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사랑 이사는 변화라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동서고금 막론하고 철학자 소설가 과학자 키타등등 현자들이 궁리하는 문제중에 가장큰 화두가 아닌가 합니다.
신화 전설 구전 희비극 소설의 모든 것들이 내용은 자기만의 색갈을 가지지고 언급하는바는 없지만 그 중심내용을 해체해보면 변화에 자유로운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서양 철학자들이 자신의 시대에 맞는 사고을 하고 해결방법을 고민하고 용어만 달리 할뿐 변화라는 근본적인 사유의 틀이 없이는 자신들의 사상이 나올 수가 없다는것을 알 수있습니다.형이상학 형이하학 목적론 자연 계약 자유 평등 권리 의무등드은 변화의 차이을 극복하고자 고뇌를 거듭하고 논쟁도하고 전쟁도해서 사후에 변화를 맞이하기위한 수순을 밟고 있다고해도 과언이 아닐듯합니다.
서양의 학자들의 깊은 사유는 기원전 5세기 후 15~6세기와 현대에 집중적으로 변화의 시점에 있었습니다.
동양의 변화는 기원전 3000년경 의 주역이란 책에서 많은 것을 전합니다.알듯 모를듯한 쉽고도 어렵습니다.
똥누고 나면 똥을 노야겠다는것을 잊어버리듯 이것도 알고보면 변화의 원리을 노래한것입니다.
쉽게 생각하면 하루의 일과을 생각하면 자고 일어나 일과을 마치고 집으로들어가는것처럼 누구나 변함없이 하는것을 體라하고
각자의 일과을 하는것을 用이라는 표현을 합니다.이것이 근본적인 사유의 틀이고 체용이 표리관계로 작용하므로 사계절이 생겨 만물이 생극제화하여 변화의 원리로 작용합니다.
사유의 틀은 동양에서 이것을 활용하는 것은 서양에서 빛을 보는 것이 밤과 낮의 표리관계와 같습니다.
변화에 가장 적절히 효과을 본 나라가 일본이 아닌가 봅니다.
막부시대을 거처 메시지유신으로 네덜란드과 미국의 신기술로 독일을 모델로 융합 발전 시켜 변화의 주역이 된 국가입니다.
이 변화의 주역인 인물로는 이또 오쿠보 도시미치 시부사와에이치가 외부의 갑작스런 문화의 혼란을 극복하고 상인의 혼을 한 손에는 주판을 한손에는 논어을 이 문구 한 구절을 보더라도 일본이 다른 가치의 문화을 어떻게 받아들여 활용했는지 알 수있습니다.일본이 이것만으로 내실을 다지고 지냈으면 과오가 없이 지금보다 더 좋은 나라가 되었다고 생각이들어 아쉬움이 납니다.
세상에 꽁짜없다고 갖다 주었으면 손안데고 코푸는 일에 일조하라고 강요한것이 전쟁의 근원이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결국은 돈때문이지요 체권자가 요구을 하면 없으면 남의것이라도 빼앗서 줄 수밖에 없는구조의변화를 선택한것지요.
전자의 변화는 멋지게 했는데 후자의 변화는 단순한 원리을 간과하여 어렵게 만든것 입니다.
사랑의 관점에서는 우리 고유 풍습에 결혼때 닭을 안고 등장하는데 이것이 아무의미없는것이 아닙니다.
맛있게 먹고 첫날밤을 잘 치루라는것도 아님니다. 여기에 우리 조상의 정신 문화가들어 있습니다.그 연유는 다음으로 미루겠습니다.
변화의 생각으로 세상 한 바귀을 돌아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젊은 혈기가 창궐하여 세상이 전부 내 듯대로 주무를 것같은 마음입니다.
스키피노 알렉산더 유방과 항우 잔다르크 칭기스칸 등등 10대후반에서 20대 중반에 천하을 평정한것처럼 말입니다.
저또한 젊을때 뿐더러 지금가지 쭉 잠재되어 있었는것 같은데
저 아니면 안되고 저보다 힘든일 고민 하는사람 없는것갖고 가장많이 아는것같고
저혼자만의 아집이 만들어낸 허상임을 알고는 얼마나 부끄럽던지요.
