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의 기록에서 사용한 ‘단청’이란 용어는 우리나라의 기록 가운데 가장 이른 것이어서 크게 주목된다. 아울러 노송벽화를 단청으로 보완하였다는 대목에서 ‘단청’이란 용어가 단순한 문양도채의 범위를 벗어나 벽화의 개념까지 포괄하는 의미로서 쓰여졌음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의 단청과 관련된 사료는 [조선왕조실록]과 [증보문헌비고] 등에 많은 기록이 있다. 조선시대에는 극단적인 배불정책으로 인하여 사찰의 단청은 점차 줄어들었지만, 궁궐과 왕실차원의 불사단청은 여전히 지속되었다. 단청은 흔히 목조건축물에 채색으로 장식하는 것을 말하지만, 그 외에도 석조 건축물을 장엄하거나 공예품 등에 그림을 그리고 채색을 하여 장식하는 것 등을 총칭하기도 한다.
단청의 색은 청색. 적색. 황색. 백색. 흑색의 다섯 가지색을 기본으로 하고 있는데 오행사상과 관련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단청의 무늬는 한 채의 건물에도 쓰인 부재에 따라 서로 다를 정도로 그 종류가 다양하다. 무늬의 체계는 건물을 부위와 장식구성에 따라 머리초와 별지화로 나눌 수 있다. 머리초는 건물의 평방. 창방. 도리. 대들보. 서까래. 부연 등 부재의 양끝에 그리는 무늬이며, 주된 무늬는 연화. 웅련화. 파련초. 주화. 녹화 등 꽃으로 장식되고 있는데 간혹 국화. 모란꽃 등이 도안화되기도 한다. 별지화는 창방. 평방. 도리. 대들보 등 큰 부재의 양끝에 머리초를 놓고 중간 공백부분에 회화적인 수법으로 그린 장식화를 말한다. 우리나라 단청은 삼국시대 고분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고 불교의 수용과 함께 크게 발전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각종 문양의 상징과 의미
![](http://ncc.phinf.naver.net/ncc01/2012/8/6/147/1010px.jpg) 연꽃 : 우리나라 단청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문양요소로, 불교의 상징화이기도 하며, 민간신앙에서는 다산의 의미를 상징하기도 한다. 유교에서도 덕망이 높은 군자를 상징하는 꽃으로 여겨졌다. 석류문 : 석류문은 연화머리초에서 속칭 ‘석류동’이라 불린다. 이것은 석류와 항아리를 뜻하는 동(垌)자가 합쳐진 말로서, 석류 위에 항아리(사리합)가 결합된 문양을 총칭하여 부르게 된 것이다. 석류는 다산과 자손의 번영을 상징한다. 불교에서도 생명을 잉태하고 자손 번영의 의미를 상징한다. 여의두문 : 마치 소의 코와 유사하다 하여 쇠코문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린다. 민간에서는 만사형통, 도교에서는 길상, 장수를 상징하고, 불교에서는 승려의 높은 위덕(威德)을 상징하며, 나아가 보살의 지물로도 쓰이고 있는 매우 상서로운 문양이다. 녹·황실 : 머리초 핵심문양의 둘레를 감싸 돌아 장식되어, 각 문양권과 다른 문양권의 경계를 구분하는 너비 2cm이내의 색띠를 말한다. 모란 : 모란은 부귀영화를 상징하는 꽃으로서 머리초의 핵심문양으로도 이용되었으며, 당초문 형식이나 반자초의 소재로도 즐겨 사용되고 있다. 보상화문 : 보상화(寶相花)는 불교에서 숭앙되는 이상화(理想花)로서 다른 말로 ‘만다라화’라고도 한다. 불교의 장엄적 상징성을 지니고 있다. 국화 : 장수를 상징하여 일명 장수화(長壽花)라고도 불린다. 