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합시다!
나는 이 인생 미지수X에 대해서 종교나 철학 등을 초월하여 누구나 알기쉽고 최대한 직설적으로 풀어가도록 노력하겠다. 가능한 직설적이고 간결할수록 더 좋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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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와 비교할 때 사람은 너무나 미미하다. 그래서 창해일속(滄海之一粟:바닷속의 모래알:Dust in the wind)이라 한다. 그러나 그 모래알 속에 또 우주가 들어있다고 한다. 과학자들에 따르면 우리의 몸에 세포의 수가 10(13승)개 정도 들어있다고 한다. 물론 사람에 따라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그리고 그 세포마다 10(13승)개 정도의 원자를 포함하고 있다고 한다. 원자 하나에 비교할 때 인간은 무한이다. 우리가 사는 지구가 속한 은하계의 별(위성, 항성 등)의 수가 10(13승)개라 한다. 그리고 우주에는 우리가 속한 은하계정도의 수가 10(13승)개 정도 있다고 한다. 우주 역시 無限이다. 그래서 이 닮은꼴의 인간을 小宇宙라고도 한다. 눈에 보여지는 작은 몸뚱아리의 인간으로써가 아니라... 그래서 인간은 틀에 갇히지 않고 無限으로 나아가야한다. 나(我)를 우선시하면 모래알에 갇히는 것이고, 나를 제외한 모든 것을 우선시하면 바로 우주(無限)가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종교의 궁극도, 바로 그게 인생 미지수X의 답이다. 또 내가 생각하고 행하는 하나하나로 인하여 세상, 우주에 미치는 영향만큼 나의 몸속 마음속에서도 똑같이 일어난다고 여겼다. 좀 심한 비약일지 모르지만 암같은 불치의 병도 그런 식으로.
주역(周易)은 ‘변화와 생성의 우주 섭리’를 간단한 기호(象)로써 잘 나타내고 있다. 無(道)에서 하나(一)로, 하나에서 음양으로, 음양에서 64괘로 퍼져나간다. 無에 있어서 완전한 無가 있고 혼동의 無가 있다고 한다. 하나에도 움직이지 않는 하나(太極)가 있고 움직이기 시작하는 하나(乾元)가 있다고 한다. 중국 원고(遠古)시대 복희씨가 8괘를, 그리고 3500여년 후 주나라 문왕이 8괘를 중첩하여 64괘를 만들었고, 또 약500년 후에 공자가 점서(占筮)로써가 아니라 순수철학적 관점으로 64괘상(卦象)과 괘효사(하나의 괘에 있는 6개의 효를 각각 하나씩 풀이함)의 문자를 해설하였다. 이것은 팽창(Inflation)하는 우주의 변화를 잘 나타내고 있다하겠다. 지구가 속한 은하계가 빅뱅이후 150억년여가 지났지만 계속 팽창하고 있는 것과 같다. 복희왕 시대는 지금으로부터 약 7000년 전으로 씨족사회 정도였으니 단순하였을 것이고, 문왕과 공자의 시대는 점점 팽창된 복잡한 시대였다. 그래서 인구가 팽창하는 만큼 괘효도 8괘에서 384효로 팽창 세분화되었다. 이렇게 원래 우주 본연의 無에서 하나로 384효사로 팽창해 나가는 것을 형이하학, 즉 현실화라 할 수있다. 위편삼절(韋編三絶)이란 말과 같이 말년에 주역에 빠진 공자께서 형이하학을 주로 설명을 했다. 이와 반대로 세분화된 현실에서 하나(太極)를 거쳐 무위자연(無爲自然)으로 회귀(올라감)하는 것을 형이상학, 즉 道라고 한다. 이것이 블랙홀을 통하여 無(太極)가 되는 것과 같은 이론이다. 老子께서 무위자연(형이상학)을 주로 노래했다고 한다. 우주의 모든 것들이 이렇게 내세지향(上學)과 현실지향(下學)으로 원도주류(圓道周流)를 하고있다. 거기에는 큰 원들이 있고, 작은 원들도 무수히 다양하게 얽혀있다고 한다. 너무 간단한 기호로써 해석에 다변성과 어려움이 있으나 우주의 모든 것을 아우르고 있다. 고회민 박사와 정병석 교수의 깊이있는 해설과 번역에 감사를 드린다.
