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목으로 불소시게를 작은 쓰임으로 만들어]-내가 만든것
나이테의 아름다음 무엇에 쓸까? 방귀을 끼어도 쉬원하게 끼겠네
쓰고 싶은대로
기존 조형물이 폭탄맞은 듯 불구을 수선하여 쓰는분의 용도에 맞추면 붓걸이 화분대할까?
열쇄 고리들
이것이 무엇인고 이래 부분이 왜 솟았능가?
종류별로 셋이나 벌리고 있는데 안스고 배기능가?
결론은 꼽고 싶다는 것인데
따뜻한 마음이 꼽혀 있으니 대리만족이라도 해야지
내 마음의 심정과도 닮은데가 있네
진정 자신과 맞는 구멍은 둘째 작품에 있는데
그림에 떡인 것은 무었하리오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우편함이랑게
바둑판은 아부지가 만든 것.
광부일을 그만두고 쌀 장사을 할까 하고 고향에서 강원도을 드나들며
태백산 피나무로 만든 유일한 소품이다.
결국은 영주서 편지 배달을 하였다.
무학이지만 바둑은 향리에서 대적할 분이 드물었고
한학에 능통하지 않았지만 할배 돌아 가실 때 지극정성에 하늘도 감동시키지 않았는가 생각한다.
주디로만 떠드는 나 자신이 부끄럽다.
후세로는 교수 법조인 사업가 기술사등 나같은 놈이 있다.
바둑판처럼 살다간 아부지가 그립다.
좌우 부분에 양손으로 쓰면 편리하여 써보니 한 손으로 쓴것 처럼 구분이 점점 사라지네
2012년 겨울
머리털 나고 가장춥다고 뉴스에나온다.
개는 벌판에서 이 추위을 견디는 것이 신기하여
동물들의 겨울나기을 살펴보니 과학이 발달함에도 알 수 없는 것이 많다.
이 추운 날씨에 군디을 까고 볼일을 보아도 추운줄 모르고 오히려 쉬원했으니
사연이야 우짜됐던 몇 번 하니
추위 견디는 개나 내나 같음을 느끼고 신기함이 사라졌다.
여기에는 많은 사색의 울림이 있다.
혹 단편적인 문구에 집착한 나머지 자신의 생각을 묶어 버리지는 않을까 첨언한다.
내가 만든것에서 나무 자체의 성질이 주는 이면을 보고
작품에서 생할에 호흡하는 생동감을 찾아
자신과 예술 학문등이 나와의 별게의 세상이 아니라
잘하고 못하고를 떠나서 아무리 몽매 하도라도 생활에서
알게 모르게 같이 하는되도 못느끼는 것이 두려울뿐이다.
우편함의 창의성에서
정보의 홍수 속에서 초 중 장년의 정보량(꼿는 크기)을 어떻게 쓰는것이 바람직한가?
사람이 살아가는데 원초적인 성과 정보의 쓰임이 어떤 영향을 갖는가?
를 생각하면 흥미로운 소재가 아닐까?
여기서 강렬하게 뻣덕슨것이 이 작품에 포인트인데
시사하는 바는 있지만 쓸수 없는것이 아쉬움을 하는것이
저가 잡동사니을 돈과는 거리가 멀지만 즐기는것이 이와 유사하지만
이것이 작품에 중심이듯 나 자신또한 세상에 중심일 수있다고
뒤 늦게 알려 주는것 같아
의도한 가운데 만든 물건은 아니지만
나 자신에 또한 감사한다.
주역의 괘사를 주공이 만들때
의도적으로 저술하지 않았겠지만
때의 흐름을 자연스럽게 따라간것 처럼.
열쇄의 가정성
누구나 흔하게 한 두게 씩 가지고 있는데
급격한 순간 환경 변화로 단절된 패쇠 공간에서 살아가는 방법을 하나 둘 생각해 보다보면
자신의 무한한 꿈을 가질 수 있지 않을까?
나이테는 고목이라 중간이 비었다.
앉을 수있게 손질해서 간이 의자의쓰임이다.
나이테는 확산하는 문양을 하고
중간에 비어 있는 모양이 방구을 끼어도 자신이 잘 못는끼는 것과 흡사하지않는가?
사람이 자신 얼굴을 도구 없이볼 수없는것.
소식이 자신인데 쓸모을 못느껴도 받는분들의 소문은 엄청난 확산력이 있지않는가?
이것 뿐이겠는가? 여러분들의 상상의 날개는 어떻게 펼치겠는가?
저의 한계에 도움을 주었으면 한다.
모든 예술류들은 쓰임과 미의 향연인데 그 중에 쓰임을 읽어 버린 미는 아무리 빼어난 미적 감각을 가져도 가치가 있겠는가?
대선 전에 포퍼먼스 한것인데 그냥 있는것 보다 쓰임을 하는 소품 걸이로 변신했다.
일 끝나고도 쓰임을 다하는 작품이 승자도 후일 이런 쓰임으로 사랑 받을 수있는 것이니
살림 살이를 어떻게 해야하는지 알려 주는것 같지않는가?
나는 너가 하찮은 사람의 손에 의해 만들어져 무언의 의미을 전달하는것이
향기 없는 플라스틱 꽃처럼 빼어난 미적 가치을 가지고도
쓸모을 잃어버린것 보다 더 아름답고대견 스럽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