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미/역학 마당

미래 예측

土談 2012. 9. 9. 14:23

 

샤무엘

히) Shmu⁾el.

BC 11세기경 이스라엘에서 활동한 이스라엘 역사의 종교적 영웅.

개요

〈구약성서〉에서 당시 유대인 남자가 맡을 수 있었던 지도자 역할(선지자·제사장·판관·예언자·군대지휘관)을 모두 맡은 인물로 등장한다. 가장 뛰어난 점은 왕정(王政) 수립과정에서 한 역할이었다.

성서에 나오는 그의 생애

사무엘에 관한 정보는 〈사무엘 상〉에 실려 있다. 2권의 책에 사무엘이라는 명칭이 붙었다고 해서 그가 이 책의 저자(실제로 그의 죽음이 〈사무엘 상〉 25장에 언급되어 있음)나 주인공임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사실상 어떤 의도로 이 책에 그러한 명칭을 붙였는지 추론하기는 어렵다.

사무엘은 엘카나(에브라임 지파 출신)와 한나의 아들로서, 자녀를 낳지 못하던 어머니의 기도에 대한 하느님의 응답으로 태어났다. 한나는 감사하는 마음에서 아들을 실로의 주요성소에서 봉사할 사람으로 봉헌(奉獻)하도록 제사장 엘리에게 맡겼다. 이곳에서 소년 사무엘은 엘리의 가문이 몰락할 것을 예언하는 계시를 받았다(Ⅰ사무 1~3).

어른이 되었을 때는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에벤에젤에서 팔레스티나인(불레셋)사람들을 크게 무찔렀다(I사무 1~3). 그뒤 이스라엘 장로들이 왕을 세우자고 제의하자 사무엘은 이를 하느님 야훼에 대한 이스라엘의 불충으로 간주하고 분개하면서 거절했다(8). 그러나 야훼의 계시를 받은 뒤, 사울에게 기름을 부어 온 이스라엘 앞에 왕으로 세웠다(9~10). 사울은 이스라엘 군대를 효과적으로 지휘하여 암몬군을 무찌름으로써 왕의 자질을 입증했다(11). 이런 일이 있은 후 사무엘은 이스라엘의 지도자 자리에서 물러났다(12). 그러나 뒤에 다시 등장하여 사울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야훼의 계시를 선포했다. 그 이유는 사울이 제사장의 권한을 가로챘고(13), 그가 아말렉 사람들에 대해서 내린 금지법(대체로 사람이나 물건을 죽이거나 파괴함으로써 신에게 바치는 원시법)을 실행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15). 사무엘은 야훼의 계시에 따라 비밀리에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왕으로 삼았다(16). 그뒤 한동안 등장하지 않다가 얼마 뒤 나욧 성소에 나타났다(19). 죽은 뒤 사울의 요청으로 무당이 불러내자 혼백으로 나타났다. 이때 사무엘의 혼백은 3번째로 사울에 대해 배척을 선언했다(28).

사무엘에 관한 상충되는 전승들

사무엘은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등장하여 전쟁을 수행하고 법을 시행하는 면에서 지도력을 행사했다. 그의 권위는 근본적으로 종교적인 것이며, 어느 정도 제사장적 권위도 포함했지만 대체로 예언자적 권위였다. 〈사무엘〉에 보면 그는 처음에는 왕정에 반대했다가 나중에는 찬성하며, 야훼를 대변해 사울과 다윗을 왕으로 임명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이는 확실하지 않다. 수많은 비평 사가(史家)들이 그랬듯이 사무엘의 역사와 이 역사가 보존되어 있는 자료 모두를 면밀히 분석해 보면 의문을 일으키는 모순이 드러난다. 이러한 분석에 따르면 현재 남아 있는 자료의 어느 것도 그 안에 담긴 사건들과 같은 시기의 것이 아니다. 만일 한 자료를 주된 것으로 받아들일 경우 다른 자료들은 모든 역사적 가치를 잃어버리게 된다.