현실적으로 두각을 나타내는 개인이나 집단들보다도 오히려 소외되고 있는 비현실적인 자들이 道을 갖춘 자들이라고 생각한다. 물질과 현실을 우습게 과감히 버릴 줄 아는 것을 道라고 하기에. 즉 道心이 强하기에 비현실적일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인도의 철학자들을 그런 사람들이라 생각했다. 인도에는 이름 모르는 그러한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인도의 가르침에는 周易 못지않은 무한함과 혜안을 가져다준다. 기호가 아니라 시(詩)적으로. 어린아이의 순수함으로. 또 논리적으로 따지거나 하지않는다. 인도 가르침에서는 아낌없이 주는 따뜻한 마음과 사랑을 느낄 수 있다. 그래서 인도를 슬프도록 좋아한 적도 있다. 또 종교와 철학이 분리되어 있는 듯하지만 같이 깊게 녹아있다. 그 역사가 깊다보니 많은 국민들이 철학자의 면모를 지녔다. 최근에는 현실적인 지식인들을 비롯한 국민들의 노력으로 중국과 함께 세계의 강국이 되었음에 기쁨과 부러움을 느낀다.
<무(無) - 3>
우리의 영혼은 과연 영혼불멸 할까?
힌두교에서는 하루살이와 같은 저급한 형태에서 인간으로 환생하기 위해서는 840만 번의 윤회를 거쳐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면 지금 나(我)의 영혼은 누구의 영혼일까?
우리의 육체는 물을 비롯한 여러 원소들로 조합되어져있다. 육체는 죽으면 없어진다. 그러나 눈에 보이지 않는 영혼은 구성요소를 상상할 수 없으니 不滅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느낄수 있다. 그러나 물체가 에너지로 에너지가 물체로도 변한다. 질량 불변의 법칙에서 이미 배웠다. 에너지의 일종인 영혼도 변한다(분리되고 변하고 다시 조합된다). 그것은 간단한 임사체험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체험했던 바이다. 정수리를 통하여 영혼이 빠져나가려고 하는 순간 이미 현세의 자기자신과 지인들을 알아보지 못했다. 완전히 저 세상으로 넘어가기도 훨씬 전 바르도 기간에 들어서는 순간 정도인데... 그래서 최면 중이던, 임사체험 중이던, 현재의 나(我)와 관련된 약간의 의식이라도 있다는 것은 아직 이생의 목숨이 살아있다는 것이다. 나(我)의 영혼이 없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바르도 기간에 돌입해서도 나(我)와 연관된 기억, 의식이 있는 부분은 현세요, 나(我)와 연관되지 않거나 암흑 등 기억, 의식이 없는 부분은 현세가 아니다. 결국 영혼도 이생의 범주를 벗어나거나 죽을 때 육체와 똑 같이 분리되고 변한다. 여러 가지로 다양하게. 현세에서 살아왔던 언행, 습관, 믿음(카르마(業))에 따라서. 그래서 '죽는다'라는 상업적이고 어두운 단어보다 보편적인 '변한다'라는 단어를 사용하자고 주창하고 있다.
결국 인간은 한평생을 살면서 나(我)속에 갇히거나 집단 등 어느 테두리속에 갇혀서 살아간다. 육체든 영혼이든 각각의 어떠한 요소들이 잠시 조합되어져 있는 것을 모르는 체. 그런데 여기에다 고집을 많이 불어넣으면 안된다. 조합된 나(我)속에 갇혀서 이기심 시기심 질투심 등 속에서 살아가게 된다. 변화하는 시행착오 과정속의 한 집착에 불과한 것이다. 집단은 더욱 그 파장이 크다. 현실에 살면서 善意의 어느정도의 소속감은 좋은데, 그 어느정도를 파악하기가 힘들다. 영혼 불멸 사상도 나(我)에 대한 집착이다. 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영혼장사꾼들에 젖어있었다. 우리는 현재의 기성종교가 원시종교와 달리 모든 면에서 상당히 검증이된 것으로 여기고 있으나, 오히려 더 집단의 고집과 어둠에 빠져있는 것일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생의 나(我)라는 테두리속의 영혼이 來世에서도 영원히 계속되기를 많은 사람들이 바라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우주이다. 일시적인 조합물인 작은 나(我)에 고착되어서는 안된다. 이미 과학에서 물체가 에너지로 에너지가 물체로 변한다고 했고 周易도 두루두루 변한다는 것을 설명하고있다. 결국 영혼과 육체, 모든 것은 분해된 후 재생성된다. 우리를 포함한 모든 것은 우주이기에. 문제는 재생성되는 과정이다. 나(我), 집단이라는 테두리(범주, 한계)를 벗어나 무한이 되어야한다. 그래야 비로소 순수한 한 바퀴의 원도주류(圓道周流)가 되어 남들(우주)과 同和될 수 있는 것이다.
