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철학

작은 생각

土談 2016. 6. 22. 20:15

과거에는 선생님이 되는 길이 여러 경우가 많았는데 현지는 정 코스를 밟았네요.
박정희 대통령 같은 경우도 있고
소사하다가 가르치는 경우도 있었고
임시 고시을 통해서 되는 경우도 있었고
빽으로 되는경우도 있었지요.
그리고 계보를 잊어간다는 것이 아무것도 아닐 수도 있겠지만 동서양에서도 중요한 의식중에 하나입니다.
서양에서는 이런 것에 프리한것 갖지만 동양권보다 더 철저하고 강하게 작용합니다.
자신이 실권을 갖더라도 왕을 패위하는 경우는 아 주 드물고 이것에 사회 계약설로 작용하여 그들의 중요한 문화로 의식 구조로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동양권에서는 이런 의식이 더 철저해서 안 그럴것갖지만 대부분이 갈어 치웠고 이래서 인지 사회가 혼란하고 불신이 팽배하고 문화가 퇴보하는 분기점으로도 생각해 불 수있는 속성을 도출해 낼 수도 있을것갖습니다.
이런 것을 이해 할 정도면 업둥인지 뭣인지도 아무것도 아니겠지만 어린 마음에 자신의 이해 관계에서 불리한 작용을 생각하면 탐닥한 일언 아닌가 합니다만 현지는 자신의 목표가 뚜렸하여 이런 것은 자신이 할 일에 우선 순위가 밀리지않았는가 봅니다.
사연이 많은 선생을 소개 하겠습니다.
육관 손석우하면 대부분이 알겠지만
이분은 강원도 골짜기에서 하도 못살아 남의집 머슴을 하면서 학교도 못다니고 그러나 총기는 있어서 남의 책을 빌려서 읽어
우째우재 선생이 되었습니다.625가 터져 군대에 입영을해 스타덤에 올랐습니다.옜날에는 정보가 부족한때라 이야기꾼이 제일 인기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장교로 재대을 하고 강원도 유지 반열에 끼이게 되었습니다. 박정희가 미는 사람이 따로 있는데 자신이 이것을 거부하고 민의원에 도전하다 떨어져 하루 아침에 쫄당 망해서 태백산에 죽으로 갖다가 멧날 매칠을 굴어 죽기직전에 회생하여 그 길로 도사의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서울 강남 개발때 이장 문제가 불거져 이때 메스컴에서 육관을 불러 테스트을 했습니다. 매스컴에서는 부정적인 의도가 강했지만 여러 지기의형태을 정확이 읽고 집어서 기획한자들을 놀라게해 다시 일확 스타가 되었습니다.박대통령 서거시 지창용에게 밀려 장례절차에 참여 못하고 그 후대에 대통령들의 일을 봐 주었습니다.
풍수는 그 자리의 주인이 있는데 억지로 만들어서인지 부귀영화의 맛은 보았지만 생각보다 일찌기 죽은 것이 이런 연유가 작용한것이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쓸데 없는 애기 일 수도 있지만 스토리 텔링의 소재로서 작용하는 재미로 볼 수도 있고 선생님에 관한 내용이 나와 현지와 동시대의 특별한 이력을 가진 분을 소개합니다.

 

