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철학

짧은 생각

土談 2016. 3. 13. 20:33

 

 

이 대목에서 아쉬움이 남습니다.
간디와 타고르는 생각이 서로 관점을 달리하고 있지만
서로 존중하는데는 방해 요소로 삼지않고 서로 간과한 부분을 보충요소로 상생했는데.
우리 선현들도 이보다 탁월한 식견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외압과 이간질을 극복하지 못한 아쉬움이 남습니다.

 

 이분법적인 이념 분쟁은 없어져야 된다고 봅니다.
좌니 우니 그 굴레 속에서 순수한 분들이 많습니다.
그 세대에 아부지는 지역에 덕망받던 면장하다 낮에는 아군 밤에는 적군분열속에서 결국은 적에게 맞아죽고
시집을가 전쟁 후반에 신랑은 자형이 일본 유학파로 적군 접령당시 도와다는 이유로 영문도 모르고 아군에게 끌려가
몽둥이로 죽도록 맞아 집에 걸어 올 수도없는 지경에끼지이르고 십십하면 괴롭혀
이롷게 사느니 사대독자가 자원해서 군대갔고(이걸 피하려고) 생이별을하고 재대가 벌써 지나고 휴전이된뒤도 집에 보내주지않아
5년 에도 병장재대 이여인 의운명의 기구함에서 우리의역사의 나신을 보는듯합니다. 감사합니다.

 

팔공산 서쪽 자락에 가산산성 정상 부근에는 복수초 군락지가 있습니다.
군마들이 노닐고 종교박해을 피해서,도딱으로,병력기피해서,범죄짖고 도망와서
산으로 들어와도 산은 모두를 품어주고 복수초란 희망의 꽃까지 피워주니 감개가 무량하지요.
시세에 나쁜 일하고도 행운이터진 사람이
병력기피하고 산속에 농사짓고 살다가 개발되어 보상 억수로 받고 그돈으로 주택여러체 도심에 산것이 바로 아파트 부지로 들어가
빌딩을 사들인 복터진분도 더러 있더라고요
자연은 모두에게 공평하게 대하는것같습니다.
자연의 입장에서 이 음악을 감상하면 무엇이라 할까요?
감사합니다.

 

보름하면 망우리 돌리던 아련한 추억이떠오름니다.
공작이 꼬리을 활짝 뽐내듯 불의 발기가 화려하게 돌 수록 이세상에 모든것이 자신의 것인냥 하고
혹시나 회전이 늣어 질때 불씨가 빠져나갈때 학습하고 배운것도아니고 연습하고 애 낳고 키우는것도 아니듯
원초적인 감각으로 불의 소중함을 알았는지 뛰어가 불씨을 주서담기 전에 그만!
앗 불사!

농사을 짓기위해 뿌려놓은 인분위에 떨어져
이것이 무슨 운명의 장난인가?
잘나가다 추락하는 영웅의 마음이 이런 느낌이 아닐까?
감사합니다.

 

이 노인 같은 분이 동서고금 속에서 아니 각박한 현실안에 들어나지 않아서이지 이세상을 굴러가게 하는 원동력입니다.
어릴때 읽던 영웅전에 나오는 분들만 있다면 벌써 이세상은 파탄을 면할 수없었을것입니다.
이런 순수한 분도 있습니다.안타갑지만
교육을 잘 받은 촉망받는 의사가 자신의 꿈을 펼치려고

도심에 100억 빌딩을 샀습니다. 대출이 많았겠지요 몇달후 계획이 지연되어 이자가 늣었서 은행직원이 싫은 소리을 했는 모양입니다.
이 분을 못참고 자살을 선택했습니다.
일년도 안되어 빌딩가치는 배로 올라있었습니다.
결국은 다른 손에 넘어간후지요
순수한 측면만 고려한다면 이 노인이나 젊은 의사나 하나가 아닐까요

 

 

저는 공산주의니 민주주의니 하는 단어에 의구심이 있습니다.
이것은 후일 자신의 체제을 미화하기위한 허구인 착시현상으로 생각합니다.
우리가 많은 모순을 현재 생활 속에서 바름으로 바아들이고 숙명처럼 쓰는것처럼 말입니다.
그런다고 이것을 부정하는것으로 생각하는 오류는 말았으면 합니다.
성서도 초기의 구약을 많이 훼손하는것 처럼 막스베버의 칼빙의 종교개혁으로 부터 민주주의 시작과 칼막스의 자신이 책임있는 중심으로의 공산주의 의 의도가 탈색되고 민족적 전체적 집권증의 사당화 등등으로 본래의 뜻을 잊어버리고 괴물화되어 지금까지 굴러가고 있습니다.

이러든 저러든 지구인들의 양극화 현상을 극복 하지않고서는 우월성을 주장하고 하나을 비하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입니다.동전의 양면처럼 어디 하나 버릴것이 없는 요소을 가지고 있습니다.이것으로 새로운 하나되는 용어를 만들어 낼 수는 있지않을까요?
저는한글의 특성에 맞는 음양오행의 원칙 속에서 한국의 특성을 가장 많이 살려 뭐든지 우그려서 만들어 낸다는 우그리즘주의 을 용어를 사용하여 세계속에 대안없는 사상의 단초가 되었으면 합니다. 레닌 부터 현재 북한까지 공산주의가 뭐지알기나 한가 의심해봅니다.국민들이 먹고 살기위해 퇴비증산은 농경문화의 시작부터 새마을운동을 거처 지금은 스스로 하고 있습니다.

북한은 핵 해커 등등 첨단화하는 가운데 아직도 세금으로 안분세(똥을 퍼서 바치는것)를 내고 있는것을 아십니까?
이 양극화 또한 공산주의을 알기나 하는가 고민해봅니다.
동무 인민이란 단어는 참으로 이름다운 용어 입니다.
그런데 왜 우리가 색안경을 끼고 멋을 추하게 고정관념화 했는지 스스로 자문자답해 보아야 겠습니다.
민주주의나 공산주의나 근본적인 동기는 하나 입니다.

책임 입니다.!

막스 베버,칼 막스 사상을 동경하고 저서를 흠모하고 자신의 밥줄처럼 웅켜잡고 씨름을 해도 개뿔일 수도 있습니다,

베버가 주장하는 캘빙의개혁과 프랑스의 노블리스오브이제와 우연 일까요?

막스 비합리적인 권리의변화와 독일의 칸트 헤겔 니체 하이데거 하머비스의 일관된 사상의 바탕이 우연일까요?

모두 주체의 행동에 대한 책임을 키워드로 하고 있습니다.

