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엣세이

충신들

土談 2012. 7. 5. 18:31

곽자의 / 唐


중국 당 왕조 말기에 활약했던 장군. 당시 당은 농민들의 봉기 소작농의 몰락, 부패한 관료제, 페르시아에서 쏟아져 들어오던 수출품으로 생겨난 심각한 무역 적자, 그리고 강성한 유목 민족들의 계속되는 침략으로 망해가고 있었다. 본래 중견급 무관이었던 곽자의는 평화로운 시절이었다면 얻을 수 없었을 군권을 계속되는 외침 덕분에 손에 넣었다. 당시 중국의 절도사(군단 급 사령관)들은 대부분 독자적인 권력을 행사했지만 곽자의는 충성심을 유지했다. 이후 북방의 유목 전사들을 상대로 거둔 군공을 인정받아 746년에 북경의 방위를 책임지는 중직에 임명된다.


755년 절도사 중에서도 가장 강력했던 안녹산이 17만의 병력을 가지고 반란을 일으켰는데, 이는 당시 당이 보유하고 있던 전 병력의 40%에 이르는 전력이었다. 게다가 안녹산이 가지고 있는 군대는 당의 군대 중에서도 가장 호전적이고 잘 훈련된 북측 국경의 군대였고, 상당수가 기마전에 익숙한 북방 유목민족들로 구성된 용병이었다. 이들은 당의 군대에 복속되면서도 여전히 중국어도 할 줄 모르고 황제에 대한 충성심이나 중국인이라는 의식도 없는, 말 그대로 외국인으로 구성된 부대였다. 따라서 안녹산의 군대에게 중국 대중들이 정치적 관대함을 기대하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곽자의는 중앙 정부로부터의 명령 체계가 단절된 상황에서 독자적으로 반란 진압에 나섰다. 1만 5천 명의 군대를 가지고 수도인 장안을 기습해 점령, 안녹산의 군대를 둘로 나누는데 성공했다. 본거지와의 보급로가 끊어지자 다급해진 반란군은 전력의 대부분을 장안에 투입했지만, 곽자의는 오히려 소규모의 별동대를 숨겨두었다가 공격해온 적을 성 안팎으로 협공해서 대승리를 거둔다. 이때의 패배로 안녹산의 기세는 완전히 꺾였다.


 756년 숙종이 새로 황제로 즉위한다. 새 황제는 황태자를 대원수로, 곽자의를 부원수로 임명하는데 실질적으로 군대를 움직이는 것은 곽자의였다. 곽자의는 영무와 낙양에서 연달아 적을 지형의 이점을 이용해 격파하였다. 전황이 불리해지면서 반란군은 우호 관계를 맺고 있던 위구르에게 원군을 청했고, 15만 명의 위구르 군대는 한 때 중국의 삼분의 일을 지배할 정도로 기세가 대단했다. 곽자의는 적의 기병을 무력화시키기 위해 산악 지대로 적을 유인하여 괴멸시켰다. 이 때 곽자의에겐 제대로 된 기병이나 궁수병도 없었고 대부분의 전력이 농민들을 모아 조직한 경무장 보병이었다. 곽자의는 밀집 대형을 이용해 적의 기병을 정면으로 맞닥뜨리는 모험을 시도했는데, 이 때 자신이 직접 병사들과 함께 선두에서 서서 군대를 독려하였고, 덕분에 돌격해오는 수만 명의 기병대 앞에서 무장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농민군들이 한 명도 이탈하는 자 없이 대열을 유지했다.


전란이 종식된 후 곽자의의 명성은 하늘을 찌를 듯 했다. 경솔했던 그의 아들은 ‘우리 아버지가 마음만 먹으면 내일 당장이라도 황제가 될 수 있다’ 며 떠들고 다녔을 정도였다. 곽자의는 아들의 귀를 잘라 사죄했지만, 황제의 의심은 거둬지지 않았다. 곽자의의 병권을 빼앗으라는 주청이 빗발쳤다. 결국 황제는 곽자의를 평민으로 전락시켰는데, 이때 아무 불평도 하지 않고 고향에 내려가 농사를 지으며 때를 기다렸다.


