와 미감과는 딴판이다. 굵고 가늘기가 뚜렷하게 차이 나는 명조체(明朝體)의 활자(活字) 골격과 미감이 다산의 해서라면, 행초서에서는 그의 자유분방한 기질이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다산 53세(1814년)때인 강진 유배시절에 지은 [중용강의보(中庸講義補)], [목민심서(牧民心書)] 등의 필치를 보자. 활자로 박아내듯이 마치 사경(寫經)을 하듯 엄정하게 한자 한자 적어내고 있다. 물론 전통적으로 소해(小楷)의 기준이 된 왕법(王法)하고는 거리가 멀다. 퇴계가 해서나 행초의 차이 없이 왕법(王法)을 토대로 둥글고 납작한 필획과 구조로 일관하였다면, 다산의 뚜렷한 태세변화에다 변화불측의 해행으로 구사된 글자 짜임새는 아무리 성정과 기질의 개인차이나 변화된 시대서풍을 감안하더라도 다산만의 독자적인 경지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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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적인 활자체의 경지를 보여준 [목민심서(牧民心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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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격적인 필체를 보여준 [사언고시(四言古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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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나아가 다산이 병객(病客: 늘 병을 지니고 있는 사람)이라고 능청(?)을 떨며 일필휘지(一筆揮之)로 단숨에 구사한 행초 [사언고시(四言古詩)] 6폭 병풍은 전체적으로 원필(圓筆)에다 파격적인 글자 짜임새는 물론, 화면 경영에서도 크고 작은 글자를 극단적이지만 전체적으로 조화롭게 자유자재로 구사하고 있다. 이 작품은 글씨를 넘어 유장한 남도의 육자배기 노래가락을 듣는 듯 하다. 특히 제4폭의 ‘정관(靜觀)’의 결구는 파격과 조자의 극치를 이루고 있다.
물론 이러한 행초서 중심의 다산 글씨의 맥락 한줄기는 원교 이광사(李匡師, 1705~1777)에게서 찾을 수 있다. 원교는 강진과 가까운 신지도에서 23년간 유배를 살면서 글씨만 쓰다 생을 마감한 사람인데, 소위 ‘동국진체’의 맥락을 거슬러가면 그 시발점인 공재 윤두서(尹斗緖, 1668~1715)와 옥동 이서(李潊, 1662~1723)와 맞닿아있다. 다산은 글씨에 관한 한 원교를 통해 외증조부인 공재, 같은 성호의 학맥인 옥동과 삼중으로 거슬러 만나는 셈이다.
다정다감(多情多感)한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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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약용의 [매조도(梅鳥圖)], 1813년, 44.7×.18.4cm, 고려대박물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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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정다감한 ‘인간’ 다산의 성정(性情)은 유명한 고려대 박물관 소장 [매조도(梅鳥圖)]에 잘 그려져 있다. 그림만이 아니라 다산의 시서화(詩書畵)가 하나 된 이 작품은 52세(1813)때 만들어 졌다. [매조도]의 시를 우선 보자.
파르르 새가 날아 / 翩翩飛鳥 뜰 앞 매화에 앉네. / 息我庭梅 매화 향기 진하여 / 有烈其芳 홀연히 찾아 왔네. / 惠然其來 여기에 둥지 틀어 / 爰止爰棲 너의 집을 삼으렴. / 樂爾家室 만발한 꽃인지라 / 華之旣榮 먹을 것도 많단다. 有賁其實
향기 만발하는 정매(庭梅)에 앉은 한 쌍의 새에게 다산은 둥지를 틀어 집을 삼기를 권하고 있다. 이 장면은 감옥 아닌 감옥에 갇혀 딸을 그리는 아버지인 다산과 오버랩 되면서 그 애틋함을 배가시키고 있다. 이 지점에서 매화는 더 이상 군자(君子)가 아니라 펄펄 나는 저 새가 쉬는 정원의 매화나무다. 두 마리 새가 시집가는 딸을 염두에 두고 그려졌다면 비유컨대 신랑과 신부라 할 수 있고, 그렇다면 매화는 그들이 깃을 드리우고 사는 집인 셈이다. 그래서 이 그림에는 딸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과 기원, 그리움이 구구절절(句句節節)이 박혀있는 것이다. [매조도]는 그간 잘 알려져 있었지만, 다산의 전체상 속에서는 보지 못하였다. 차갑게만 느껴지는 경학자, 경세가로서 다산과는 달리 따뜻한 아버지의 연장에서 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더 나아가 죽음을 대신한 유배형의 현장을 ‘다조(茶竈)’, ‘약천(藥泉)’, ‘정석(丁石)’, ‘연지석가산(蓮池石假山)’으로 다산초당을 지어내는 지점은 시서화를 하나로 넘나드는 문인예술가를 넘어 건축가나 조경디자이너로서의 다산을 만나게 한다. 익히 잘 아는 바대로 초당은 다산 유배생활 중 1808년부터 1818년까지 10여 년을 생활한 공간이다. 또 [목민심서(牧民心書)] 등 일표이서(一表二書)와 육경사서(六經四書)의 저술로 다산이 본말(本末)을 갖추었다고 자부하는 500여 권의 저작과 시작(詩作)의 현장이기도 하다. | |
이것은 물론 강진제자들과의 집체(集體)작업의 결과이지만 이런 맥락에서 초당은 조선의 학술 사상사의 기념비적 공간이기도 하다. 다산은 이곳 풍광을 노래한 시를 많이 남겼는데 [다산팔경사(茶山八景詞)]ㆍ[다산사경첩(茶山四景帖)] ㆍ [다산십이승첩(茶山十二勝帖)] 등이다. 이들 작품을 보면 다산초당의 풍광이나 공간배치 변화과정도 알 수가 있는데 초의가 그린 〈다산도(茶山圖)>와 비교하면 흥미가 배가된다. [다산사경첩]의 〈석병(石屛)〉에서 “죽각(竹閣) 서편 머리에 바위가 병풍되니(竹閣西頭石作屛)”이라거나〈다조(茶竈)〉에서 “차 끓이는 부뚜막이 초당 앞에 놓였네(烹茶小竈艸堂前)”, “다조는 지정(池亭) 앞에 있다.(茶竈在池亭之前)”고 하여 초당과 지정을 동일 공간으로 설명한 것이 그 예다.
