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세상 이야기

소수서원

土談 2012. 5. 31. 22:07

 

소수서원은 주세붕(朱世鵬, 1495~1554)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풍기군수로 부임한 주세붕은 우리나라 성리학의 선구자 문성공 안향 선생이 젊어서

 

 공부하던 이곳 백운동에 중종 37(1542) 영정을 모신 사묘(祠廟)를 세웠습니다.

 

 

그리고 이듬해에 중국에서 주자가 세운 백록동서원을 본떠 양반자제 교육기관인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을 세웠습니다.

 

 

이후 퇴계 이황이 풍기군수로 부임하면서 명종 5(1550)에 왕에게 진언을 올려

 

 

우리나라 최초의‘紹修書院’(소수서원)이라는 현판을 하사받아 오늘에 이르고 있

 

습니다.

 

 

 

 

 

 

 

명종어필 소수서원 편액

 

 

 

 

 

 

 

이러한 소수서원은 대원군의 서원 철폐 때 살아남은 47개소에 들었으며 사적 제55

 

호입니다.

 

 

조선시대의 사립대학이랄 수 있는 서원은 그렇게 탄생되었고, 조선 중후기에 걸쳐

 

 많은 인재를 배출하면서 학문과 정치의 요람이 되었습니다.

 

서원이 생기기 전의 교육기관으로는 중앙의 성균관과 4부학당,

 

지방의 향교가 있었습니다. 관립기관인 향교는 사립교육기관인 서원이

 

 

생기면서부터 사실상 교육의 기능을 서원에 내주고 문묘제사를 지내는 곳으로

 

역할이 줄어들었습니다.

 

 

서원은 특히 경상도에 많이 세워졌는데, 조선 중종대부터 철종대까지 세워진

 

417개소 중 40%가 넘는 173개소가 경상도에 집중돼 있으며 적으로 200여 곳인

 

사액서원 가운데 56개소가 경상도있었습니다.

 

 

 

 

 

 

 

소수서원 전경

 

 

 

 

 

 

 

 

경북 북부지방이 아직도 추로지향’(鄒魯之鄕), 곧 공자와 맹자의 고향이라는

 

 

자부심을 지니고 있는 것은 이러한 내력 때문입니다.

 

 

본래 서원은 교육을 하는 곳이지만 서원마다 받드는 분이 있어 제사도 중요하게

 

여깁니다. 때문에 서원의 공간은 크게 교육공간과 제사공간으로 나뉘게 됩니다.

 

 

이 두가지 일이 적절히 조화를 이루어 선현의 정신과 뜻을 새기며 학문을 닦고

 

 

자신의 인격을 도야했던 것입니다.

 

 

 

 

 

 

 

 

 

유생들이 공부하던 강학당

 

 

 

 

 

 

 

 

건너편 개울을 보면 문득 바위에 새겨진 白雲洞이란 흰 글씨와 붉은 칠을 한

 

 

자가 보입니다. ‘白雲洞이야 이곳의 명칭을 새긴 것이겠으나

 

 

자는 무엇일까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敬以直內 義以方이란 한 글자로 드러낸 것입니다.

 

 

경으로써 마음을 곧게 하고 의로써 밖으로 드러나는 행동을 반듯하게 한다

 

 뜻이니, 그 글자를 보며 행동을 바로 잡으라는 의미입니다.

 

 

 

 

 

 

 

백운동 바윗돌 <경자>

 

 

 

 

 

 

이황은 이 바위 주변에 소나무, 잣나무, 대나무를 심고 정자를 지어 취한대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한번 보시죠.

 

 

 

 

 

 

취한대

 

 

 

 

 

 

 

당간지주 옆에 있는 경렴정(景濂亭)에 올라보는 맛도 좋습니다.

 

경렴정을 세운 사람은 주세붕인데, 경렴정은 맞은편 연화봉의 이름이 송대 성리학

 

의 비조라 할 수 있는 주렴계가 살던 염계의 연봉과 같아서 주렴계의 뜻을

 

경모하기 위해 이름을 붙인 것이랍니다.