2가지 주요차이점은 비평가들이 '친왕정'(promonarchic)자료라고 부르는 본문들(Ⅰ사무 9:1~10:16)과 '반왕정'(anti-monarchic)자료라고 부르는 본문들(Ⅰ사무 8, 10:17~27)에 있다. 여기서 '자료'라는 단어의 뜻은 재구성할 수 있는 가설 문서라기보다는 전승을 가리킨다. 친왕정 입장에서 쓴 사울의 즉위 이야기에서 사무엘은 무명의 시골 선지자(독특한 초자연적 증거와 함께)로 등장한다. 또한 사무엘에게 계시된 야훼의 뜻에 따라 왕정이 수립되고 왕이 선출된다. 그러나 기름을 붓는 이야기에서 사울이 왕으로 즉위하는 내용 대신 사울이 암몬군을 물리친 이야기가 나온다. 자세히 검토해 보면 이것은 기름을 붓는 의식을 하지 않고 사울이 즉위한 이야기임이 드러난다. 사울은 판관들(가나안 땅을 정복할 때 이스라엘 백성을 이끈 지도자들)이 무용(武勇)과 지도력을 탁월하게 발휘하여 선출된 것과 같은 방법으로 왕이 되었다. 이 이야기에서 사무엘의 등장은 매우 어색하다.

〈사무엘〉에서 반왕정 자료는 왕권·사울·사무엘에 관해 다르게 기록하고 있다. 사무엘은 '온 이스라엘'(당시에는 불확실한 용어)에 알려진 인물로 등장하며 판관이라는 지위에 근거하여 권위를 행사한다. 왕정 수립은 신의 계시에 의해서가 아니라 이스라엘 원로들의 요청에 따라 이루어진 것이고 사무엘은 이들의 요청을 야훼에 대한 반역으로 취급한다. 왕은 신의 선택이 아닌 제비뽑기로 선출되는데, 이것은 왕이 될 사람에게 특별한 자격을 요구하지 않았음을 뜻하며, 이 수줍은 왕 후보자 사울은 숨어 있다가 부름을 받았다. 이 이야기는 7장과 12장의 판관 사무엘의 이야기와 연관되며, 여기서 사무엘은 분명히 마지막 판관으로 묘사된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이 판관체제를 배척한 이유에 대해서도 그 체제의 결함 때문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이 세속화되었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이 전승에는 2가지 의문점이 있다. 즉 사무엘은 군대 지휘관과 영구적인 통치자를 겸한 유일한 판관이라는 점과 7장에서 그가 필리스티아를 무찌른 것은 역사적 사실일 수 없다는 점이다. 비평가들은 사무엘의 탄생과 소명(召命) 이야기에는 비(非)역사적인 특징들이 많이 나타나기 때문에 전설로 간주한다(→ 색인:유대교). 이 기록은 예언자로서의 사무엘의 역할에 대해 언급하지만, 이 시기에 예언자가 유명한 종교 지도자로 등장했다는 점에 대해서는 의문을 제기할 만하다. 이 이야기는 또한 사무엘이 제사장의 역할을 담당했다는 후대의 기록(Ⅰ역대 6)의 기초가 되며, 이는 사무엘이 행한 종교적 역할을 후대의 제사장직에 비추어 설명하려고 한 것이다.

사울이 사무엘에게 버림을 받는 이야기에도 2가지 전승이 있다. 첫번째 이야기(Ⅰ사무 13)에서는 사울이 제사장의 특권을 가로챈 일이 동기가 되는데 그당시 왕의 권력이나 제사장의 특권에 대해 이처럼 상세히 규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2번째 이야기(Ⅰ사무 15)에서는 사울이 성전(聖戰)의 윤리를 지키지 못한 일이 동기가 된다. 이 이야기는 첫번째 이야기보다 신빙성이 있다. 사건의 자세한 내용을 정확하게 파악할 수는 없지만 사울과 사무엘 사이에 불화가 있었다는 확실한 전승이 있었던 것 같다.

중요성

사무엘이 왕정수립에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로 기억된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그가 예언자·선지자·판관으로서의 역할을 했다는 것은 어떤 면에서는 신빙성이 없다. 이 문제는 이 자료가 기록될 당시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지나가는 투로 얼핏 언급한 사무엘의 역할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를 규명함으로써 해결될 수 있다. 이 역할이란 입신(入神)의 상태에서 예배하기 위해 조직된 청년 집단인 여러 예언자 수련생들을 지도하는 것이다. 여러 가지 점에서 이들은 종교적 열광주의자 및 민족적인 보수주의자들이었다. 이들은 젊고 활동적이었기 때문에 사무엘에게 도덕적이면서도 물리적인 권력 기반을 마련해 주었다. 보수주의자였던 그들은 필리스티아 사람들이 이스라엘에게 준 위협과 종교 및 민족의 전통과는 낯선 새로운 정치체제(왕정)가 이 위협을 막아 줄 것이라는 약속 사이에서 분명히 의견이 갈라졌을 것이다. 이스라엘에서 발생한 이러한 내분이 사무엘이라는 인물에 반영되었으며 그는 양편으로 갈라진 대부분의 이스라엘 사람들을 대표하고 있다.