이단 순함을 방대한 저서을 통해서도 후세을 혼돈속에 빠트리고 빠지고

코메디가 만든 괴물을 지나쳐볼일이 아닐것 같습니다.

저의 이런 생각이 홓익인간 과 다르지않다고 즉 우연이 아니다라고 주장 할 분이 나올지 누가 알겠습니까?
감사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친일파니 빨갱이니 미군 앞잽이니 분류하고 말들이 많고 잊을만 하면 건드려 자신들의 편의상 써먹고 빈복하고 있습니다.
만약에 여러분들이 생사의 기로에서 외압이 있으면 어떤 길을 선택할것인가?하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닐것입니다.
죽느냐?피하고 보느냐?피했다고 한쪽으로 몰아 한 인간을 송두리체 난자를 가하는것도 그 사회의 치부로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실지로 당하는 당사자야말로 그 심적인 고통을 어찌 말로 다 해아리겠습니까?
서정주 시인을 두고 의견이 분분 합니다.
저는 그분이 상식이하의 야합에 동조한것이 형식에 불과한것이지 그분의 중심사상이 변절이됬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아니면 어찌 그리 해맑고 순수한 아름다운 시을 홀딱 벗어 주었겠습니까?
나신이 부끄러워 어색한 형식을 걸치고 자신의 삶을 꾸려간것은 아닐까요?
이 불합리한 행위을 가지고 맹 비난을 일 삼는자 있다면
자신은 불합리한 자위 행위는 하지않았는가 ?
여기서 자유롭다면 저는 그분의 발가락이라도 혈타 주리라!
감사합니다.

 

이런 이분법적인 모순은 한반도 전쟁에서만 있는것이 아닐것입니다.
지금 자신과 가족,사회,국제관계 속에서 작용하고 있습니다.무늬만 다르지않을까요?
이런 정체성을 벗어나는 방법은 없을까요?
질병이나 정신을 치유하는 마음과도 닮은 꼴을 하는것은 아닐까요?
정몽주 사육신의 죽음이 대안이였을까요?
바렌츠의 극한 상황 속에서도 신용이 죽음보다 귀할까요?
전쟁이 해결 방법일까요?
무결점의 능력의 신들은 이런 인간들의 군상을 즐기는것인가요?
그래도 건강하려고 애쓰고 죽음으로 후세에 정신으로 남고 태풍의 긍정효과을 기다리듯 전쟁의 당위성을 인정하고
차이가 없는 신이 있어 목표로 삼고 만족하고 살아야 할까요?

자신을 이기는것이 가장 위대하다.는 말이 쉬운 말같지만 피부로 다가와 닿지가 않안는데
이런 사색의 길목에서 어렴푸시라도 산천 초목의 씨알들이 바람에 나부끼며 세상을 이롭게하는것 처럼 알게 해주는 이 말을
무반주 첼로 리듬속에 한마음 되어봅니다.
감사합니다

 

마음이 착잡한 대목입니다.
인간이 코끼리을 길들이는 장면이 뇌리을 스쳐갑니다.
온갖 흉기을 사용하여 인간의 말에 순종 할때까지 수도 없이 학대를 가하는것은 전쟁 만큼이나 잔인하지않는가요?
이런것이 동물에만 국한된것이 아닌것 입니다.
역사적으로 고대부터 현재까지 권력이 하나로 집중된곳에는 이런 일이 비일비재했습니다.
사슴을 갖다놓고 말이라하고 사슴이라고 하는 세력은 모두 제거하고
환관 정치로 자신들이 하는 일에 방해가 되는 자들은 모저리 음해하고
강한 왕들 또한 가신들의 내부 사탕발림에 젖어 모든 인적물적 자원을 사유화하고
기업들또한 아니 구멍가게들까지
자신들의 내부 규율에 잘 길들어진 기준을 잦대로 양심과 휼륭한 인성을 가진자들이 내쳐진경우가 허다합니다.이런 분들은 약샥 빠르지가 못하거든요.
집을 지키는데는 악날한 개새끼가 최고인것처럼 말입니다.
전쟁에서만 비참한것이 있는것이 아니라
진짜 암울한것은 실 생활에 전쟁보다 더한것이 표리 관계에서 드러나지않아서이지
심한것이 있을 수없다고 누가 보장하겠습니까?
이런 것은 종국에는 바람직하지 못한 결과가 기다리고 있으니 모두가 경계을 해야되지않을까요?
문제는 현재의 부조화에 대해서는 감각이 무디 다는 것입니다.
코끼리 길들이기나 직장인들이나 개성보다는 획일성의 측면에서는 비슷해 보입니다

 

이 장에서는 판옴티콘(감시와 처벌)떠 오름니다.
사회나 국가가 존립하기위하여 단계별로 수준에 맞게 적제적소에 필요성이 강조되고
정보화 사회인 현대와 미래는 더욱 기능이 커지고
이것으로 인하여 순기능 도 많지만 사생활이 침해되는 역기능도 많습니다.
위기 속에서 서로의 체제를 구축하기 위하여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어
국가의 존망이 결정됩니다.
상서에 나오는 비간은 폭군 주왕에게 충언과 바름을 고하다가 이런 자는 간이 어떻게 생겼는지 껴내 보라해서 죽음을 맞이했고
이것을본 미자와 기자는 국가의 장래을 걱정하여 조상의 신주을 모시고 멀리 떠나고 미친척하며 세상을 보내여 다음국가인 주나라의 기본을 세운 현자들입니다.
이 갈등 속에서 살아 남기위해 험난한 몸부림쳤겠습니까?
이런 때 일 수록 감시와 처벌이 극에 달합니다.
흥성대원군이 김씨들의 세도정치에 살아 남기위하여 상가집 주정뱅이 노릇을 한것도 이것을 피하기위한 묘안이였습니다.
판옴티콘은 그리스의 전성시대에 쓰이든 용어로서 모든 것을 관찰한다는 의미입니다.
초립 선생의 음악에 보면 오케스트라의 융장한 연주가 등장하는데
이런 음악당은 또는 각종 경기장,벤허에 나오는 마차 경기장이 모두 원형으로 한곳을 모두 집중해서 볼 수있는 구조을 가지고 있습니다.이런 구조가 민주주의의 태동과 관련해서 생각하는 사람은 없습니다.이 주제만으로도 후세가 석학의 반열에 오르기 충분한 논재가 될것을 의심하지않습니다.이 용어는 영국에 벤담이 사용하여 프랑스의 푸코가 발전시켜 국가의 존립에 기여했다면
한국에서는 서양과 동양의 그리스 원형경기장 벤담 푸코 주나라의 3현자 한나라의 제후국들이 모두 정보을 공유하기위하여
발전 시켜 현대의 새로운 형태의 문화을 하나로 몪는데 일조할 후학이 나오지않을까요?
이런 단순 사건들이 아무 관련성이 없는것 갖지만 우리가 허파로 숨쉬고 살듯이
동서고금 남녀노소 가릴것없이 유기적으로 잠시도 쉬지않고 현재도 느끼고 있습니다