아무리 하찮은 사람일지라도 저가 도움을 주기보다 감동을 받는 경우가 더 많터라고요.
저뿐만이 아니라 보통 사람들이 이렇게 느껴서 어떤경우든 이해가 되어서인지 말수가 적어지고 허니 좋은 말 대신 나이들면 여성화된다 하고 또한 이런 분위기 때문인지 작은일에 관심이많아지고 무슨일이든 거드고 싶은 반작용대문에 이런 닉네임을 달고 있는것이 아닌가 합니다.사람의 마음속에는 왕과 신하의 일이 동시에 작동하니 참으로 컨트롤하기 쉬운 일이 아닌듯합니다.
특히 젊을때는 더욱더 하지요.
자전거을 배울때도 그렇고 운전을 해봐도 그렇고 자신의 관심분야에 집중해봐도 그렇고 모두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고
리듬이있고 주식이 오르락 내리는것처럼 생체컨디션도 그렇고 고비고비가 있는것 같습니다.
위의 전설적인 인물들이 힘으로 하는세상에서는 통했나 봅니다. 그들이 지금세상에 온다면 허우대는 멀쩡한데 격에 안맞는 일을 하는 현대의 범인들에 지나지 않았겠는가 생각해봅니다. 그 당시에 현자들이나 책사들이 그들의 후원한것처럼 그러나 현대는 이와 반대로
젊은 혈기로만 살 수없는 세상이지요.한번 오르면 내려오듯 현대는 여물고 고개을 숙여야 할 나이가 되어야 천하에 영향력을 행사하는것 이지요.사이클만 천차만별이지 시공간의 크기 차이이지 사계절 흘러가듯 누구에게나 공평한것 같습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당장 자신의 발등에서는 불평 불만들이 널려 리듬이 없는것처럼 아우성입니다.
그러나 이 또한 지진의 진폭처럼 리듬이 없을 수가 없는것이 어디 있을까요.
현자들의 사랑 은 한결같다지만 이런 흐름에 예외가 될 수있을까요?
오늘은 젊은 현지의 기질 때문에 역사 를 둘려보고 저자신을 반성하고 사람 사는 모습은 하나가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인사만 할려다가 두서없이 여기가지 쓰게되네요.정해두고 쓴것도아니고 시작해보고 들숙날쑥 럭비공튀듯이 하지만 이 또한 한 사이클을 하고 있는 모습에 어이가 없는듯합니다.
손오공이 뛰어봐야 부처님 손바닥인것처럼
주역에 관심있는 분은 이런것이 震爲雷와 관련이 있고
호랑이 인대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 처럼 어떤 상항에서도 중심을 잊어서는 안된다는 말을 경계한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변화의 과정을 어떻게 전개해야 할까요?
우리가 김치를 담그고 내가 만들었다기보다 김치가 잘익어 내게 건강을 주었다.이 김치의 중요성이 변화의 중심에 있습니다.
인간의 오만함에 자연의 배품에 감동을 먹고 자신의 틀을 깨어나가는 흐름이 세상을 바꾸어가는 촉매 역활을 하는것이 아닌가 합니다.
변화란것은 가만 생각해보면 턴잉포인트가 있는것같습니다. 뛰어난 사람이 하찮은것을 놓칠때, 멍청한사람이 기발한 즉 말도않되는것으로 사람을 놀라게 할때 처럼 말입니다.하루을 생각하면 밤낮이 바뀌는 지점이 그렇지 않을까요?
처녀총각이 시집 장가가는 때
청과류가 한여름을나고 식초로 김치로 장아치로 저장해서 겨울 봄을 날때
다양한 관점이 많이 있겠지만 이 3가지로 생각해봅시다.
서로 아무관련이 없는것 처럼 보이지만 변화라는 때을 우리에게 일러 줍니다.
酉라는 글자가 변화을 대변 해줍니다. 모양이 양기을 저장해두는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인간이 일과후 집에 들어가는 있는 모습이기도 합니다.
계절로는 가을에서 겨울로 접어드는 때지요
사람도 결혼을 해야 어른이되고 변화의 근원이 됩니다.
이래서 우리 조상님들은 자연의 순리에 적응하여 변화의 탁월성을 취하면서 살아왔습니다
이 상징 물로 닭이 꼬꼬재배에 빠지지않았지요 결혼도 이렇게 부른것도 관개가 있는듯합니다.