J. L. Mckenzie 글

 

유럽, 아메리카 아시아, 아프리카 한국

BC 2333년

단군 단군조선 개국

BC 1790년

함무라비 함무라비법전 편찬

BC 1100년

주의 무왕 주나라 건국

BC 800년

호메로스 [일리아드] [오딧세이] 집필

BC 563년

석가모니 탄생

BC 499년

공자 노나라 최고재판관에 오름

BC 478년

페리클레스 델로스 동맹결성

BC 492년

다리우스1세 페르시아 전쟁으로 오리엔트 통일

BC 399년

소크라테스 독배마시고 죽음

BC 350년

맹자 제자백가의 시대

BC 335년

아리스토텔레스 아테네 리케이온 설립

BC 334년

알렉산드로스 대왕 동방원정 시작

BC 317년

찬드라굽타 인도 최초 제국, 마우리아왕조 건국

BC 261년

아소카 마우리아 왕조, 불교 공식 종교

BC 218년

한니발 제 2차 포에니 전쟁

BC 221년

진시황제 진나라 중국 최초 통일, 만리장성 축조

BC 202년

한고조 유방 한나라 중국 재통일

BC 194년

위만 고조선 왕 즉위

BC 141년

한무제 유철 한나라 왕 즉위, 영토 확장

BC 138년

장건 비단길 개척

BC 97년

사마천 [사기] 완성

BC 58년

율리우스 카이사르 갈리아 정복

BC 57년

박혁거세 신라 건국

BC 27년

아우구스투스 로마 제정 수립

BC 31년

클레오파트라 7세 악티움 해전 패전

BC 37년

동명성왕 고주몽 고구려 건국

BC 4년

예수 탄생

BC 18년

소서노 온조와 함께 백제 건국

144년

카니슈카 인도 쿠샨왕조, 간다라 미술 최성기

42년

김수로 금관가야 건국

227년

제갈량 위나라 정벌을 위한 출사표

203년

을파소 고구려 명재상 을파소의 죽음

260년

샤푸르1세 에데사 전투에서 로마 격파

 

이 글을 보고 서구의 관점을 이해하고

동양의 춘추 전국시대를 거처 진나라 한,당,송,원,명의 관점과

동서양의 현대 국가의 관점에서 볼때

 

미래의 안정된 관점에서 미래을 예측하고 행동 할 수있는 과정을 살펴 볼 수있다.

문제는 인간의 독자적인 관점에서 개인적으로 살아가는것이 많은 문제(혼란)을 초래하여

즉 원시사회서

사냥을 토끼을 사냥하여 개인이 소비하는것.

          소을 사냥하여 잉여 물 처리문제,보관의 문제로 전부가 해택을 받는것.

여기서 노력없이 꽁짜로 먹은 일이 발생

부족관계에서 큰 것을 사냥하는 사람에게 리더의 자질을 부여하고,주변 평판으로 무임 승차하는것 평가절하므로

이런 두가지가 발전하여 법과 도덕이 발생

 

즉 인류의 역사가

잉여물 문제와 이것으로 인한 리더을 세우는 문제로 인하여

싸움이 벌어지고 조율하는 과정에서 도덕,법,세금등을 낳는다.

이런것이 지나치게 편협 될때는 언제든지 변화을 역사에서 보여 주고 있다.

아직 까지 반복되고 이것의 결과물인 양극화 현상을 극복 할 수없는것을 보면

역사는 인간의 한계나 고난의 기록이고 현재도 나약한 존재이며 그에따라

인간의 판단도 절데적으로 옳을 수 없다는것과 역사적인 지식 또한 정확하지 못한

개연적인 지식에 불과한 것이다.

 

서양에는 사무엘과 신이 리더을 내세워 왕정으로 통치하게 되고(BC11년)

동양에서는 요순을 비룻하여 문무왕 주나라(BC1100년)의 천자통치가  춘추 전국시대을 거치면서

많은 혼란을 경험

즉 조폭이 전국 통일을 하고 일관된 행위가 있으면 그것에 맞추어 계획을 세우고 살 수있는 방법이 있는데.