가끔은 이런 생각도 해봅니다.
사람도 다시 한번 살아 볼 수 만 있다면 아니면 50년에 한번 씩 모든 것을 내려 놓고 3년을 유배아닌 유배을 보내어 살게 한다면 이 사회가 어떤 변화가 생겨 날까 대단히 궁금하다.
왜야하면 사람은 자신이 격어보고 당해 보지 않으면 그것을 이해 못하기보다 더 그 자체를 터부시 하는 경향이 있다.단순한 예로 단추가 떨어졌다 하면 실과 바늘이 필수고 자신이 안달아보면 이해하기 어렵다. 실과 바늘 없이는 아무리 부귀영화와 최첨단 두뇌를 가져도 할 수없는 이것이다.즉 지상의 돈과 과학을 모두 동원하더리도 하찮은 풀 한 포기 만들 수없어도 파멸은 찰라에 불과 하다. 동식물들도 자신의 활동 영역을 표시하고 이 지상에서 다양한 변화에 적응하며 멸종하지않고 살아가는 모습을 느낄 수있다.크게는 모든 종교도 단추을 달기위한 실과 바늘처럼 도구을 가지고 살아 남기위한 애간장을 태우지않고서는 영속성을 유지하기 어렵다.하물며 사람인들 여기서 벗어 날 수있단 말인가?
사람에게 돈 권력 섹스 는 단추을 달기위한 실과 바늘이고 종교의 도구와도 같다.
이것의 공통점은 영속성에 있다. 이것을 반대하는 사람도 있을 수있지만 역사의 흐름 속에서 보더라도 부정할 수없는 입장이다.한 가족이라도 각 개체는 자신의 삶이고 서로가 이해하며 살아가는 교과서적인 시각일뿐 어쪄면 전 봇대로 잇빨 쑤시는 것보다 어렵다는 것을 느낄때가 많다.현지 부 모 업둥이 모두 자신의 모습되로 살아가고 부모가 현지가 판사가 되길 바란다고 할 수 없는 것이고 부모도 그 시대의 환경과 동식물의 속성에 충실하고져 했던 항변이 있을 수도 있지 않을까?
처녀가 아를 배도 할 말이 있고 이유없는 무덤이 없다는 말에서 서로의 입장 차이를 알 수 있지않을까요?
정도를 추구하지만 때로는 그렇지않을때 새로운 발명이 나오듯이
현지의 가족도 이런 틀에서 서로의 안목의 차이가 긍정의 효과을 가져 오지않을까요?

사람이 살아가는 대부분의 모습에서 안과밖을 꺼내서 판단 하고푼데 쉬운일 일이 아닙니다.
선과 악이 공존 할 수밖에 없는 한계처럼 말입니다.
덕를 아무리 강조해도 법없이는 사회가 존재하기 어려운 것 처럼
종교가 세계 질서을 유지한다고 믿는 분이 적은것처럼
선 덕 종교가 아무리 좋아도 우선 순위에 밀리듯이
현지는 좋은 것이 어디 한 두가지가 아니지만 선생님이 되겠다는 신념에 우선 순위에 밀리듯
아부지에 대한 분개도 그 그늘을 벗어날 수없는것이 일상 사람 사는 모습이 아닐까요?
이런 것이 전쟁의 보이지않는 속성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사랑이란 쉬운것 갖지만 오리무중이고 사람 얼 굴 다르듯 자신의 굴레에 판단하게 되어 보편성를 가지는것도 어렵습니다.
그리스신화의 강요에의한 사랑 3대 비극작가 아이스 길로스 소포그레스 에우리피데스의 3류 소설구조에 인간의 고뇌와 희망에서 사랑의 가치를 찾고
이것을 모테로 그 시대의 흐름를 재해석하여 다양한 무대와 글로서 많은 분들이 표현하고 그 중에 3부류의 사랑이 중심에 있다.
부귀을 가진자의 그 것으로 인한 불합리한 사랑부터 술집 잡부의 기구한 소설보다 더 소설같은 사랑이 있는데
어디 누가 사랑이 이런것인가 단언 할 수있겠는가?

개별적인 사랑이 있겠지만 보편적인 사랑도 있지않겠는가
대상에 지극히 최선을 다하는것이 사랑이라고 하면 원론도 보편성도 없겠는가?
이것이 좋아하는것과 사랑하는것과 구분하는 분기점이 아니겠는가?
좋아하는것은 무임승차 기분이드는 반면에 사랑하는것은 노력없이는 이루기 어려운 면이 이해을 돕고
고양이가 쥐를 좋아하지만 사랑하지않는다.처럼 사랑도 기술이 필요할까?
에릭포럼의 사랑의 기술의 중요성을 습관처럼 경험과 다양한 테크닉의 노력을 강조합니다.
동양권에서는 이런것을 들어 내놓고 논의하는 것이 정서에 꺼리는것처럼하기 때문에
여러면에서 부족한것이 많은 것이 사실입니다. 여기서 한 통의 편지에서도 삼자가 서로 배려하는 관점에서 테크닉이 부족하고 그 시대의 배경을 읽을 수있을것 같습니다.
고기도 많이 먹어본 사람이 잘 먹듯이
선거도 많이 해보고 어릴때부터 습관을 들이는것이 공정성에 도움을 주듯이
사랑도 개인이 모두 접할 수도 없고 막연한 허구 같은 기분도 들고 복잡하지만
주변인과 책을 통해서라도 간접 경험의 중요성을 새삼 다시 느끼게 합니다.많이 안다고 잘하는 것도 아니겠지만 모르는것 보다는 낫겠지요?
저스스로도 이런것에 미숙한것은 마찬 가지니까요?
감사합니다.