월래는 예식 시간도 酉시에 했다고 합니다.
인간의 의식주 생활이 모두 변화의때와 관련있고 이것을 활용한 조상의 지혜가 놀랍지않습니까?
이것은 서양도 예외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문화가달라서 즉 하루 결혼 먹고사는것은 같을지라도 방법에서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는 자연의 섭리에 따라 순응하며 살지만
그들은 먹거리가 주로 薰煙(훈연)에 의존하여 왔습니다.
저장성도 좋고 필요할때쓰는 편리성과 기능성이 뛰어납니다.
이것을 시도때도없이 약탈의 수단으로 쓰인 것이 문제입니다.
이래서 서구는 수험생이 오만짓다하고 좋은 대학나와 뻔지르한것과 같은 문화와 많이 닮아있습니다.
즉 자연친화적인 내면이 부족한것이지요
현지도 자기 중심적인 생각을 부드럽게 했으면 하는 마음입니다.변화을 위해서....
이때 또한 표리관계가 있어 卯도 살펴보면 좋지만 ....
감사합니다.
배움이 있고 의식이 중첩되고 신념이 생기고 가치관이 정립되고 철학이 쌓여 어쪄면 쓸데없는 돌덩어리로 고정관념화 되기 전에는
우리가 사는 목적이 쎅스를 하기위해 열심히살고 이것이 삶의 근원이 아닌가 생각한적도 있다.
어찌보면 이런 생각이 보다 자연스런 원초적인 발상이 아닌가 한다.동양에 성현들은 이쎅스가 만물의 근원이고 가르쳐주지도 않아도 스스로 잘하고 이런 묘한 현상은 나스스로도 알기 어렵고 모르는것이 있다.고 표현했고 이놈의 공부는 해도해도 끝이없고 안하면 몽매해지고한데 여자가 애를 키워 보지도않고 시집 장가도 연습하고 가는것도 아닌데 잘하는것을 보면 참으로 묘하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벽화 신화 전설 건축 구조물에 표현된 적날한 쎅스 묘사는 현대 포로노는 상대을 거부할 정도가 아닐까요?
이것이 모두 권력과 돈과 쎅스의 삼각관계을 형성하고
동서양 막론하고 3를 좋아하고 기독교의 삼위일체 우리는 가위 바위 보를 해도 사무세판 동서양 권력의 중심에 삼발이 솥이 있고
천지인 사상이 있고 이런 것이 서로 상호 유기적으로 작용해서 사회가 만들어지고 찌지고 뽁고 사는것이 아닌가합니다.
이또한 역사의 흐름의 관점에 따라 오히려 패쇄적으로 가는것은 아닌가도 의심해봅니다.
문자,정착화,도구화,이동수단발전,무기 전쟁,초기 산업화, 통신, 전기 ,철도, 항공,이런 혁명적인 용어의 전후해서 쎅스 권력 돈의 작용
이 새롭게 변신을 하는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이런것이 모두 인간의 쓰임과 편의에따라 임의적으로 활용되는것을 보면 지식이 오히려 인간의 삶을 퇴보시키는것은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요즘 땡볕에 좃뺑이 치고 있는데 어느듯 가을의 문턱을 알리는 전령사가 나타나 나를 약 올리는 장면을 연출합니다.
이것은 나의 미숙한 표현일 뿐 참으로 아름다운 각본없는 연출이고 시간의 흐름을 말해줍니다.
잠자리들이 오부랑이 붙어 날아 다니면서 연애를 하면서 여기져기 날아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모든것이 배워서 하기보다 스스로 알아서 해야되는데
뜻대로 않되는것이 사람이니 어쪄면 좋단 말인가?
감사합니다.
변화에는 과정이 중요한데 무시되는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과일도 무르익을때 따야 맛보는 사람들에게 찬사를 듣지요 이유야 어쩧던 전후해서 출하을 하면 미식가는 충분히 느낌이옴니다.
현지도 상태에 대한 사랑의 정도가 변화의 과정에 대단한 열정으로 나타나보입니다.
이런 일련의 과정이 실패의 무덤이란 있을 수없음을 예고하는것 같습니다.