 

저는 어릴적에 빨치산이 지리산에 공비들이 들썪이는 산 이름인지 알 았습니다.
세상에 밤낮이 있듯이
이 단어 하나을 보더라도 밝은 면과 어두운 면이 있습니다.
빨치산이란 단어는 러시아어,프랑스어 와 빌름이 흡사한 파당 비정규 요원 게릴라 전투요원 요즘 테러 집단을 의미합니다.
일제때는 독립운동 1세대들은 일본을 상대로 살아남기위하여 빨치산 운동을 펼쳤습니다.
김일성이도 이중에 한 사람이었습니다.러시아의 중국 견제을 위해 김성주을 활용하여 애국자가 변절 된것이지요

625때는 공비들의 부분 게릴라전에쓰인 여러곳에서 빨치산 전투가 있었습니다.
같은 이름이라도 쓰임에따라 용도가 다양하게 변합니다. 기준을 어디 두는가에따라 음양의 조화가 바뀌니
한반도에서 살아가는 민족의 심성이 혼란을 거듭하니 마음의 골이 깁어만갑니다.
근본은 하나였는데.그러니 꼭 하나로 합처질것입니다.
부담스러워 하는 분들이 많은데 대국으로 성장하는데 서로가 잃는것보다 얻는것이 많습니다.
빨치산이란 용어는 약자의 아우성 일 수도 있습니다.
독립빨치산 운동 625빨치산운동 미국 건물테러 유라시아등지의 테러가 끝나지않습니다.
서로가 대립보다 근본을 치유하는 바른 선택이 필요할것같습니다.

곫았는데 메스을 사용하지않고 항생제 연고만 바르는 처방으로 일관하는 것같아 보입니다.

 

이 장에서는 인간의 행동 심리와 의사결정의 중요성에 대해서 생각해보고 리더의 역활의 필요성이 절실히 필요한때
혼란속에 많이 배운 놈 잘난다고 행세깨나 하는 놈 철새같은 놈 쥐구영에 대가리 박고 나 모르쇄 하는 꼴이
조선시대 폭군이 설칠때 한강을 타고 올라가 상류인 강원도 일원에 있다가 세상 좋아지면 한강타고 내려와
그 지역이 왕비가 많이 배출한 것을 자랑 하지만 그 속성에는 쪽팔리는 부그러움을 함께하는 형태을 같이 합니다.

이런 것이 우리만의 문제는 아님니다.아무리 뛰어난 민족인들 이런 중구난방 속에 허덕이는 모양세는 똑같습니다.
같은 인간이기때문입니다.
미국을 보더라도 남북전쟁이 인권이니 노에해방이니 기티 미사구려로 도배을 하지만 그 속뜻은 다른데 있다는것은 잘 모름니다.
정권에 필수 요소인 세수을 높이고 투표권을 확대하기위해서 약자을 빌미로 활용한것 뿐입니다.
동전의 양면처럼 어느 곳에서나 사람사는세상에서는 음양의 이치을 벗어 날 수없습니다.이혼란 속에 방치된 민중들은 스스로 잡초들의 씨알 처럼 자생하여 억쌔개 생존 본능 을 터득하고 살아온것을
뒤짐지고 폼잡는 놈들은 국민성이 어떠니 하는짓들이 저급하니 의존성이 있어 개같다니 온갖 먹 같은 소리로 스스로 얼굴에 똥칠하는것도 모르고 이래야 자신이 돗보이는 줄알고 착각하고 살고 있습니다.
어려울때 진정한 리더의 중요성을 이 장에서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할 것같습니다

 

기아,질병,전쟁이 인간사에서 3대악이 아닐까요?
이것이 죽음에 이르게 만든 순위이기도 합니다.전쟁으로 죽는 수는 전체에 비하면 미미하기도 합니다.
유럽에 페스트가 돌때 기아와 질병으로 유럽인구의 3분의일1을 죽음으로 몰고가고
중국에서는 모태동이 식량증산에 방해되는것이 무엇인가?허니 참모들이 참새때들입니다.허니
모조리 참새을 잡으라해서 참새때가 말라가니 벌래들이 왕성하게 번성해서 흉년을 거듭하여 인해전술때 죽은 것은 이 잘못된 정잭에 비하면 새발에 피나 될까요?
이런 예을 보더라도 이 전쟁 보다 현재 인간의 양식이 결핍되는 현상을 더욱 더 경계해야 합니다.
이것은 작은 거짓말에는 민감하지만 큰 거짓말에둔감한것과 같습니다.
자살률이 높은 현실을 더욱더 아음을 아리게 아프도록 생각하는 사람은 드뭄니다.

 

이른 아침 소피가 마루어 일어낮습니다.옛날 같으면 뒷간에 갖을텐데,아니 노상방뇨가 더 맞을것같습니다.사람마다 한 사물을 놓고 느낌이다르듯 역사도 마찬가지인것같습니다.우리 엄마는 피난가서 남의 뒤간에 거즉때기 깔고 잠을 잔적도 있다고 했고 서양 철학자는 통시 철학이라고 모든 생각의 원천은 똥누면서 나온다고 하고 진나라 초석을 다진 이사는 뒷간에 똥누러가서 자신의 할 일을 깨닭았습니다.뒷간의 쥐들은 사람의 눈치을보며 들낙날낙하면서 똥을 먹는데 곳간에 쥐들은 사람이 오는둥 마는둥 하면서 배 뚜드리며 먹는것을 보고 여불위(부호)을 찾아가 진나라을 세우는데 일조하고 제상에 이르렸습니다.

전쟁은 참으로 많은 고통과 시련이 함께함니다.
때론 이른 생각도 해봅니다.
화학에 여러 분자들이 결합아여 새로운 물질이 창조하듯이
전쟁이 분자활동을 시켜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 내는듯하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사람을 물질에 비교하여 않되지만 결과적으로는 인간의 삶도 유기적으로 변하여 화학반응과 유사한것같습니다.
트로이 전쟁릉 비릇하여 펠로폰네소스 전쟁 베스트펠렌 조약,빈협약 베르샤유협약 포츠담 얄타회담이 모두 전쟁후 인간사의 차이을 유기적으로 변하게하여 인식의 차이을 새롭게 조정한 결과을 낳았습니다.