 

가난과 질병과 사랑과 목표가 삶에 많은 영향을 주는데 이것을 해쳐나가는 지혜와 용기를 어떻게 알 수있을까?
여러 가지 질곡에 고뇌와 번뇌로 철학적 질문들이 막 쏟아져 자신의 성찰을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론에서 방법을 찾아보자.
아우구스티누스는 어려서는 학교적응도 힘들었고 부모의 배려로 마케도니아 도시로와 부량한 삶으로 미혼부가 되고 혼잡한 삶을 해결하고자 키케로의 수사학을 사숙하고 배워 서서히 마케도니아에서 로마로 교황청 수사학선생으로 우여곡절로 반목과 대립 끝에 승승장구한다

수사학의 계보는 소크, 플라, 아이스토,키케로 아우구스티누스로 대중을 설득하는 즉 말잘하는 훈련받는것인데.
말을 만이하면 말에대한 책임도 있어 삶에 고뇌를 거듭하지 않으면 안되는 구조을 하고 있어
시대적인 배경도 그리스 가 주변국 약탈로 먹고살다가 이제 더 할곳이 없고 기대 심리도 올라가고 재정도 부족해 용병들 관리도 안되고 이런 구조가 현대 그리스 관광 재정 다수 제조기반 약화 복지 증대 노령화와 닮아 있다.
이런 상황에서 아우구스티누스는 믿음의 진정성 선과악 근원을 조명하므로 그리스의 불합리한 혼란을 구하고져 혼신의 노력으로 거듭 고뇌하는 모습과 이 젊은이들의 마음 한 구석에 자신만의 씨알을 품고 한숨으로 표현 모습과 닮은 꼴을 하지는 않는가?
이런 시공을 초월하여 삶에 모양은 달라도 같은 고민을 하듯 한데
동서양 심오한 생각들은 언어만 달리 할 뿐 보는 관점의 근원은 하나라는것을 알 수있다.
사람 사는 일이니까?
이 당시 유럽은 각각 독립된 국가로 형성되어가지만 실제는 교황을 중심으로 유럽 연방체형식을 취하고 있었는데 12세기 몽골의 침입당시 교황과 칸의 서신으로 짐작할 수있다.영국은 백년전쟁의 패배와 이에 대한 책임소재로 왕권다툼이 일어나 30년 전쟁으로 체력 소진으로 이것을 벗어나기위해 교황의 그늘을 벗어나고자 교황의 제정과 땅을 약탈하고 이땅에다가 목화 산업을 일으켜 가장 먼저 패권국가에 진입하게된다.여기서 중요한것은 부동산은 재산에 불과한데 이곳에 부가 가치을 높이면 국가 입장에서는 재정확충이 늘어나기때문이다.미국의 연방도 유럽이 모델이고 남북전쟁으로 부동산은 같은데 노예해방 동부산업이 부가되어 재정이 풍부해지는것과 같은 맥락을 하고있다.쉽게 보면 재산세 수입보다는 소득세 수입이 원천적으로 재정에 더 도움이 된다는것이다.영국이 이번에 이유을 탈태한것도 이와 같은 이유에서 일것이다.치고 빠지기와 다름이 없다.
모두 돈의 원리에 움직이고 인권이니 기타응등등은 허구에 지나지않는다.
5대 부국 의 환경 파괴 자원에너지을 일 프로만 줄여도 지상에 굴머죽고 난민으로 떠도 일이 없어 질것인데 구호에 불과한것은 아이러니한 일이다.
이 젊음이도 주어진 난관을 어떻게 극복할까

 