이것은 만물의 성장과 인간의 일에서 변화의 절차 중요성에서 알 수가 있습니다.
결혼 전인데도 불구하고 많은 난관을 자신의 숙명처럼 받아들이고 해결하기란 쉬운일이 아닌데
예를 다하고 충분한 숙성의 기다림을 거치는것을 보면
자신과 주변인들의 인격이 성숙 되지않고셔야 어찌 가능 하겠습니까?
변화의 과정을 가장 잘 설명하는 澤火革괘가 있습니다.
변화란것이 진화의 과정을 격다가 완성되면 창조처럼 나타나는것을 말해줍니다.
진화의 과정는 서구의 공리주의를 닮아 있습니다.
탕왕과 문무 주공은 폭군의 섭정에 개인의 영달을 위해서 보다 백성의 안위을 위해 두세차례 바른 정치을 간해보고
불가능하다고 느낄때 백성과 그들의 추종자들의 피해를 최소화 할 수있을때 까지 기다렸으니 말입니다.
이것은 역사속에서 변화을 나타내는 혁명에 해당하는것이 즉 권력이 다양한 이유로 백성을 쥐어 짤때
참다 참다 못한 한계에 부딭칠때 즉 칠팔십프로 무르익을때 거사가 발생하는것이
주체와 기원전후의 사건만 달리 할뿐 모양은 같은꼴을 하고 있습니다.
서구는 역사의 발전과정에서 동양이 한것이 무엇인가?비아냥거리지만
다양한 모습에서 그 대안을 일찌기 제시 해주고 있습니다.
서구가 잘먹고 잘산지가 불과 이백여년 남짓한데 수천년동안 우위을 점령한 동양을 무시하는 것은
자신의 민낮을 드려내는것과 같습니다. 라이프니찌 아인쉬타인드등등 많은 석학들은 동양의 문화의 우수성에 많은 영감을 얻고 자신의 발전에 활용했습니다. 이런 뛰어난 문화을 개인인 현지도 실천해가며 살아가는데
국가가 정책을 실행하는데
일련의 과정을 생략한채 발표하는것은
아무리 좋은 정책이더라도 저항에 부딛치는것이 당연한것이지 이것을 다른 세력으로 몰아가는것은 오히려 분렬을 가속화 하는것과 같습니다.똥낀놈이 성질내듯이
스패인의 가우디가 성당을짓는데 144년이 지난는되도 아직 건축중인데
변화의 절차와 기다림의 중요성을 살펴볼 필요성이 있지않을까합니다.
감사합니다.
젊은 남녀가 역사의 한 페이지을 장식하는 의식이 동물적인 속성에서 일까? 아니면 고차원적인 이상을 품는것일까?
아니면 자신들의 장에서 콩깍지가 끼여서 일까?아니면 주어진 감정에 충실한것일까?아니면 욕망을 만족하기위한 수단일까?
쾌락을 느끼기위한 본능일까?음모에 꼬임일까? 이 것을 사랑이라고 단정 할 수있을까?
만약에 알파고에게 물어보면 어떤 분석을 해 보일까?
때로는 복잡한것보다 굴레 속에서 살고자하는 속박 받고자하는 노예 근성에 길들여져 아둔한 틀 속에 쳐넣으면 알려주는 검색어에 알려주는 단어에 의지하는 현대인 들과 알파고의 쓰임이 일치해가는 모습에 미래의 인간의 심성이 넓어질까 아니면 타성에 졌어 퇴보의 길을 걸을까? 궁금해 질 수밖에 없다.
결국은 아무리 좋은 답을 주더라도 자신이 해독하고 쓸수있는 능력에는 한계가 있기마련인지라 결국은 인간의 문제로 귀결된다.
인간이 만든 단어들에는 즉 사랑 희생 자비 동정 돈 권력 욕심 등등등 에는 이분법적인 쓰임이 항상 교차하고 역사속에서 절대적인 쓰임으로 작용하지는 않아서 즉 혼재하여 사람의 가치관에 혼란을 초래하여 가끔은 멀쩡한 사람도 빙의에 빠지곤한다.
이런경우에는 알파고는 어떤 답을 할까? 과연 저에 대한 그리움에 대한 동경을 충족할까?