 

 

 

 

 

 

 

 

경렴정

 

 

 

 

 

소수서원에서 배향하고 있는 안향(安珦, 12431306)은 안유(安裕)라고도

 

하는데, 고려시대 사람으로 흥주 죽계 상평리에서 태어났습니다.

 

만년에 송나라의 주자를 추모하여 그 호인 회암(晦庵)을 모방하여

 

호를 회헌(晦軒)이라고 지을 만큼 주자학에 대한 경도가 깊었답니다.

 

 

원나라에 가서 그곳 학풍을 직접 느끼고 주자서를 베껴와 우리나라에 보급하는

 

노력을 기울여 우리나라 최초의 주자학자로 불립니다.

 

그가 원나라에 가게 되었던 것은 우리나라 왕과 원나라 공주이기도 한 왕비를

 

호종하는 직책을 맡아서였습니다.

 

원나라의 지배를 받는 현실을 헤쳐나갈 새로운 사상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던

 

때 명분을 중시하면서 주지적인 주자학을 만난 안향은,

 

 

주자학이야말고 새시대를 열어가기에 합당한 사상,

 

새로운 철학이라고 여겼을 것입니다.

 

 

안향의 노력 덕분이었는지 백년여 뒤에는 마침내 주자성리학을 수양과 치세의

 

 원리로 삼은 성리학자들이 중심이 되어 새로운 왕조를 개창하고 유교를

 

통치원리로 삼았습니다.

 

 

그러므로 조선시대에 와서 안향을 받드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 하겠습니다.

 

 

 

 

 

 

 

안향영정

 

 

 

 

소수서원 주변의 더없는 풍광과 더불어 이곳이 영귀포란형’(靈龜抱卵形)

 

지세라서 이곳을 다녀가면 아들을 낳는다는 속설이 있어 결혼을 앞둔 남녀가

 

사진촬영을 하면서 소원을 빌기도 하는 곳입니다.

주세붕의 영주부석사(삼도헌의 한시산책227)

 

 

삼도헌의 한시산책 227

 

영주 부석사 전경(며칠전 사전답사를 가서 필자가 직접 촬영한 사진임)

 

 

 

 

榮州浮石寺(영주부석사)

 

周世鵬

 

 

 

                    浮石千年寺(부석천년사)는 부석사는 천년 넘은 옛 절터

                    半臨鶴背山(반임학배산)을 학배산 반쯤은 다다라있네

                    樓居雲雨上(루거운우상)이요 높은 다락 구름 위에 세워졌는데

                    鐘動斗午間(종동두오간)을 종소리는 하늘에서 치는가 보다

                    斫木分河逈(작목분하형)하고 나무를 찍어내어 물길도 트고

                    開巖鍾玉閑(개암종옥한)을 바위를 쪼개내어 물도 맑어라

                    非關眈佛宿(비관탐불숙)이요 부처님 탐탁하여 머무는 것 아니오

                    蕭濾劫忘還(소려겁망환)을 맑고도 깨끗하여 돌아가기 잊었오

 

 

                     斫:쪼갤작 :빛날 형. :맑은대쑥 소. :거를 려. :바위 암.

 

 

 

오늘은 7회 서예세상답사를 앞두고 영주 부석사를 읊은 주세붕선생의 시를 감상하기로 한다. 아래에서 이 시를 지은 주세붕에 대해 간단히 소개한다.

 

주세붕(周世鵬 1495~1554)의 본관은 상주(尙州)이고, 자는 경유(景游), 호는 신재(愼齋)이다. 중종 17((1552)에 생원시에 합격하고 이어 문과에 급제하였다. 예문관 검열이 되었다가 독서당(讀書堂)에 들어갔으며, 부제학을 역임하였다. 3년 뒤에는 헌납(獻納)으로 김안로(金安老)를 탄핵하였다.