 

전쟁의 고통은 느끼는자마다 각각 홀로고스트,아메리카 원주민 학살,유고의 인종청소,생체실험 625전쟁,배트남전쟁 등등 정도의 차이가 천차만별입니다.
전쟁은 서로의 입장차이을 극복하지 못한데서 오는것으로 과거보다 현재미래는 다양한 체널과 통신의 소통이 발달되어 국소전은 일어 날지라도 연합하여 전면전은 서로가 부담스런 일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아인쉬타인은 3차대전이 일어난다면 다음 싸움은 막대기을 들고 싸울것이다.의미심장한 남기고 전쟁의 위험에 경종을 울렸습니다.
그럼 노화되어가는 지구촌의 인구불균형은 어떤 형태로 수급할것인가? 상상해보는 것도 재미와 흥미을 줄것입니다.
감사합니다.

 

싸움 전쟁 승패를 올림픽에 메달을 따느냐 못받느냐에 따라 영웅이 되는가,낙오자가 되는 교육을 알게모르게 지금까지 받아오고 있습니다.요즘 젊은이 을 병들게 하는 게임 세계(순기능 보다 역기능이 크기에)들이 더욱 승패에 열을 올리고 있습니다.이런 영웅주의 교육이 만년해 있는 세상의 평화는 낙타가 바늘 구멍에 들어갖다 나오는것 보다 어려운 것 입니다.전쟁의 형태을 보면 시대에 따라 기동력에 따라 화력에 따라 생각하는 관념이 달라지고 살상 반경이 넓어지고 앞으로는 예측 불가능한 일이 되었습니다.
  
전쟁의 승패을 보면 거의 모두가 편법이 동원되거나 아예 체급이다른 싸음을 하거나 내부자의 첩보에 의하여 결정되지 같은 조건에서 정당하게 끝니는 경우는 드물지요,인천 상륙,노르망디 상륙,성동격서 형이지요 구기운동에 패인트 묘션이 있는데 오른 쪽으로 가는척하면서 왼쪽으로 파고들고 배구에 시간차공격이라든지 모두 같은 형태을 취하고 있습니다.궁극적으로는 상대를속이는 것이지요.
우리가 개인 적으로 이런 일을 당하면 뒤통수 맟는다고 하지요,이런 일 당하면 평생 원수지고 살지도 모를 일 입니다.
그러나 전쟁에서 이기면 승자에게 열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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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펠로폰네 전쟁으로 내부가 심신이 지쳐있을때 페르시아가 대군을 끄고들어 와 괴롭힐때 중과 부적인 상황에서 해협으로 수전으로유인하여 데미스토글레스가 지혜을 발휘하여 승전으로 이끌었다고 역사가 헤르도토스는전하고,이와 비슷한 상황을 조선에서도 이순신이 연출했지요,유방에 서쪽으로 도망가면서 수세에 몰릴때 강을 건너고 다리을 불테워 없에고 위기을 모면하고 천하에 꿈을 접으려 할때 장량 진번 등이 다리을 보수 하는척하면서 시간을 끌면서 상대을 안심시킬때 전열를 가다듬어 돌아서 상대진영을 치면 대사을 이룰 수있다는 괴책으로 결정적인 역활을 했습니다. 이또한 사마천의 사기에 전합니다.new
그러나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전쟁과 관련된 신중에 아르데미스,아레스 아테나 묘하게도 여신들입니다.이것이 우연일까요? 이들이 활동하는 무대와 때는 만물이 성장하는 때가 아닌 늦 가을에서 이른 봄까지 입니다.625 전후해서 추수끝내고 할 일없어 노름 할때하고도 같습니다. 동양에서도 춘추 전국 시대만 하더라도 이런 때을 지켜가며 전쟁을 치르것이 관례였습니다.
결과적으로 지는 쪽만 바보가 되는것이 이을 따지는 서양이나 덕을 따지는 동양이나 어쩔 수가 없습니다.
나폴레옹 ,히틀러가 과욕으로 러시아을 넘보다가 코다친거나 송나라 양공이 강을 넘어오는 적을 공격할때라허니 아니다 인간의 도리로 어찌 모든 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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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을 넘어 온 후에 싸움을 하는것이 정당 한것이다.결국은 패하고 유가에서 조차 송나라는 어리석은 바보들만 사는 나라로 만들어 놓았지요,
옛날에는 동서양에서 자연의 흐름에 순응하면서 일하고 싸우고 했는데 현대는 비싼 컵에 내용물을 빨대로 빨아먹고 좋은 컵은 배 속에 집어 넣을 수없듯이 이기나지나 본질은 변한것이 없는데 피터지게 싸우는 광란을 영웅시 바라보는 역사의 현장이 아이러니합니다.
이런 통찰력으로 이승원의 다음 행보를 보면 큰 문제가 없을 것같습니다.
감사합니다.

 

 스스로 이런 시험에 들지 말어야하는데 까끔은 단언 하는 재미를 즐기곤 합니다. 저가 입장이 곤란 할까바 원고 내용을 수정해 준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이런 것은 참으로 어려운 것입니다.아니면 바보가 되는 일을 누가 하겠습니까?단지 모두가 흥미를 가지고 소설에 접하면 카타리시즘이 배가 되지않을까 해서 시도 한 것 뿐입니다.

어느때나 소식 즉 정보가 매우 중요합니다. 이 것에 웃고 울고 생사가 죄지우지 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바람은 정보을 전달하는 이미지을 담고 있습니다. 봄바람도 그 중에 하나지요.다뜻한 기운이 생기면 차가운 기운과 대립하여 바람이 일기 시작합니다. 여름에 더위가 극에 달하면 태풍이 일어나는것도 이런 이치을 가지고 있습니다.봅바람에 생명을 태동 할때 씨 앗에 저장 된 에너지을 아낌없이 희생할때 가능한 일 입니다. 여기서 조금 이라도 왜곡이 된다면 자람에 풍파가 일기 시작합니다.이것이 인간 사에도 예외가 아닙니다

알렉산더가 청운 의 젊은 나이에 천하을 호령 할때 희생없이는 새로운 세상이 없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 줍니다.카이샤르도 강약 조절을 잘하여 무장 봄페우스 돈줄 크라수소을 제거 하고 권력을 잡 지만 정보에 둔감하여 원로회의의 시기와 심복의 배반으로 그리스 운명을 내리막 길의 단초을 제공 합니다.항우의 책사 범증이 탁월한 지혜로 상대의 심증을 구석구석 읽고 항우에게 조언를 했는데 항우는 의 심을 하게 됩니다. 즉 유방 측에서 바람을 일의킨 거지요 바람을 왜곡 시킨 것입니다.범증이 유방과 내통하고 있다는 거짓 정보을 흘려 사절단 서로 만나는 자리에서 헐리우드 엒션을 취해서 항우가 오해 하게 모양세을 꾸민거지요

우리나라 역사에서도 각종 난 홍 경래 임꺽정 동학혁명 등등 모두 내부자의 정보에 의해 즉 희생이 왜곡 되어 싹이 피기도 전에 썩어 문 드려 진 경우입니다.
이런 다양한 예을 보더라도 자연과 인간은 분리되지않는 하나의 현상입니다. 주역에 손위 풍이란 괘가 있습니다. 많이 배운 학자들도 대부분 앵무새 역활을 할뿐 자기 목 소리는 없고 현실성이 없습니다.이것이 혼란 한 시기에 소식의 궁금쯩을 유발하여 안 절 부절 못하는 사람의 심리가 정당한 희생의 정보가 중요하다는것과 무고하지 않을것입니다.
이승원의 구명도 이와 같은 전철 중에 하나 의 흐름을 하고 있습니다.