그러나 그리움에 사무친 상태의 능동적인 감정이 수동적인 현지의 마음을 갈마들어 갈등의 연속 처럼 꼬이고꼬여 연리지을 자랑 스런 모습으로 나타날까?
만코 많은 단어 중에 거의 양면성이 있는데.
그리움에는 표리관계가 없는것 같다. 즉 절대적인 긍정적인 면만이 보인다.
알파고가 질문에 대한 그리움에 대한 동경의 답을 불만족하더라도 단어선택의 문제이지 그리움에 대한 부정적인 면이 될 수는없다,그리운 사람을 만나 실망을 하더라도 자신의 그리움에 대한 척도의 문제이지 그리움에 대한 불연속성을 보이는것은 아니다.
그래서 모두가 그리움의 대상이 되도록 노력하는 삶을 산다면 밝은 세상의 지름길이 아니겠는가?
위의 장면에서도 사랑이라기보가 그리움이란 말이 더 적절한 표현이 아닐까?
무엇이 그리 그리웠을꼬?
감사합니다.
더운데 고생이 많습니다.저는 현지의 활동 무대를 휴가삼아 두루 갖다왔습니다.
공주 부여 거쳐 서해쪽으로해서 보령으로해서 청양으로 넘어왔습니다.
오늘의 화두는 자기개발인데 젊을떼는 이런 마인드로 자기삶을 개척하는 것이 쉬운일이 아닙니다.
한 틀에서 즉 직장에서 이런것을 강조하는 경향이 많은데 대부분이 내부 효률을 증가하기위한 차원에서 운용되는것이 많은데
이런것도 자신을 위한것이 될수도있지요.요즘 말하는 스펙 쌓기도 되고 한데 외부적인 사회적인 이타적인 관계가지 범위을 확대하여 생각해 볼 수있습니다.현지가 부족한 사람들이 아무생각없이 사는 것에 대한 아타까운 마음이 교육자의 근원적인 자세가 묻어있는것을 알 수있습니다.
한 사람이 갈때는 한사람을 만나게되고 세사람이 갈때는 한사람을 잃어버린다. 라는 표현이
결혼을 하게 되고 자식을 낳고 성장해서는 부모품을 떠나는 내용을 품고 있습니다.
단순한 내용 갖지만 인간이 살아가는 모든 지혜가 숨어 있는지도 모름니다.
서로 상호간의 관계속에서 순리와 신뢰을 바탕으로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모습이
플라톤 시대에 명화속에 나오는 한손은 하늘을 한손은 땅을 가르키는 되서 많은 것을 암시하는것과 닮아있습니다.
자기 개발이 신뢰을 바탕으로 나오는데
저의 젊은 날은 이런것이 무족해서 지금은 더욱 갈망하지만 알면알 수록 신뢰성이 떨어지고 회의을 갖지만
다양한 차원에서 기준을 잡고 살아가려는 바람이 있습니다.
여러시 갈때는 그중에는 반드시 배울만한 사람이 있다.처럼
감사합니다.
모든 일에는 원인과 결과가 있습니다.두개의 주체가 하나의 객체로 또하나의 주체을 만들어 냅니다.
이 하나의 주체을 만들어 가는 과정을 세상사람들은 신성시하고 변화의 주역으로 노래하지않는 성현들이 없습니다.
酉가 두개의 주체가 하나의 객체의과정의 변화라면 卯는 유의 표리관계로 하나의 주체를 만드는 변화을 말합니다.
酉가 객체로 겸손의 태교와 자기 개발의 변화를 고려하면 卯라는 하나의 주체를 생산합니다.
酉가 정보을 압축하여 지혜화 한다면 卯는 이것을 풀어 쓰는 개념의 변화가
모든 사물이 나고 마쳐 종말을 하는것이 아니라 終始가 번갈아 연속성을 보여줍니다.
대부분 사람들이 자신이 아이를 낳으면 자신이 낳은것처럼 자기의 소유물인것처럼 함부로 대하는경우가 많습니다.요즘 뉴스에 나오는 4살아이 학대한 엄마처럼 말입니다.卯라는 모양에서 사물이 뚫고 나오는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더 구체적으로 세상 사람들이 자고 일어나 문을 열고 활동의 시작을 알리는 것과도 같습니다.