여러 다양한 영혼의 재생성 중 최고는 대자연, 즉 우주 그 자체가 되는 것이다. 그러면 죽어도 죽는 것이 아니고 영원하기 때문이다. 방법은 이생을 살아갈 때 나 외에 모든 것을 나 이상으로 생각하여 혼을 바쳐 사랑하며 나(我)라는 한계를 벗어나는 것이다. 심지어 나를 괴롭힌 자나 원수까지도, 또 동물, 식물, 광물 등 모든 것을 나와 다른 것으로 여기지 말고 동일한 하나로 생각하며 혼을 바쳐 사랑하면, 죽어서도 자신의 영(靈)과 기(氣)는 그 모든 것들에 박혀서 우주 그 자체에 동화된다는 것이다. 자신의 혼을 바쳐서 들풀을 보고 싱그러움을 감사하며 사랑하고, 하늘의 별을 보며 사랑하고, 심지어 똥을 보면서도 천연 자원이나 자신의 것, 아니 자신으로 여기며 감사하며 사랑하라. 그러면 자신이 죽은 뒤 자신의 육체는 물론 영혼도 우주 곳곳에 자신이 혼을 바쳐 사랑하던 것들이 되어서 영원히 빛날 것이다. 단순한 포기가 아니라 태초의 원상태로 돌아가야 하는 궁극의 어려운 수행이다. 우주의 원상태(無)로 돌아가는 것, 그것이 바로 해탈이요, 하느님의 품이요, 상제님의 마음속인 것이다.
각 종교와 철학의 궁극은 바로 이것이다. 현세에 일시적으로 조합된 나(我)의 영혼과 육체, 그리고 집단에 빠져 고집을 계속 불리면 안된다. 이렇게 모든 종교도 궁극적으로 무한의 대자연, 우주가 되고자 노래를 했던 것이다. 그런데 숲은 보지 못하고 가지만을 보듯이, 중간에서 전달 역할을 하는 종교집단들이 오히려 집단에 빠져 사람들의 눈과 귀를 멀게 하는 것 같다. 우선 먹는 사탕이 달다고 ‘얄팍한 행복’에 무게를 더 놓는 집단의 아집은 안된다. 오른 뺨을 맞으면 왼뺨을 내놓아야한다. 서로 자신들의 집단에 갇힐수록 서로가 비정상이고 서로가 이단으로 보일 뿐이지 않는가. 무한의 우주로 보면 갇힘과 경계가 어디있고 틀린게 어디있나. 모두가 다 맞고 모두가 다 같다. 나(我)가 모두요, 모두가 무 무한이 될 수 있고, 무<한>이 정답인 것이다. 나는 여기까지 깨우침을 얻는데 42년이 소요되었다. 논리보다는 어린아이의 순수함으로.