 

누구에게나 말 못할 사연 들이 있습니다.그러나 그것을 표현하면 시가되고 소설이되고 역사가 됩니다.예수가 마굿간에서나고 십자가에 못밖혀 죽음으로 이당시 상황을 엳 볼수 있습니다.예수만 십자가에 못밖혀 죽은것이 아니라 이때 처형 방식중에 하나입니다.로마의 삼두마차가 성할때 일반 민중들의 고통이 얼마나 악날했는가를 짐작할 뿐입니다.그리스 로마 시대에 민주 주의태동을 애기하는 분들도 많이 있습니다.한 마디로 쫏까는 소리 입니다.공자도 아부지가 누구지 모르고 자랐습니다.석가도 모든 기득권을 버리고 스스로 고행 길을 걸었습니다.그 이면에는 말 로서 할 수없는 피 말리는 삶을 짐작 할 수있습니다. 특히 잘 나가는 분들이 과거사을 드러내기 힘들어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그러나 이런 분들보다 더 하겠습니까?
러시아의 토대을 구축한 표트르 대제는 하사관 출신이고 러시아의 발전 시키겠다는 구국 일념으로 서유럽에서 공돌이 부터 시작한 인물입니다. 히틀러는 젊을 때 할 일이 없어 엽서을 그리는 알바를 한때도 있습니다.
신성 로마제국의 카르마르텔은 글씨도 롤랐지만 교권까지 장악한 권좌에 올랐습니다.
베토벤 음악 교습을 전전 했고 고흐는 자신이 살아서는 그림 한점 팔아 본적이 없는 화가 였습니다.
어디 이들 뿐이겠습니까? 동양에서는 합종 연행가 소진(현 유럽의 실세)은 내가 밭때기라도 있었으면 이 자리에 없었을것이다.척덕 꾸러기로 형수에게 밥만 축 낸다고 구박만 받다가 천하의 권력을 쥐고 고향에오니 형수가 나를 바로 쳐다 보수 없더라.
사마천은 벗를 변호하다 궁형(생식기 거세)의 수치을 당하고 한신 즉 유방이 전쟁에서는 용맹이 나보다 뛰어나다고 했던 한신이 젊을때는 동네 건달 바지 가랭이을 기어다녔고 주머시기는 글만일다가 때거리가 없어 마루라 구박하고 도망가려 할때 조금만 기다려 달라 했는데 도주해 다른 살림차려 전남편이 그 지방의 다스리는 관리가 되어 오니 자결을 해서 모두 힘든 삶의 여정을 느낄 수있습니다.

고생 힘든 일에 젖어 사는 사람들은 어려움 조차 잊어 버리고 살 지 모름니다.
결과을 위해 고군 분투 하는 사람들이 무엇인가를 이루면 처철했던 과정은 물거품과도 같은 것 처럼 말입니다.
사랑을 이루기 위해 신뢰와 희생을 쌓아가며 노력하다가 서로가 이루어 지면 무덤덤한 것이 더 큰 사랑인 것처럼 말입니다.
서로 간에 상대적인 차이가 세상을 더 어렵게 하는것같습니다.
평화로운 세상에 보스아니아 르완다 광주 처럼 전쟁도 아닌 냉전도 아닌 최근에 이른 일을 당한 사람들은 지금 도 잊지못하고 삶에 제한을 빋고 고통을 품고 살아감니다.이것 뿐 만 아니라 여러분 들이 상상을 초월하는 일 들을 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정하조 공사을 하면서 사는 사람들은
기계식 정화조는 유지비가 많이 들어가니 허가만 받고 나중에 개조을 하는데 그 큰 똥 통에서 살 다시피합니다. 여름에는 향기가 장난이 아닙니다.
이 보다 더한 사람들도 많습니다.
밥만먹으면 하수도 구멍으로 들어 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 들에 의하면 하수도 구멍보다 상수도 구멍이 더 힘들고 추접다고 합니다.
노후 교체 사고 수습등등으로 구멍을 집처럼 생활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구멍도 크기가 천차 만별입니다.(기어들어가기 부터 뛰어갈 수있는)
이런 일을 돈이 아니면 누가 하겠습니까?돈은 나쁜 이미지만 아니라 이렇게 돋 보일 때도 있습니다.( 통제 수단으로)
그렇지만 남들이 알아 주지않고 천하게 여기더라도 아무 생각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역활은 엄청나게 유익합니다.
즉 뇌졸증 환자을 수술하는 의사보다 더 중요합니다 의사는 한 사람을 위하지만 이들은 대중을 위해 일합니다.
이런 일을 하지않으면 도시가 정상적으로 유지 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먹고 잠자고 싸는것을 아 무생각 없이 당연시 하지만 만약에 이것을 할 수없다면 죽음 뿐입니다.
구즌 일 하는 사람들이 없다면 우리가 공동체 생활 도 불가능 한것입니다.
고생의 한 단면을 들어다 보았습니다.
말이 쉽지 쫍은 공간에서 오도가도 못 할때도 있고 죽음의 공포을 느낄때도 한 두번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금전적인 개념으로 받아 들이고 당연하게 생각하는 개 비스므리 한 리더들도 많은 듯합니다.
많이 생각해 볼 일입니다.

우리가 살아감에 자신의 의지에 달렸는가?아니면 숙명적으로 결정된것인가?
동전의 양면,하루의 밤 낮,호흡의 들숨과 날숨,두뇌의 좌뇌 우뇌,남녀가 있는것처럼 동시에 유기적으로 작용함에 불구하고 사람이 성선설이니 성악설처럼 결론 없는 싸움이 또한 이 것과 같다.최선과 최악에서도 양면성이 있어 표리 관계가 성립하여 서로의 관계속에서도 반작용이 일어난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끝임없는 선택을 하면서 살아간다.정보의 홍수속에서 아님 원초적인 감각으로 아니면 길들어진 메뉴얼데로 자신의 의지로 선택을 하지만 잘 못된 정보와 습관으로 자신의 의지와 무관 할 수도 있다.