여기서 뚫고 나오고 문을 여는 주체는 누구이겠습니까?
부모가 아니고 문을 만든 사람이 아니라 그것을 사용해서 쓰는 아이와 문을 여는 사람이 주체가됩니다.
이런 관점이 하찮아 보이지만 그 주체을 대하는 태도에서 많은 변화가 있습니다.
자신의 소유물이 아닌데 어찌 함부로 대하겠습니까?
이런 묘유가 변화라는 모습이 하루 밤낮 처럼 같이하지만 그 이면에는 활동하고 쉬는 쓰임은 달리하고 있습니다.
이 변화의 순리에 충실히 살아가는 현지의 삶에 밝은 장이 펼쳐 나가는것이 보장되지않을까 생각해봅니다.
감사합니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처음으로 또는 익숙하지 못한 경험이 무수히 많고 무덤에 들어갈 순간까지도 엄청나게 많습니다.
그러나 사는동안 모든것에 능숙한것처럼 알아서 잘 처리하는 것으로 착각 속에서 벗어나지 못한경우가 허다 합니다.
여기서 두가지 닮은 꼴을 알아 볼까합니다.
하나는 현지의 출산을 통한 육아의 첫경험입니다.
하나는 역학에 관련된 일화 입니다.
이것이 무슨 상관관계가 성립된다는 것인지 궁금 할 수 있지요?
사람이 살아가면서 때로는 아는것이 방해가 될때가 많이 있습니다.즉 경험으로 축적되지않는 섯투른 지식과 아집으로 굳어진 자신만의 잘 못된 습관이 일을 순조롭게 해결 하기 어려울때가 많습니다.이것이 육아든 직장 생활이든 단순 노동이든 고차원 정신노동이든 똑같이 통하고 누구나 경험하고 느끼고 뉘우치고 그러면서 똑같은 잘 못을 반복하고 잊어먹고 그러면서 살아갑니다. 한 분야에 일에 대하여 메뉴얼이 주어지면 이것은 수많은 사람이 수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여 피드펙을 거듭하며 수정하고 만들어 진것입니다.단순한 예을 한가지 들어 보겠습니다.
구멍가게 수준의 돈까스가게에서 만들어진 메뉴얼이라고 해봅시다.인류 호텔 돈가스가 이것을 보고 무시하고 코빵귀나뀌는 허세가 대부분입니다.일반인들은 이해가 안될지도모름니다. 그러나 자신의 분야에서 전문가 수준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수있습니다.
왜야하면 구조적인 틀에서 시간과 재료 경험 속에서 많은 이해 관계가 산재해 있기 때문입니다.
일류호텔 돈가스가 최고라고 고집하기보다 즉 자신이 최고의 실력자라 하더라도 구멍가게 돈가스을 만들때는 그 주어진 메뉴얼보다 효률적인 방법이 없다는것을 깨우칠때가 진정한 실력자인것입니다. 이것은 모든 분야에 갈등의 조짐이 있는 곳에서 세겨 보아야 될것이 아닌가 봅니다.이것은 육아나 역학도 똑같은 전철을 합니다.
육아나 역학도 일류호텔 돈가스처럼 똥폼잡고 허세을 부리고 구멍가게 돈가스을 모르면 전문가라기보다 때로는 초보자보다 못할경우가 허다합니다.즉 빌딩만 짓다가 원룸을 지으면 무너 질것같고 양심상 그런 집을 못짓는 경우와도 비슷합니다.
역이란것도 이런 메뉴얼처럼 자신만의 메뉴얼로 이 세상 만사를 바라보는것과 같습니다.
사람들은 이것을 경계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여기서 선생님이지만 육아도 초보고 아이도 나오느라 힘들었고 아이가 스스로 잘안나오면 우리가 하수구 막히면 뚫듯이 아이 머리에 그것을 흡착해서 당겨 냅니다.아이는 어른과 달라서 이부분이 부드러워 빵반죽 늘어나듯 합니다.
경계해야할 역학도 분위기 전환이 가능할 수도 있지요.
이 두가지가 시간이 지나고 문제점을 스스로 해결하고 익 숙해지고 정성이 들어가서 덕분에 덕분에 긍정적인 마인드로 변화해서 좋은 결과을 만든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