그러나 여기서 사람들이 대부분 오해를 하기쉽다. “혼을 바쳐 모든 것을 사랑만 하면 곧 우주가 된다. 나도 그럴 수 있고 누구나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이게 인생 미지수 X의 정답’이라고. 그러나 이때 가장 조심해야하는 것은 “나(我)는 없다(無=宇宙).”는 것을 여기고 그렇게 수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A라는 사람이 A자신의 영생을 위해 혼을 바쳐 사랑해서 이생의 A는 죽어도, 또다시 수많은 A의 혼으로 우주 곳곳에 박혀 영생할 수 있는 것으로 착각하기 쉽다. 이것은 마치 A가 A를 버린 것처럼 보일지 모르나 더 많은 A의 영혼 욕심이 남아있다. A라는 때가 묻은 영혼은 그 때(카르마)의 무게 때문에 절대로 우주 곳곳에 박힐 수가 없다. A라는 사람이 혼을 불태워(엄청난 노력으로) 모든 것을 사랑할 때, 즉 A자신은 無(없는 것=우주)상태 임을 인식하며 모든 것을 사랑하고 수행할 때만이 우주 그 자체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영혼(불멸)에 대한 일말의 욕심마저 모두 버려야 우주가 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무위자연(無爲自然)이다. 우주는 테두리(집단)가 없는 無限이므로... 그때가 진정 천당이요 극락인 것이다. 여기까지 또 10년이 걸렸다. 지식과 논리로써가 아니라 순수한 아이의 마음으로. 그러나 이 모든 것을 버리는 데 또 얼마나 많은 세월이 걸릴지...
<現 實 - 결 론>
결국 세상에 이미 모든 답이 다나와 있었다.
사후세계는,
- 원래 나(我=宇宙=無=하나(님))는 無라는 것을 알고 현세의 온 몸과 마음을 바치며 원래 하나이자 無인 모든 것(하나=宇宙=無)을 사랑하면, 죽어서도 자신의 靈과 氣가 다차원의 우주 곳곳에 스며들어 다시 우주 그 자체로 된다고 생각하고 실천하면 그렇게 우주가 된다.
- 우주(대자연)를 하느님, 부처님, 상제님 등으로 상징화하여 잘 믿느냐에 따라 천국과 지옥이 있다고 믿고 행하면 그렇게 천국과 지옥이 있다.
- 바르도를 통하여 사후세계에 여러 등급으로 다시 태어난다고 믿고 행하면 그렇게 환생된다.
- 업보 이론과 귀신이 있다고 믿고 행하는 사람은 귀신이 있고 업보도 있다.
- 현 세상이 전부라고 생각하며 사는 사람은 현 세상이 전부이다.
이와같이 우리의 사후세계는 여러층이 있다. 원도주류하는 원에는 큰 원도 있고 작은 원들이 있듯이 위 여러층들이 구분되어 있는 것이 아니고, 또 함께 한다는 것이다. 자신이 위 해당층을 믿으며 행하면 결국 그렇게 된다는 것일 뿐. 물론 윗 층으로 올라갈수록 나(我)에대한 집착이 점차 없어져야하고 용서와 포용력 사랑 능력이 커야함은 당연하다. 그게 가장 아름답고 궁극의 유토피아니까. 진정한 탈아(脫我)요 無限을 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내가 평생 알고싶어 했던 인생 미지수X에 대한 정답(철학)이다. 왠 뚱딴지 같은 소리냐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급하고 짧지만 직설적인 이 개똥철학이 가슴에 와닿는 순간, 세상에 널리 퍼져있는 모든 종교와 철학은 쉽게 이해될 것이다. 이 단순한 깨우침 속에 모든 것들이 들어있다.
여태까지 來世指向을 위주로 이야기했다면, 이제 현실을 잘 사는데 대해 이야기해보자. 이 분야는 내가 가장 싫어해왔고 문외한의 위치에 있다. 그러나 어쩌면 더 객관적일 수도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에서 마치 모든 것을 내세지향과 현실지향으로 2구분 하자는 것은 아니다. 사실 이미 현실도 다 포함되어 설명이 되어있다. 현실주의, 특히 팽창을 근원(根源)으로하는 자본주의에 더 치우쳐 설명해보자는 것이다. 내세지향의 무<한>을 강조하다보니 마치 현실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사는 것이 좋은 것 같은 착각에 빠질 수도 있다. 자칫 천사병에 들거나 허송 생활을 하기에 딱 알맞다. 어쩌면 나같은 부류가 겉으로 착하고 선한듯 보일지 모르나, 현실적으로 편하고 놀기를 좋아하고 자신에게 엄격하거나 독하지 못해왔던 것 같다. 그렇다고 돈의 노예가 되라는 것도 아니다. 현세의 돈(물질)만을 목적으로 한다면 독하고 약삭빠른 것이 최고일 게다. 그런 1차원적인 얘기를 하자는 것도 아니다. 현세와 내세는 동전의 양면과 같이 앞뒤 서로 연관되어 원도주류하고 있다. 현실세상 없는 영혼세계가 있을 수 없고, 현실세상을 잘 사느냐에 따라 영혼세계의 결과도 틀려진다. 현실 생활 속에 이미 대자연, 우주와 철학, 천당과 지옥 등이 다 들어있다는 것이다. 작은 모래알 속에 우주가 들어있다고 했으니. 결국 양심을 근본으로 하여 끊임없이 땀 흘리고 노력하며 현실을 살아야한다.