비분강개(悲憤慷慨)의 목민관
그런대 문예가 증언하는 인간 다산은 그냥 음풍농월(吟風弄月: 맑은 바람과 밝은 달을 대상으로 시를 짓고 흥취를 자아내어 즐겁게 놂)만을 일삼는 시인이나 문인서화가, 조경전문가 이상의 지점에 있다. 요컨대 다산초당은 다산이 꿈꾼 ‘신아지구방(新我之舊邦: 낡은 조선을 새롭게 한다)의 설계사무소인 셈인데 ’다조‘의 솔바람소리(松風)는 그냥 선정(禪定)으로 들어가는 찻물 끓는 소리가 아니라 다산에게는 그 너머에서 들려오는 ‘민중의 울부짖음(天鼓, 천둥소리)인 것이다.
다산이 강진들판에서 자행되는 탐학(貪虐)의 현장을 “...내 살가죽 네가 벗기고 / 내 뼈까지 부순 네놈...”([전가기사])으로 고발하는 지점은 감사, 수령, 아전과 같은 목민관을 적으로 규정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미 ‘백성을 하늘로 여긴’ 유교정치의 종말을 선언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다산 시의 이런 현실참여는 앞서 본대로 그림에서는 직접적으로 드러나지는 않는다. 문인(文人)의 여기로 그려진 그의 그림에서 풍자나 고발을 기대하는 것 자체가 무리일 수 있다. 그렇다고 여느 문인들의 그림과 같이 취급하는 것도 온당치가 못하다. 그림을 그리는 계기가 매우 현실적인데, 앞서 본 [매조도]는 열다섯 나이 때 시집온 부인이 입고 온 빛바랜 분홍치마가 캔버스가 될 뿐만 아니라 이를 마름질하여 적중(謫中: 귀양지)에서 딸에게 남겼다.
매화나 새를 그리는 기법도 사실적이다. 매화라고 하면 은연중에 사군자(四君子)와 바로 통하지만 채색과 흰색호분으로 새의 부리와 꽃송이를 선명하게 담아내는 [매조도]의 묘사기법에서 다산의 그림은 실학적(實學的)인 사실주의(寫實主義) 화풍의 연장선상에서 이해될 수 있는 단초를 제공한다. 요컨대 다산의 매화는 더 이상 퇴계가 형님으로 불렀던 군자(君子)가 아니라 그냥 뜰의 나무다. 이것은 동시대 추사 김정희(金正喜, 1786~1856)가 [불이선란도(不二禪蘭圖)]에서 난(蘭)을 자신과 동일시하면서 유(儒)ㆍ 불(佛)의 불이선(不二禪)과 성중천(性中天)의 경계를 넘나드는 고도의 관념(觀念)세계로 노래한 것과도 다르다. 이런 측면에서 다 같은 경학자의 시와 글씨 그림이라도 동시대의 다산과 추사는 물론, 조선중기 퇴계와 후기의 다산이 다름을 알 수 있다. 요컨대 문예로 보는 다산의 인간상은 이지(理智)와 감성(感性)이 하나 되는 지점에서 그려진다고 하겠다.
打麥行보리 타작
新蒭濁酒如潼白 大碗麥飯高一尺
飯罷取耞登場立
雙肩漆澤翻日赤
'새로 거른 막걸리 젖빛처럼 뿌옇고 큰 사발에 보리밥, 높이가 한 자로세. 밥 먹자 도리깨 잡고 마당에 나서니 검게 탄 두 어깨 햇볕 받아 번쩍이네. 呼邪作聲擧趾齊 須臾麥穗都狼藉 雜歌互答聲轉高 但見屋角紛飛麥
옹헤야, 소리 내며 발맞추어 두드리니 삽시간에 보리 낟알 온마당에 가득하네. 주고받는 노랫가락 점점 높아지는데 보이느니 지붕 위에 보리 티끌뿐이로다
觀其氣色樂莫樂 了不以心爲刑役 樂園樂郊不遠有 何苦去作風盡客
그 기색氣色 살펴보니 즐겁기 짝이 없어 마음이 몸의 노예 되지 않았네. 낙원이 먼 곳에 있는 게 아닌데 무엇하러 벼슬길에 헤매고 있으리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