전란 이후 당의 중앙 정부는 군대에 대한 통제력을 완전히 상실했다. 이제 당의 군대는 수많은 장군들의 리더십과 유혹으로 움직이는 사병일 뿐이었고, 이들의 허튼 움직임을 막을 수 있는 권위는 곽자의만이 가지고 있었다. 그런 곽자의가 병권을 잃자마자 반란이 재개되었다. 군대의 삼분의 이가 황제의 지위를 거부하고 나섰고, 스스로 황제를 자칭한 장군만 7명이었는데 특히 티베트인들의 피를 지닌 혼혈인, 복고회은의 세력이 제일 강했다. 복고회은은 유목민들과 가지고 있던 친목을 이용해 과거 패배한 위구르뿐 아니라 티베트와 돌궐인들 까지 아군으로 끌어들였다.


다급해진 정부는 곽자의를 다시 대장군으로 임명하지만 그에게 줄 제대로 된 군대도 없는 실정이었다. 장군은 사비를 털고 지역 곳곳을 직접 돌아다니며 호소해 2달 만에 7만 명의 군대와 얼마 정도의 군자금을 모을 수 있었다. 이후 중국 각지를 돌아다니며 군벌들을 제패 하였고, 마지막으로 복고회은이 이끌던 연합군 40만 명과 대적하였다. 병력의 양과 질에서 모두 열세였던 장군은 최대한 소모전을 피하면서 때를 기다렸다. 복고회은이 중국 각지의 경작지를 황폐하게 만드는데도 손을 쓰지 않는 장군을 비방하는 관료들이 많았지만 장군은 ‘몸을 살리기 위해서 사지를 내주는 것, 환자는 일단 병을 맡겼으면 의사를 믿어야 한다’ 고 답신을 보냈다. 여름이 와 날씨가 더워지자 장군은 낙양을 내주는 척 하면서 적을 유인한 뒤 황하가 범람해서 진흙 밭이 된 회남 일대에 봉쇄하였다. 더운 날씨에 익숙하지 않고, 그 동안 약탈한 물품이 너무 많아 움직임이 둔해진 연합군은 지형 때문에 유목 민족 특유의 강력한 돌파력마저 상실하며 약점을 노출했다. 결국 끈질기게 기다리다 시도한 곽자의의 반격에서 적군은 제대로 힘도 써보지 못하고 전멸했다. 이때 죽은 유목민의 족장만 76명이었다고 한다. 전쟁이 명백하게 불리해지면서 곽자의의 이간책에 티베트인들이 넘어가게 되고 전쟁은 끝이 났다.

    

반란을 제압한 곽자의의 명성과 권력은 이제 황제를 훨씬 능가했고, 당의 정부는 기뻐할 수도 슬퍼할 수도 없는 입장이었다. 그중에서도 어조은이라는 환관은 곽자의를 대단히 질시하여 ‘그에겐 안녹산의 사악함이 있고, 그 힘과 명성은 오히려 열배나 되는데 어찌 한 사람의 신하에게 이렇게 지나친 힘을 주는가’라며 그를 실각시키기 위해 술책을 꾸몄다. 하지만 예상과는 달리 곽자의는 군대를 자진해 해산하고 고향으로 돌아갔고, 결과적으론 이 덕분에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이후 즉위한 대종 황제는 어려서부터 곽자의를 흠모했던 까닭에 장군에게 상부의 호칭을 주어 공식적으로 스승으로 대했다. 곽자의가 은퇴한 뒤 그를 질시하던 관료들의 주청으로 숙종은 곽자의의 부친의 묘를 허물었다. 대종이 이에 대해 사죄하자 장군은 ‘천하에서 전쟁을 치루며 저와 제 군대가 부순 무덤이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이건 다 인과응보가 아닌가 합니다’ 라며 겸양을 표했다. 동시대의 인물인 이백은 그를 가리켜 그는 전장에선 항상 노(勞)했고 평시에는 언제나 겸(謙) 하였다며 당의 시대에 등장한 모든 명성 높은 장군들을 가운데서도 곽자의는 홀로 돋보이는 인물이라고 평가했다. 이백이 동시대 위인들을 다루면서 작품 속에서 존경심을 표시한 인물로는 어용 문인 시절에 황족들을 칭송한 것을 제외하면 곽자의가 유일하다.

 

전국시대

제나라 단전과 비교됨

삼국시대

적벽대전

한나라가 망하고 진

부건의 비수 대전의 교훈과 서로 비교

 

모두 상대도 안되는 적은 군으로 대적과 싸워 위기을 극복한 사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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