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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서예사 - 비각예서(碑刻隸書)

土談 2015. 9. 1. 00:03


을영비


예기비


시신비


조전비



희펴ㅓㅇ석비

 희평석경



장천비


기타석비


석문송


                              비각예서(碑刻隸書)

  서한 초기에는 서법도 진의 영향으로 소전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동한 시대가 되면 예서가 서법의 정체로 자리를 잡았다. 서사의 재료에 의하여 예서를 비각예서와 간독 예서로 나누었다.

  서한 초기의 군신상수각서(群臣上壽刻書-BC156), 노령광전각서(魯靈光殿刻書-BC149)는 기본적으로 전서체 이다. 양동매산기(楊罿賣山記-BC68)와 노효왕각석(魯孝王刻石-BC56)은 한예(漢隸)의 특징이 나타나는 글자체이다. 녹효우각석(廘孝禹刻石-Bc28-BC25)에는 더 이상 전서체 글자를 찾아 볼 수 없다.


  예서가 정형화되고, 규범화 된 시기는 동한의 중엽 쯤으로 본다. 동한 시대에는 많은 비석을 남겼다. 예서로 쓰여 있는 비석이 180개 쯤 된다. 대부분이 동한의 후기에 만들어 졌다. 필획의 끝 부분을 八자의 꼬리처럼 쓴 모양을 하였으므로 팔분서(八分書)라고 한다. 예서는 공통되는 특징을 가지고 있지만 결구나 필획에서 다양한 표현을 함으로 차이도 나타난다. 특히 비석에 따라 글자체의 특징이 다르게 표현되므로 점차 비각을 중심으로 글자의 유형을 나누었다.


  비각 글씨는 서법가의 필묵과 필묵의 글자를 각자공(刻字工)이 사용하는 칼의 기법에 의하여 칼자국(刀痕)으로 글자가 만들어진다. 한 서법가가 쓴 동일한 글씨라도 각자공에 따라서 다른 운취를 내는 글자가 새겨진다는 뜻이다. 필의(筆意)와 칼자국(刀痕) 중에 어느 것을 더 중요시 하느냐에 따라 글자체의 맛이 달라진다.

한 대의 서로 다른 글자체를 가진 비석을 살펴보자.


<석문송-石門頌>

  후한 때(148) 섬서성 포성현의 석문의 암벽에 새긴 마애비(磨崖碑)이다. 글자의 크기가 6-9cm에 이른다. 목간의 글자체를 닮았다. 예서를 크게 쓴 첫 번 째 비각이다. 이때 큰 글자를 쓸 수 있는 붓이 처음 나왔으리라고 한다.

<을영비-乙瑛碑>

후한 때(153) 때 세운 비석이다. 한의 노나라 재상 을영이 공자묘의 제사를 관장하였던 사실을 기록하였다. 각 행마다 예서 40자씩 18행으로 기록하였다. 을영비의 특징은 팔분서의 표본으로 삼을 만큼 결구가 튼튼하고 크다. 투박하여 옛 맛이 나는 글자체이다.


<예기비-禮器碑>

  후한 때(156) 새긴 비석이다. 예서의 대표적인 글자체로 본다. 공자 묘를 수리하고 제사를 지낸 기물을 정리한 내용을 적었다. 곡부의 공자묘에 있는 비림에 세워져 있다. 이 비의 글씨는 아주 세련되어서 결체가 차분하다. 8분 서법을 가장 아름답게 나타낸 글자체라고 한다.


 <공주비-孔宙碑>

후한 때(164) 새겼다. 공자의 18세 후손인 공주의 비석이다. 산동성 곡부의 공자묘에 있다. 글자체가 아주 유려하다. 예서 비각 중에 유려한 글자체를 나타내는 비석은 공자의 제사나 유가적 유소가 강한 비석이다. 예기비, 조전지, 사신비, 을영비 등이다. 귀족적인 풍취가 있다.


 <사신비-史辰碑>

후한 때(169) 세웠다. 노의 태수 사신이 공자 묘에 제사를 지냈을 때 비의 양면에 새겼다. 사신비의 글자체는 예서의 최고봉으로 꼽는다. 사신비의 글자의 팔분서의 비각 중에서도 대체로 담백하고 맑고 평담하다고 한다. 을영비는 필획이 멋대로 이면서 굳센 맛이 나고 예기비는 서법이 화려하면서도 기교를 다 하였다. 사신비는 평담함이 맛이다.


<희평석경>

  후한 희평 4년(175)에 채옹의 상소로 유교의 경전을 돌에 새긴 것이다. 채옹의 글씨라고 하나 자체가 다양하여 여러 사람이 쓴 글자로 본다. 한 비에서는 크게 두 종류로 나눈다. 앞서 말한 을영비 계열이고, 다른 하나는 글자가 거칠고 소박하며, 야성미가 있고 힘이 있다. 서민적인 정취를 풍기는 글자체로서 석문송, 장천비가 대표적이다.


<조전비-曺全碑>

후한 때(185) 새겼다. 황건적을 언급한 내용도 있다. 글자체는 수려하고 아름답다. 그러나여성적인 아름다움으로 화사하나 소박한 맛은 떨어진다. 한때는 예기비와 더불어 예서 비각의 2대 걸작이라고 하였으나 너무 섬약함 때문에 지금은 인기가 떨어졌다.


<장천비-張遷碑>

후한 때(186) 새긴 비석이다. 장천은 지방 관리였다. 지방민이 장천의 공덕을 기리며 세운 비석이다. 필획이 힘이 있고, 고졸하다. 6조 시대 때 장천비에서 해서를 만들었다. 해서의 기원으로 본다. 흔히 조전비와 대비되는 자체로 예를 많이 든다.

 

  한나라 때의 서체를 말할 때 한예(漢隸)라고 하면서 마치 예서만이 사용한 듯한 느낌을 준다. 그러나 문자가 현실 생활에 실용화되면서 정성을 들여서 천천히 쓰기 보다는 빠르게 쓸 필요가 있었다. 이처럼 빠르게 쓰기(速寫)가 글자체의 변형을 가져왔다. 전서에서 예서로, 장초로, 예서에서 해, 행, 초서로 발전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죽간에서 보면 전서에서 예서로 바뀌는 과정에 장초가 태어났고, 장초에서 금초로 발전하였다. 예서를 빠르게 쓰느라 규범이 무너지면서 해서가 태어났다. 해서를 빠르게 쓰느라 다시 행서가 태어났다. 이처럼 새로운 서체가 나타나는 시기는 한나라 때이다. 한나라 때는 글자를 일상 생활에서 사용하는 것이 널리 퍼지면서 빠르게 쓰는 글씨가 필요하게 되었다.


  비백체의 글씨도 후한 영제 때 채옹의 작품이라고 전한다. 전설적인 사실이지만 후한 때 속사의 필요성에 의해서 나타난 것은 틀림없다.

  이로서 한나라 때는 이미 서법의 5체가 모두 나타날 기틀을 마련하였다.

 


출처 : 서예세상
글쓴이 : 촌정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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