현실세계와 영혼세계는 서로 요철(凹凸)과 같이 상호보완적으로 반드시 모든 것이 반대로 되는 것일까? 현실세계는 영혼세계보다 시간적인 측면에서는 느릴 것이고 공간적인 측면에서는 좁을 것이고 능력적인 측면에서는 보이는 것 들리는 것 정도일 게다. 현실세계에서의 없음이란 것도 본래의 無가 아니라 일상적인 無이다. 변화의 측면에서도 훨씬 다양하지 못할 것이고... 현실세계를 살아가는 데있어 자기(我)에게만 빠져 자기(我)만 채우려는 좁고 느린 삶이 마치 성공적이고 행복한 것처럼 보여도, 정신은 넓고 빠르게 모두를 다양하게 섭렵하면서(원도주류) 살아가고 육체는 현실에 발맞추어 땀흘리며 살아가는 게 진정한 삶일 것이다.
한 예로 사회를 이루며 살아갈 수 밖에 없는 현실세계에서 원도주류를 하며 현실 삶의 대가였던 공자께서는 "仁"을 강조했다. 학창시절에 '仁義禮智信'이라 중얼거리며 쉽게여겼던 어질 仁도 제대로 행하려면 상대에 대한 지극한 이해와 배려가 있을때 가능하다.
이와같이 현실의 모든 면에서 끊임없이 시지프스 산의 꼭대기에 근접하도록 바위를 올리며 끈기있게 살아가야 한다, 평생을 하루같이. 그러나 현실쪽으로든 영혼쪽이든 지나치게 과하면 안된다는 것이다, 과하면 그 꼭대기에 머무르지 못할 것이기에. 현실세계와 영혼세계에 모두가 잘 사는 쉬운 방법은 서로 감사하고 용서하고 사랑하며 사는 것이라 생각한다.
또, 현세에서는 개인도 중요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집단’이나 ‘사회체계’가 더욱 중요하다. 지금 세계는 사상 최악의 人災와 天災를 맞고 있다. 역사적으로 숱하게 보아왔듯이 ‘집단’이나 ‘사회(체계)’가 잘 하느냐에 따라서 수천수만의 개인들이 좌우될 수도 희생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안주삼아 자주 씹는 한국이라는 사회를 보자. 한국이란 집단으로 벽을 쌓으려는 것이 아니라 세계적 체제상 부득이해서다. 당파심이 많다고 한다. 특히 과거 조선시대에는 그런 식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고 나라가 망했다. 그런데 작금의 상황을 보자. 집단으로 찢어졌고 그 속에서도 니편 내편을 가른다. 또다시 선량한 많은 시민들이 피해를 당하지 않을까 걱정이다. 정치 지도자들은 더욱 道德心이 있어야한다. “소수의 지도자들이 편하면 다수의 시민들이 괴롭고, 소수의 지도자들이 괴로우면 다수의 시민들이 편하다.”하지 않는가. 그렇게 道德이 충만되어야할 자들이 갈래갈래 찢는 데 앞장서고 있다. 그런데 그들은 서로 헐뜯고 싸우면서도 별로 걱정이 없는 듯하다. 기업가들이나 시민들은 자신들 주변의 책임을 지고 자살까지 한다. 진정으로 국가와 국민을 걱정하는 자들은 시민들인 것같다. 또 왜 굳이 政黨을 가르는지 이해가 안된다. 현재 우리의 당파병의 근원은 ‘지역감정질환’이다. 상당히 심각하다. 작금의 모든 문제는 지역감정에서 유발된다고 하겠다. 따지고보면 지역감정은 너무 하찮고 무가치하다. 시민들도 공공연히 “외부세력이나 김정일이 나라를 망치는 것이 아니라, 지역감정이 나라를 망칠 것이다.”고들 한다. 그나마 시민들이 걱정을 하지, 정치 관련 지도층들은 꿈쩍도 안한다. 동인, 서인이 동인 서인 남인 북인 그 이상으로 갈라지고 있어도. 그들은 '표'만 있으면 되기에. 지역감정질환의 원인은 오로지 삶의 목적을 ‘표’에다 두는 정치인들과 떨거지들 때문이다. ‘표’를 위하여 지역 등으로 찢으며 고객(표)들(?)의 경쟁심을 불러일으켜야 흥행이 잘되기 때문이다. 또 그럴수록 자기네들은 야음을 틈타 더 탄탄대로를 달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경쟁심이 도를 넘어선지 오래다. 