또한 난초와 더불어 군자에 비유되는 것으로 문인들에게 지극한 애호를 받아오기도 했다. 용 : 상상의 동물로서 동양에서 네 가지 신령스러운 동물, 즉 사령(四靈) 가운데 우두머리로 꼽힌다. 단청에서는 대들보, 별지화, 반자초, 불단, 닫집 등 아주 다양한 고셍 적용되는 문양으로 각광받는 소재이다. 봉황 : 상상의 새이며, 수컷을 봉(鳳), 암컷을 황(凰)이라 일컫는다. 훌륭한 임금이 정사를 맡아 천하가 태평할 때에만 봉황이 출현한다고 하여 사령의 하나로 꼽았다. 거북 : 길흉을 점칠 수 있으며, 장수를 상징하기도 한다. 건물 단청에서 거북문양은 단독으로 별지화 등에 드물게 사용되는 소재이지만, 비단 무늬의 빼놓을 수 없는 기본 요소로서 매우 다양하게 이용되고 있다. 학 : 조류의 우두머리로 ‘일품조(一品鳥)’라 일컬어진다. 장수를 상징하기도 한다. 건물 단청에서 학무늬는 구름과 어우러진 형상으로 천장의 반자초에 주로 이용되며, 간혹 벽화나 별지화의 소재로서 그려지기도 한다. 박쥐 : 어두운 생태적 특징에도 불구하고 단청문양의 소재로 즐겨 사용되는 요소이다. 경사와 행운을 나타내는 오복의 상징으로 공예, 건축분야의 장식문양으로 많이 이용되고 있다. 가릉빈가 : 가릉빈가(迦陵頻伽)는 범어로 ‘카라빈카(Kalavinka)'라고 하는 전설 속의 새이다. 설산에서 태어났다는 이 새는 자태가 매우 아름답고 소리 또한 오묘하여, 묘음조(妙音鳥), 미음조(美音鳥), 또는 옥조(玉鳥)라고도 불린다. 또한, 사는 곳이 극락정토이기 때문에 극락조라 부르기도 한다. 불교 사찰의 불전을 이상화하고 미화하기 위한 의도로서 흔히 사용된다. 단청문양으로 이용되는 가릉빈가의 모습은 인두조신(人頭鳥身)의 형태로서 묘사되는데, 대개 다리, 몸체, 날개는 새의 형상이고, 얼굴과 팔은 사람의 형상이다. 몸체는 깃털로 덮여 있으며, 머리에 새의 깃털이 달린 화관을 쓰고 있는 경우도 있으며, 악기를 들고 연주하는 자세로 표현되는 것이 보통이다. 귀면문 : 벽사 즉 사귀(邪鬼)를 물리치는 의미로서 역시 건축단청에서 즐겨 사용되는 문양이다. 주로 법당의 정면 창호 하부 궁창부에 많이 장식되며 처마 밑 보뺄목, 화반, 평방부리, 추녀부리 또는 수미단(불단) 등에 장식되는 경우도 있다. 만(卍) : 불교의 상징인 만(卍)은 범어로는 ‘스바스티카(Svastika)'라 한다. 온갖 길상과 만복이 결집된 의미로서 사용되며, 만(萬)자의 변자체로도 쓰이게 되었다. 원상 : 단청문양의 기본 요소로서 불교에서 깊은 상징의미로 표징된다. 연속되어 시작도 끝도 없는 것은 영원성을, 그리고 원에 둘러싸여 있는 내포(內包)는 전체성의 사상과 상통한다. 또한, 크기의 대소를 불문하고 그 자체로써 완전성을 지니고 있으며, 불교의 원만, 원각, 원통, 원공의 개념과 상통한다. 칠보문 : 단청에서 길상, 다복 등을 상징하거나 숭앙, 존귀하게 여기는 대상을 문양화한 것이다. 7가지 보석 즉 금, 은, 청옥, 수정, 진주, 마노, 호박을 가리킨다. 팔보문 : 진주, 능형(菱形), 경(磬), 물소뿔, 엽전, 서물(瑞物), 파초잎, 거울 등이 그것으로 진주는 정숙한 여성미, 능형은 대자연의 승리, 경은 즐거움과 기쁨, 물소뿔은 행복, 엽전은 마귀의 제압, 서물은 상서로움, 파초잎은 농촌의 부와 길상을, 거울은 그 빛이 악마를 물리쳐 흩어지게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둘레방석 : 우리나라 단청에서 각종 개판이나 계풍에 주로 장식되는 문양이다. 주의 : 기둥의 상부에 치장되는 문양이다. 금문 : 비단무늬를 일컫는 말로서, 우리나라의 단청에서 연화머리초 다음으로 많이 사용되는 문양이다.