이것이 입력되어 작용하여 결과는 자신이 오줌 똥을 마음 눌 수없는것 처럼 때를 정 해 놓은 것일 수 있다.
소우주인 신체도 오장 육부가 상호 유기적인 관계가 뇌에서 받아 들뿐 일 수있다.이것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속에서도 똑 같이 적용된다.은 하 수 속에서 행성의 질서 처럼 자신의 주체로서 만들어 졌다가 큰 틀의 질서를 고양이가 사람이 될 수없듯이 벗어 날 수 없는것이 아닌가?
그러나 운명이란 것은 그 질서 속에서 사람의 관계가 유기적으로 작용하지 않겠는가?
의지하면 사마천을 생각하지 않을 수없다.
오직 학 습을 통해서 즉 좌뇌을 발달시켜 위대한 사기을 완성하여 전하고 서양에서는 헤르도토스가 페르시아 전쟁에서 데미스토클레서 활약을 중심으로 기록했고 투키디데스는 앞에 기록들은 많이 왜곡 되어있다.재미는 없어도 사실 그대로 전해야 한다 페리 글레스 중심으로 반전을 기했다.성서에도 언급 되는 키루스의 교육(페르시아인)을 중심으로 크세노폰(그리스인)이 용병으로 갖다가 감복하여 최고의 교육 서적으로 전한다.백의 천사 나팅게일도 러시아가 크림 전쟁으로 발칸 반도로 남하 할 때 영국에서 파견해 여러 기능을 담당해 죄뇌의 학습인간을 통해 의도적으로 미화된 부분도 많을 것이다. 의지와 더불어 우뇌을 발휘하여 전 세계적으로 추앙받는 주은례를 잊을 수없고
일본의 막부 시대의 최고의 고수는 이 감각에서 만둘어지고
그리스 알랙산더 프랑스의 잔다르크가 이런 원초적인 감각이 발달되어 작용한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현지의 굳은 의지가 전쟁통에 인간의 좌우형을 살펴보게 만들었습니다.

螢雪之功-가난을 이겨내며 반딧불과 눈빛으로 글을 읽어가며 고생 속에서 공부(工夫)하여 이룬 공을 일컫는 말 이 떠오름니다.
이 좋은 말 속에도 양면성이 있습니다.분발해서 고군 분투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저러케도 사는 사람도 있었는데 나는 무엇인가?스스로 죄의식 속에서 고통 받고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치열한 경쟁을 뚤고 직업을 얻는가 하면 줄과 빽이 든든해서 물타기하는 분도 옛날에는 흔 한 일이였습니다.시작이 이러하면 결과도 짐작이 갑니다.주변을 살펴 보더라도 알 수있고요.
그러나 이렇게 뼈저리게 공부해서 한계란것이 있는것같습니다. 돈을 그리 열망해서 많이 생기면 본래의 생활의 한계을 벋어 날 수 없는 경우 처럼 말입니다.이렇게 열심히 연구하고 발전 한 사람들은 대부분이 한 분야에 집중하여 역활을 담당하는 분들이 많습니다.이런 분들이 최고의 리더가 되더라도 자신의 실력을 발휘하가보다 타고난 제질이나 기득권을 가진 특권층의 한계을 벋어날 수없는것 처럼 말입니다.자신은 아니라 하겠지만 남을 돕는다고 한것이 위의 예처럼 오히려 결과는 고통 속으로 몰아 갈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어릴때 선생님이 겨울에 갈탄 난로에 건조헤서 대야에 물을 받아 난로에 얻었습니다.결과는 뻔하지요.녹아 내렸습니다. 만약에 지도자가 백성을 위한다고 한 일이 이런 전철 을 발지 않으란 법이 어디 있겠습니까?숫하게 있었을지도 모름니다. 한 여자는 농사을 짓고사는데 부자가 되는것이 소원이였습니다.
그래서 죽기 살기로 열심히 일했습니다. 그러나 부자가되기란 어려운 일입니다.얼마나 열심히 살았는가 하면 동네 남자들도 따라오기 힘들었고 일 욕심이 얼마나 많았던지 잠을 자기 전에 물을 한 바가지 들어 마시고 잠을 잤습니다.왜야하면 오줌이 마려우면 자동으로 일어나서 일을 하기 위해서 입니다. 하늘은 이들을 버리지않았는지 울산이 개발 붐이 일어 날때 일해서 농토을 하나둘 사 모은것이 하루 아침에 졸 부 구룹에 올랐습니다.그러나 엤날 구태을 벋어 날 수없이 힘든 농사을 그만 두드라도 식당에 허드래 일을 전전 하는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일때문인지 자식을 주지않더군요.
권력이든 돈이던 섹스든 일이던 공부든 지나치게 편협되면 소기의 성취는 얻어라도 부작용이 늘 따르다는 것을 근래 역사의 인 물들을 통해 알 수있습니다.
앞으로 저는 이런 것들에 자유로운 분이 리더가 되는것이 바름을 지킬 수있지않을까 생각해보았습니다.
형설 지공 덕분에 다양한 관점으로 살펴보았습니다.

 