그런데 요즘 포퓰리즘적 선거는 왜 그리도 많은지. 선거 때마다 마음이 우울하고 조마조마하다. 그러다 보니 국민들 대다수가 정신질환에 걸려있다. 과거만 해도 각 지역에서 고등학교를 마칠 때까지는 지역감정을 몰랐는데, 요즘 빠른 아이들은 중학생 그 이하도 지역병 정신질환에 걸려있다. 상당히 심각하다. 지역감정의 과도기 세대로서 왜 이렇게까지 심해지냐고 연구(?)도 자주 해봤다. 일부 비열한 이웃나라가 우리의 지역분열을 침투.조장해오고 있다고 의심한 적도 있다. 아무리 연구(?)해봐도 근본적인 원인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지도층이라 자처하는 정치집단 때문이다. 그런데도 정치인을 비롯하여 그들을 뒤쫓는 법률가, 교수, 종교인, 언론방송인, 선생, 연예인, 노조지도자 등 지도층들은 더욱 지역감정을 부채질만하고 있지 진정한 책임을 지는 자들을 본적은 없는 것같다. “니 탓이다!”를 외치며... 이 나라가 소수의 지도층들만 즐기고 가는 일회용이 아니다. 그런데도 꼭 똥인지 된장인지 찍어 먹어본 뒤에야 알아차리겠는가?
물론 정당을 가르는 것이 정치적으로는 장단점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앞서 강조해온 바와 같이 우리사회에 이 지역병의 문제점보다 더 크고 우선적인 것은 없다. 모두들 부인하고 싶겠지만, 현재 우리의 모든 분쟁은 이 지역병 질환에서 파생되어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학연 등에도 이미 지역병과 연계 파생되어지고 있다. 특히 개인이나 집단 이기주의로 근시안적인 시기, 질투, 반목 등 내홍의 결과로 나라와 수많은 국민을 잃는 불상사를 더 당할까 봐 걱정이다. 스포츠 등에서도 연고지 제도를 없애야 한다. 한계가 없는 것이 포용력이 가장 크다. 최대다수(모두)의 최대행복, 아주 힘들지만 겪어나가야 하는 현실이다. 여기서 개인이나 집단의 쾌락이나 영광만을 쫓아서는 더욱 안된다. 현실에서의 수행. 실천은 결국 현세와 내세를 모두 포함하는 것이니까. 물론 이 세상에서 완벽한 것은 없겠지만, 개인과 집단 이기주의에 빠져서는 안된다는 마음자세가 우리에게 최고의 약이 될 것이다. 나(我)가 어디있고, 우리 당이 어디있나! 여하튼 다시 법 제정을 하던지 해서 모두의 자연적인 화합을 위하여 과감히 재정비되기를 바란다. 그러기 위해서는 약속을 올바르게 잘 만들어야 하고, 그 약속을 잘 지켜야하고, 책임도 반드시 져야하는 사회가 되어야한다. 특히 지도층들이. 그래야 최소한의 신뢰가 생기고 모두가 함께 행복으로 나아갈 수 있는 초석이 되지 않겠는가. 우주에서 최고의 에너지는 화석연료나 원자력도 태양력도 아니고 정신력이다. 그 정신력을 잘 베풀고 잘 융화시켜야 한다. 인간과 우주는 나와 내가 속한 집단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생성과 분산과 변형을 하는 우리 모두의 무한의 에너지의 집합체이다. (끝)
p.s.: 이 글에서 특정 집단이나 부류를 매도하려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그러한 욕심의 마음을 꾸짖고자 하는 것이다. 특히, 종교 정치 집단을 포함한 집단주의와 집단이기심을... (지자 글)
중화의 논리로 국민이 잘못을 하면 반드시 댓가을 받는다는 근본사상은 내재되어 말 잘든고 알아서 스스로 조율하는 바탕이 있다면 통치 행위에도 좋을것입니다. 역기능은 도가적인 기질로보아 다루기 어려운 쪽으로 생각하면 현실 정치의 어려움이 있을것입니다.