 그러지 못하고 구역 다툼으로 혼란 중복된 보호비,아니면 불안을 느낀 조직에서 폭정을 일 삼는경우

삶에대한 예측불가능

이런 유형의 사회 조직이

강력한  국가을 요구하는가운데

여러차례 세계 대전을 격으면서 현재 국가로 편재되었다.

지구상에 위치에 따라 체제와 사상이 국가가 존재하는데

각각 다양한 색갈의 국가가 이질적이라고 생각할 수있지만

원류는 동일한 관점은 변함이 없다.

 

지금까지 잉여물(재정),리더 추앙(권력),법(입법),세금

국가와 시대에 따라 방법만 변화하였지

원리는 다른것이 없다는것이다.

이 모든것이 음양오행의 논리 속에서 성장하여왔다.

이런 요소의 변화가 역사,철학,문화,종교을 만들어 낸것이지

이것이 국가을 만들어 낸것이 아니다.

즉 공산당 출현도 좌파적인 이념이 공산당을 만든것같지만

잉여물의 분배 문제로인 하여 만들어진것 뿐이다.

종교도 이런 인자들이 균형을 잃어 버려 균형 마추기 일환으로

전쟁,질병,정신의 핍폐해지므로 생겨난 산물이지

종교가 먼저 국가을 만든 경우는 아니다.

시대별로 나누어 놓은 사상류들이 그 시대만에 그렇다는것으로 이해하는것도 문제다.

현재에도 다양한 생각이 상존하고,특히 이슈되는 흐름을 대변하는 사상이 만들어진다.

위의 중요한 요인들이 현 사회가 활용하고 응용하는가운데 구조적으로 만들어 지는 생각이

그 시대을 반영하는 철학적 사유로 작용한다.

그러니 철학적인 사유는 개인의 생각으로만 사유하는것이 아니라

사회의 구조적인 틀 속에서 만들어 진다.

그러므로 역학도 구조적인 철학의 사유 속에서 예측하는 흐름이 바람직 할 것이다.

건축물도 중요한 요소인 물적자원,권력,법,세제로 국가을 운용하듯

콘크리트,철,나무등이 건축물의 유형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중요한 기둥인 구조물에 의하여

건물의 이미지와 위용을 판단하여 다양한 유형의 건물 스타일을 창출한다.

원시 토굴,움막에도 이런 구조가 없었겠는가?

이런 구조적인 문제가 원초적으로 왕정으로 있었는것이지

요즘 철학계에서 누가누가 무슨 주의을 만들고,사상의 흐름이 이렇고 구조주의 철학이라고 말하는것과는

차이가 있다.

 

 

 

서양의 사무엘이 왕정을 경정할때 12부족장들을 통합

동양의 12간지사용

왕정의 권력구조

세금의 정전법 약 십분의일 구조

이런 구조 속에서 형평성을 연속적으로 다루면서 발전하여

강한 국가 체제에서 미래을 예측하여 살수 있어

잉여 체제가 늘어나 현재의 양극화로 인한 사회문제가 발생

 

그러니 사주와 역을 보는 관점도

역사와 문화 철학의 잉태과정을 원초적으로 살펴 봅으로

결과에 관한 예측이 정해  지는것이다.

최근에 많은 분야에서 다양한 성향으로인하여 세분화,전문화되고 있다.

이런 상태로 나무을 보되 숲을 못보는 것이다.

작은 일에 얽매여 전체을 보지 못하는 시야는 한정성이 있다.

이런 측면에서 역사의 원천을 살피고 이런 글을 싣는 이유이다.

 

실존(사회)이 본질(개인)을 우선 하기 때문에

즉 핵무기을 개발한 사람이 이로움을 전제로 만들었겠지만

현실의 사회 문제을 위해 해로움으로 쓰이기 때문이다.

각종 경기서 팀의 결과가 개인의 역량에 우선한경우에서도 알 수있다.

이론과 학문적인 측면은 반대로 접근 할 수있지만

예측이란 관점에서는

절대적으로 개인 보다 사회의 흐름을 배제하고서는

정확한 예측이 어렵다는것을

깊이 생각하고 다양한 사회의 관점을 이해하는 것이

즉 사주와 역을 정확히 예측하는 지름길임을 인식해야한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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