한평생 오색으로 연화장세계를 장엄하는 홍점석 선생
![](http://ncc.phinf.naver.net/ncc01/2012/8/6/147/1010px.jpg)
중요무형문화재 제48호 단청장 홍점석 선생은 1939년 9월 일본 히로시마에서 부친 홍수만 선생과 모친 이학녀 여사 사이에 2남 3녀 중 넷째로 태어났다. 부친이 일제 강점기 때 돈을 벌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가 선생을 낳고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투하되자 경남 산청에 터를 잡은 것이 선생의 나이 일곱 살 때였다. 형(홍윤식 동국대 명예교수)과 함께 지리산을 쏘다니며 사시사철 변화하는 자연의 색감을 몸으로 익혔다.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정취암과 율곡사 등을 다니며 절집의 분위기를 익히기도 했으며 이때 처음으로 단청과 탱화 등 불교미술을 접할 수 있었다.
어려서부터 타고난 미적 소양을 바탕으로 곧잘 그림을 그리고 했던 홍점석 선생은 집 근처 사찰을 자주 찾았는데, 그때부터 이미 단청에 호기심을 갖기 시작한 것이다. 6.25 전쟁 이후 산청의 배양중학교를 졸업하고 1959년 홀로 상경했다. 당시는 4.19 혁명이 일어나기 직전 자유당 정권의 말기적 혼란상태가 극에 달했던 시기로, 서울에서 학교 선생을 하고 있던 형의 월급으로 두 사람의 하숙비조차 낼 형편이 안 되었다. 그래서 선생은 정신수양도 하고 어릴 적 인상 깊게 보았던 사찰의 단청도 감상할 겸 찾게 된 곳이 바로 서울 종로구 조계사였다.
절에 무작정 찾아가 온갖 궂은 일을 도맡아 하면서 부처님과 인연을 맺게 되니 끼니 걱정도 덜고, 막연히 관심이 있었던 법당의 불화, 불상, 단청 등을 항상 가까이 접할 수 있게 되었고 이것은 인생의 큰 전환점이 되었다. 이후 서울 성북구 개운사에 들렀다가 그곳에서 불사를 맡아 하던 화공인 김한수 선생을 만나 단청의 길에 접어 들게 되었다. 이후 첫 스승인 김한수 선생의 권유로 월주선사를 두 번째 스승으로 모시게 되었고 정식으로 불화수업을 시작하였다. 단청에 특히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였던 선생은 1972년 스승 월주선사를 중심으로 당시 조계종 총무원장 월산스님의 지원을 받아 우리나라 단청문양의 연구보존을 목적으로 단청문양보존연구회를 발족하기에 이른다. 이후로 최근에 이르기까지 한국단청문양의 발췌와 보존연구를 위하여 열과 성을 아끼지 않았다.
1996년 동국대학교 문화예술대학 불교미술학과에 진학하여 만학의 열정을 사른 끝에, 이론과 실기를 겸비한 명장으로 거듭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1992년 월주선사 덕문스님이 입적하자 스승의 대를 이어 1997년 중요무형문화재 제48호 단청장으로 인정되었다. 설악산 봉정암을 비롯해 서울 도선사, 김제 금산사, 일본 보현사, 미국 하와이 대원사 등 160여개 사찰 600여 채 단청불사를 했다. 65세 되던 해 지리산 대원사를 마지막으로 현장에서 직접 붓을 드는 일은 거의 없다. 다만 현장 감독을 하며 제자들에게 이것저것 조언을 해 준다. 홍점석 선생은 스승으로부터 이어받은 단청장의 기예와 정신적 수양의 경지를 통해 후진양성에 여력을 다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