과거의 사회의 부정적인 인식이 아직까지 변화가 없어 인문학의 바탕이 미약한 가운데 서양권을 능가 하기란 어려운일이 아닌가합니다.
시대의 변화는 급속한데 반하여 인식의 변화는 느린것이 정보의 발달로 신속 정확히 전달하는 체계에서는 이 것이 더욱 필요한것입니다.
왜야하면 역기능이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즉 교통과 정보 전달이 근1년이 흘려야 중앙과 지방 하명되던시대에서는 괴소문들이 체제을 유지하는 가장 무서운 적이였는데 현재는 역과 명리가 사람의 인문적인 기본 생각에 자양분의 역활은 할지라도 큰틀의 변화을 주도하는 역활은 없기때문입니다.
인문학의 상상력을 바탕으로 창작하는것이 역과명리(마추기 제외)이기 때문에
위의 모순을 바로잡는 근본이 될수있을 것으로 생각해보았습니다.이것이 가능할려면 우선 이런 관련된분들의 변화을 우선으로 하지않고서는 불가능한일입니다.
관련 있는분들은 독자적인 학문으로서의 사명감과 단편적인 기능을 버려야 합니다.
포괄적인 기능에 필요한요소로 작용하게 생각을 해야지
학문의 부수적인 요소로 구색되어져서는 안되게 해야합니다.
기존 기득권적인 모습을 버리고 대의적인 모습으로 바뀌지 않고서는 고정관념과 불학실한 틀에서 벗어날 수없는것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채근담에 글자을 모르고 계율을 수행하지않아도 시의을가지고 선미을 가진자는 시의 참맛도느끼고 선의 현묘하을 깨닫는다.는말이
즉 추상적인 관념을 글로 표현하기위해 주역,중용,성리학의이기 관점이 수만은 도구의 일 부분이라는 의미로 생각해 보는것도
앞으로 무한한 가능성을 여는것이 아닐까 봅니다.
한편으로는 성현 선학의 너무너무 거룩히고 신격하하여 그 틀에서 체바퀴 도는것은 아닌가? 생각도 해봅니다.
왜야하면 이것이 추앙되고 중요시 되면 상상적인 창의성이 제한을 받는것이 자명하기 때문입니다.
극단적이고 비약적인 예가 될런지 몰라도
애꾸눈을 가진 원숭이가 사는 섬에서 살려면 멀쩡한 자신의 눈을 꼬챙이로 한 눈을 없에야 하는것 처럼 말입니다.
이런 말들이 지혜의 단초가되어 발전 할 수있었으면 하여 감히 제안 드립니다.
감사합니다.
그러나 바뀌고 안 바꾸고는 중요하지않습니다.
이것은 태초부터 존재했으며 앞으로도 없어지지 않고 생활 속에서 물과 공기처럼 함께 하고
좋아도 나빠도 지구가 우주에 사라져도 음양 오행의 작용이 아니겠습니까?
인간들이 이런 단어 외에 그들만의 오만단어을 써서 짜고 고스돕을 치더라도
이 범주에서는 절대 벗어나기 어려울것입니다.
이것은 장자의 황당한 우화 보다 더 황당하지만 당연한 사실인 것입니다.
여기서 한가지 첨언 드릴것은
집단을 나무라지만 구체적인 대안이 없어 보여 한가지 말 씀드리고자 합니다.
물리학이 과학의 기초가 되듯,또한 역과 명리가 인문과학의 기초로서 자리을 잡는것이
위의 문제을 해결하는 지름길로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