희망과 꿈이 무엇인지 궁금해집니다.실체가 있는것인지 막연한 동경인것인지 아니면 자신이 이루고 싶은 작은 수단인지 이것이 하루아침에 떨어지는것이 아니라 선인 들의 살아온 경험에서 천차 만별의 목표가 서고 이것이 희망과 꿈으로 발전하여 새로운 세상을 변화 시키며 역사의 수레 바퀴를 돌리고 있다.서양에서는 그리스 신화을 필두로 희 비극의 전성기의 문화가 무지막지한 살육의 전쟁에도 불구하고 유명한 소설가나 철학자의 한결같은 공통점은 란틴어을 쓰든 독일어을 쓰던 다른 많은 언어을 쓰더라도 그리스 문화의 희브리어을 바탕으로한 문학의 소산임을 알 수있다. 동양에서는 이상적인 정치 모델로 이것을 동경하고 이런 옳바른 정치가 나오 길 바라면서 부족한 리더들에게는 입에 까시박히도록 각인 되고 통제 수단의 역활을 하지만 아직까지 원 하는 정치는 나오지 않는다.
얼핕보면 서양이 정치고 동양이 문화 같지만 서로 간에 표리관계을 이루는 하나의 역사 임을 알 수있다.이것은 농부가 먹고 살기위한 농작물과 씨앗과의 관계와도 같다.그것이 그것임에도 불구하고 서로 상호작용하여 필요한 관점에따라 쓰임이 다르듯 서로의 관계속에서 혼재하며 혼동과 중화된 쓰임이 반복되고 수레 바퀴 처럼 끌고 가고 있다. 우리의 역사도 그리스의문화와 3왕의 정치 모델 못지않는 홍익인간의 이타정신이 지금 까지 흘러오고있다. 그들의 암울한 시기가 있었듯 우리의 역사도 같은 맥락을 하고 있다. 그러나 한 인간의 희망에서 미래을 읽어보자.부모와 모군이 사는데 부는 건설 업자(십장정도)모는 놀음꾼 모군의 삶과 생활은 누가 보더라도 암울 한것이다. 그마져 놀음하는 마누라 찾으러 다니다 교통사고로 죽고 설상가상 환경이였지만 자신의 독자적인 삶을 만든것 입니다. 요즘 개천에 용나기 어려운데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우리의 역사도 휼륭한 정치와 문화로 위의아이처럼 못 쓸 어려움을 격어왔지만 개천에 용나듯 기본을 갖추고 희망을 노래을 부릅시다 남편 죽은 보상금조차 또 조머시기가 좋아하는 그림 가지고 놀다가 말아먹고 이런 가운데도 반듯이 살아난자가 있으니 이때 희망의 노래을 아니 부르겠습니까? 이런 노래을 자꾸 자꾸 반복하여 불러주어야 되는데 불러 주는 이 없으니 꽃이 시들어 가는것 같아 저라도 이렇게 보테어 불러봅니다. 현지의 마음과 몸의 변화로 희망을 노래 불러봅니다.
때로는 비유가 격하지만 그런 연유를 생각해보고 아주 잔인한 영상물이 주는 충격를 보는것 같은 효과가 있으면 희망이 더욱 더 커져서 더욱 좋은 것 이 아니겠습니까?

 

사람들이 행동과 환경이 반복되어 습관이되면 그 구조을 바꾸다는것이 쉬운일이아닙니다.
개인 집안 사회 국가 구성원의 크기만 다를 뿐 지구가 일정한 궤도을 운행하듯이 그들만의 구조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황도는 최적에 맞는 운행 으로 지구의 생존에 맞게 설계되었습니다만 인간 집안 사회 국가는 갈등의 구조 속에서 이익을위하여 약탈과 전쟁을 일삼고 이념분쟁을 만들고 최고의 힘을 가진자가 무엇이든 마음대로 할 수있다는 의식이 인간의 내면 속에 자리 잡고 없어 지지않는것 같습니다.이것은 동 서양 가릴것없이 똑 같이 승리자의 전유물 처럼 여겨왔습니다.결국은 이것은 누구에게든 환영 받지못하고 즉 자본주의 부의 집중화의 피해 칼 막스의 노동에 대한 잉여자산의 문제 동양의 권력 집중에 대한 문제들로 끝임 없이 잘 못된 반복의 습관의굴레을 한 순간 마다 인식하기 어렵지만 큰 구조 속에서는 지구의 이상적인 생존 구도를 가진것처럼 변하여 새로운 유토피아을 위해 굴러가고 있다. 많은 분들이 이런 변화속에서 동서양의 역활에 공과를 따지고 우월성을 강조하는데 어디 그런 것이 있겠는가? 그또한 그들의 밥통 싸움의 편협된 자신의 그릇된 사고가 만들어 낸 결과다 따지고 보면 공과가 공존하고 우월성을 주장하는쪽이 부끄러운 일 이 더 많을 것이다. 왜 이런 것이 이글과 관계있는것인가 의아해 할 수도 있다.
동양권에서도 습관의 중요성을 한 번 더 들의면 죽고 싶을 정도로 귀에 딱지가 더덕덕 붙어있다. 서양에서는 이것을 -경로의 의존성이라고 표현한다.이말이 그말인데 이렇게 하면 죽고 싶고 저렇게 하면 귀가 솔깃에서 다른 세상을 보는것 처럼 홀 들갑을 떤다. 이것이 모든 방면에 심리적으로 작용하고 활용해도 모두 응용가능한 소재가 된다.
이 전쟁도 이런 차이에서 생긴것이고 현지의 열정도 집안 분들의 모양을 달리 하지만 내력이고 모든 궁금증은 아버지가 알고 있지만 말 못할 사연도 있었을 것이다, 우리의 신체 구조도 얼굴 어께 팔 다리 발이 행동에 따라 불균형을 이루고 있다.
이것 때문에 질병도 생기고 생각도 편협되지만 사람들은 대부분 모르고 지내는 경우가 많다.
이것이 정치 경제 역사 철학 등등 모든 방면에서도 오류을 알아 차리지 못한 가운데 자신의 이론을 주장하는것은 자신의 부귀을 위하여 왕에게 자신의 아들을 삶아 요리해 바치는 경우와 진배가 없다.현지의 가족도 구조 속에서 반복 되지만 선친들의 무언의 가르침이 통하여 미래를 열어가는 정신을 담고 있는것이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지구가 바름의 길을 찾듯이...

 

저는 가끔 등산을 합니다. 요즘은 이것도 사치인것같아 뜸합니다.어떤때는 앞 사람 발만 보고 하몀 없이 가다가 내려 와서 내가 뭐하려 여길 왔는가 할때도 있습니다. 차라리 앞 사람 엉덩이나 처다보지 말입니다.시나 소설도 등산 할때 발 엉덩이 보듯이 해서 이미지가 그러져서는 않된디고 생각됩니다. 이것은 초사실주의 화가가 나무잎의 섬세함을 표현 해서 신비감을 줄 수있어도 즉 플라스틱 꽃에 향기가 없는것 처럼 독자의 상상력과 표현을 제한 하는 미세함과 결론적인 글은 전기에 어룰리지않는가 생각합니다