 

주세붕이 그의 어머니의 병이 위독하자 향을 피우고 하늘에 기도한 일이 있었다. 그런데 그날 밤 꿈에 어떤 사람이 나타나 흰 실 여덟 타래를 주면서 병이 곧 나을 것이라고 했다. 그 뒤 정말 어머니의 병이 낫고 80일을 더 살다가 죽었는데, 그제야 그 여덟 타래가 80일 동안 목숨을 연장시켜 준 징조였음을 알았다.

 

 

 

주세붕

 

 

 

주세붕이 일곱 살 때에 그의 어머니가 오랫동안 병석에 있어 빗질을 못하자 자신을 머리를 감고서 기름을 바른 뒤 그의 어머니 머리카락에다 갖다 대어 이가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건너오게 하니, 주위 사람들이 모두 그의 효성을 기특하게 여겼다.

 

그 뒤 그의 아버지상을 당하여 산소 앞에 여막(廬幕)을 짓고 그곳에서 거처하였는데 3일에 한 번씩 내려와서 어머니를 뵈면서도 자기 방에는 한 차례도 들어가지 않았다. 그의 집에 개가 한 마리가 있었는데 주세붕이 출입할 때마다 따라다녔다. 그런데 주세붕이 상주가 된 뒤로는 그 개에게 고기를 주어도 먹지 않았으므로 사람들이 주세붕의 효성이 짐승까지 감동시켜 그렇다고들 여겼다.

중종 36(1541)에 풍기군수(豊基郡守)가 되어 문성공(文成公) 안유(安裕)가 살던 옛 터에다 사우(祠宇)를 지어 봄가을로 제향을 지내며 백운서원(白雲書院)이라고 불렀다.

 

백운서원은 좌우(左右)의 질서가 정연하였다. 주민들 가운데 준수한 자를 모아서 학문을 강론하며 연습하게 하였고, 곡식은 저축하고 남은 것을 가져다 학생들의 숙식 자료로 제공하였으며, 녹봉에서 얼마를 떼어 경전(經傳)과 사기(史記) 등의 서적을 구입하여 강독하는 데 대비하도록 하였다. 서원 터를 처음 닦을 때에 그 터에서 구리로 된 그릇 3백여 근()을 얻게 되어 그것을 팔아 경비로 썼다.

 

그 뒤 명종 5(1550)에 퇴계 이황(李滉)이 풍기군수로 부임하여 백성의 교화는 임금을 경유하지 않으면 뒷날 반드시 퇴폐한다는 취지로 감사(監司)에게 편지를 보내어 임금에게 보고를 드리되, ()나라 백록동 서원(白鹿洞書院) 학규(學規)에 의거하여 임금이 서원 이름을 짓고 편액(扁額)을 써주며 겸해서 전토와 노비를 내려주어 배우는 자들로 하여금 열심히 공부할 수 있게 해달라고 청원하도록 하였다.

 

 

 

주세붕 선생 글씨

 

 

 

감사 심통원(沈通源)이 그의 말대로 임금에게 보고하여 소수서원(紹修書院)이란 이름을 지어 내려주고, 대제학 신광한(申光漢)에게 서원 기문(記文)을 짓도록 명하였다. 또한 그 일로 인하여 사서(四書)와 오경(五經성리대전(性理大全)등의 책을 내려 주었으니, 사원(祠院)에 임금이 이름을 지어주고 편액을 써서 내려주는 일이 여기에서 시작되었다.

명종 5년에 대사성으로서 불교를 배척하는 소를 올리기도 하였다.

 

주세붕은 조정에서 벼슬한 30년 동안을 한결같이 가난한 선비처럼 지내며 산과 못가에서 노니는 것을 좋아하여 지금까지 경치가 좋기로 이름난 곳에는 가끔 그가 남긴 자취가 있다.

 

60세에 세상을 떠났으며, 벼슬은 호조참판에 이르렀다. 저서(著書)로는 죽계지(竹溪誌)와 무릉지(武陵誌)가 있고 합천(陜川)에 그를 제향하는 서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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