천자문에 曠遠綿邈 산, 벌판, 호수(湖水) 등(等)이 아득하고 멀리 그리고 널리 줄지어 있음을 말함
巖峀杳冥 큰 바위와 메 뿌리가 묘연(渺然)하고 아득함을 말함
나오는 말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등산에서 정상에서 바라보는 묘미가 이 표현이 아닌가 ?합니다. 이것이 등산을 하는 이유가 될 수도 있고요.
도심과 들판을 바라보며 세상이 내 손안에 있는것처럼 이것이 모두 소유물인냥 떡 주물리듯 마음대로 할 수있는 기분이들고 무엇인가 넉넉해지는 뿌듯함이 용솟음 칩니다.
그러나 개미처럼 보이는 사람들은 소유에 칩착헤서 아옹다옹하고 콩알 만한 아파트는 비싸네 좃네 크네 굿판 처럼 날뜁니다.
미세 먼지 처럼 다니는 차들은 차종에 따라 사람을 판단하는 도구로 생각한지 오랜 일이 됐습니다.
산을 멀리 처다보면 겹겹이 늘어져 가물가물한것이 태초의 신비감을 들어 그 곳에는 새로운 동경의 세상이 있을것같은 희망을 불러 일으킵니다.
돈도 안되는 것 봐서 머하겠노 저기는 돈되는것 없을까? 나물 보신드등 찾으로 삐데고 명당이라 헐어내고 투자하면 돈대는 것 부터 생각하는 세상입니다.
그러니 관원면막과 암수묘명의 진수을 옆에 두고도 아무 생각없이 흘러 보내는것은 지금이나 옛날이나 마찬가지다.
서당에 훈장이나 학동들이 좁은 공간에서 외우기나 시킨것처럼 말이다이 두 단어에서 시세적으로 정해진 진부한 그림보다 독자의 생각을 펼치는 스토리 텔링이 구름처럼 자유롭게 넘나드는 현지의 시나 소설의 단초를 연상해 보았습니다.

연세도 많지 않으신데 어찌 그리도 박식하십니까? 정말 존경스럽습니다.

 

선생님께서 늘 무거운 주제를 재미있게 보아 주시니 저는 즐겁고 감사합니다.
광원면막 암수묘명의 예로서 등산도 사치인것 같다.
매일 때악볕에 40키로를 걷다시피 일한다.
얼마나 걷는지 모르면 중세 삼국고려시대때 전쟁을 하기위해 하루동안 군사가 이동하는 거리가 20키로.몽고군이 칠 팔십 키로 말타고
이러니 일과후 책만들면 자동입니다.꾸벅 꾸벅 그래도 틈 나는데로 꾸준히 즐기고 있습니다.

이러면 두단어에서 처럼 오십 중반이 되도록 저지랄하고 살까?아니야 그럴리가 없어 절대! 오만상 스토리가 만들어 질텐데

저가 가방끈도 세끼 끈이고 막일 한다면 찜맛 없듯이

 

 억수로 허발나게 궁금한 사람은 배우도 않는 세끼가 어떻게 이런 글을 쓰고 도사들 방에서도 종횡무진할 수있겠어 분명희 딴 동네 에미나이 일꺼야! 상상하면서 말입니다 저가 일하는 곳이 큰 못 주변인데 못근방에 주차하고 회식때 그냥오면 창을 박살 내고 여자 속옷가지을 여기저기 흩어 넣고 전문가 솜씨가 아니면 흥내내기 어려운 상황을 연출하기도 하고 기타 등등등.......이런 사람은 죽어서는 안되는데 걱정해서인지 뚝에다가 못쓸짓을(폭파)할까 그런지 몰라도.

이것은 두단어을 이해하기 위한 글 일뿐임니다.

 달팽이 연가가 주는 느낌처럼

달팽이의 연가

/이정님

앞으로 가는 건지

뒤로 가는 건지

고상한 척 목을 빼고 촉수 세워도

난 어쩔 수 없는 달팽이일 뿐

바다가 솟아 산이 되고

산이 꺼져 바다가 된들

기적은 생겨나지 않나 보다

몸길이를 다 늘여도

너에게 줄 것은 가녀린 신음

하지만 언젠가

너를 맞을 날 위해

버리지 못하는 집 한 채

운명처럼 짊어지고

오늘도 나는 너에게로

너에게로 다가가고 있다.

 

이 달팽이연가로 기나긴 생각여행을 갖다 왔습니다.
理氣論의 정수가 여기에 들어 있지않는가?
동양 문화의 핵심요체 이지만 의견이 분분하고 내똥이 굴다는 자랑만 있을뿐 일반인들은 그소리가그소리인것을 그들만의 리그을 펼치고 있고 아직까지 쌈 구경을 하는 경향이 있다.
선생님께서 이것을 염두했던 안했던 중요하지가 않고 몸소 무의식속에 체득하고 있다는 것이 이 시에서 알 수가 있다.
달팽이를 이원론으로 표현하면서 서로의 의견을 교감하는것이 달팽이 껍질이 體가되고 연체물이 用이되는 理氣의 하나임을 알수있다.
체용이 하나임을 전제하에 자신의 마음을 나누어 표현하면서 복선시킴으로서 자신의 감정을 마음것 즐기고 있습니다. 이것이 사랑이든 연민이든 사단칠정이든 모두가 자신의 경험과 감정을 대입해보면 느낄 수가 있습니다.
몸과 마음이 하나이고 껍질과 연체가 하나임을 전제하고 분리해서 감정이입해서 풍부한 전달 방법을 선택하여 결국에는 서로가 동화되는 표현을
쌈하는 분들이 일찍이 이해 했다면 의견 충돌이 일어나지않았을까? 생각해봅니다.
단순한 가운데 사상과 철학 문화을 일 을 수있는 탁월한 글이라고 생각합니다.
잘안쓰는 토속적인 시어을 사전에 찾아 쓰는 것을 한글을 사랑하는것처럼 자랑 하는것을 보면 욕나오고 시간이 아까울 뿐입니다.
대부분이 남이 못하는 것을 자신들이 표현하는 것으로 특권의식 비슷한것을 갖는 웃기는 코메디입니다.구성의 이원화와 복선이 여백의 향연 처럼 독자의 자신의 세계을 마음껏 펼칠 수있는 장을 열어 주는 효과가 있지않을까요?
(예을 들면 껍질과 연체의 왕성한 활동으로 바도와 산을 넘는 생염의 원천을 느끼듯 플루베르의 보봐리 부인에서 마차의 달리는 모습에서 주인님 도착했습니다.아니다 더 달려라 마차는 덜썩덜석 좌우로 왔다갖다 흔들리고 요동치고 파리의도심과외곽 시장 수도원 등등 달리고 달려도 끝나지않는 질주을 연상하듯 주인님 5바퀴나돌았습니다. 멈추지말고 계속 돌아라)단순한 것이 더 어렵고 세상에 가장 맛있는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저는 이시에서 죽도록 열심히 산자(개인이든 단체든 국가든 풀지 못하는 문제을 고민고민하고 최선을 다해도 해결못하는 숙제)들의 한계를 느끼고 안타까워하는 마음이 묻어 있고 이것을 노래로 위로해 주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굽이굽이 돌아 인생의 종착역에 온것 처럼
전개와 회고의 관점에서도 ....













 

아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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