동요나 동시 동화에는 단순하지만 그속에는 심오한 교훈이 함께하고 있어서 한편으로도 세상여행을 다하고 다닐 수있어 참 좋은데
잘 읽혀지지는 않습니다.그래서 때때로 읽어보면 더욱 정감이 갑니다.
지난 날 다리을 다쳐 병원에 있을때 동화 책을 읽을때가 떠오름니다.
하나는 무슨 변화의 원리 와 동화책 두권을 읽으며 보낸적이 있는데
전자는 한 페지을 읽으면 하루 아니 몇날 며칠을 생각해야 감이오고
후자는 한시간읽으면 하루 아니 며칠을 즐길 수있었습니다. 옆자리에는 평생을 선생을 하고 정년이 넘으신 분이 있었습니다.
몇일이 지나면서 그분의 이미지와 행동으로 그분이 살아오신 흐름이 스캔되지요.
재산 분란이 뉴스에 나와서 그분의 스캔에 대입하여 예기를 했지요
요즘 어른 들이 끝끼지 움켜 잡고 있어 분란이 많이 일어 납니다.허니 움찔 하면서 선생님처럼 젊은 놈이 의외로 생각이 깊구나 싶었는지 학도병 으로 전쟁에 참여한것 부터 개발 정보로 돈 방석에 안을뻔 했던것과 지금은 장노(쭉 노는 사람)을 하고 있다는 것 까지 많은 예기도나누고 장기도 즐긴적이 있습니다.
태원 할때 까지 선생을 했다는 애기을 안하길래 저가 물어봤지요 야 보통이 넘네! 한달이 넘어도 자제분들이 안오고 의사 선생님이 몇번이고 권하니 3분이 찾아 오더군요
그래서 내가 읽던 동화책을 심심하면 읽어 보라고 권했습니다. 볼택이 없었습니다.
왜 내보고 이런 쓸데없이 책을 읽어 보라는지 대 묻더군요. 그냥 심심할까봐 하고 넘어 갔습니다.
또 앞자리에 새로온 환자가 있었습니다.일을 많이 해서인지 허리가 아파서 왔습니다. 기골이 장대하고 장군 감이란 표현이 맞을것 입니다.먹을거리 애기가나와서 족발이 앞다리에 살이많은지 뒷다리에 많은지 싸움이 붇었습니다.
저는 앞다리 그분은 뒷다리 서로 주장을 안굽히니 그분이 어디 뻔데기 앞에서 주름 잡ㅂㅂㅂ아 하는 표정으로 즉 기도 안찮다는 것이지요.나중에 안 일인데 옆에 사람이 저인데 살짝언지을 주더라고요.그분이 평생을 소 돼지 잡는 일을 했다고 하더군요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질 때도 있겠지요 하고 말었지요.
이런 우화 같은 사건에 맞는 동화가 있을텐데 모르겠습니다.
사실은 책읽는것을 싫어하거든요 눈도침침하고
여기 다른 분들도 자신의 경험담을 늘어놓으면 다른 세상을 많이 볼텐데
이런 쓸데없는 애기가 비싼책 또는 고상한 고전 보다 훨씬 가치가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어리석기 짝이없겠지만

 

초심이 난간을 극복하고 사회의 불의한 장벽을 부드럽게 만들었는지 아니면 철웅을 굳건히 하는데 일조을 했는지가 말년에 모든 역사가 평가하고 있습니다. 이런의미에서 그리스 신화에 최고의 악녀로 그러진 메데이아와 안티고뇌을 살펴볼까합니다.두분다 여자이고요
메데이아는 현지님이 꿈을 키우던 시대적인 배경에서 여자들이격은 숫한 수난사를 안티고뇌에서는 불합리한 구조에 동조하기 보다는 즉 편승해서 잘먹고 잘살기 보다는 저항에 부딛쳐 새로운 무대를 열어가는 열망이 아직까지 잊지않고 전해지는 비결이아닌가 합니다.이 두작 품도 시대와 보는 자의 시각에따라 양면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메데이아는 우리가 산업사회로 진입할때 한여자가 공순이를 하면서 죽자살자 일하면서 벌어서 남자 친구를 뒷바라지하면서 온갖 고생다해서 판 검사를 만들어 놓았더니만 그넘의 세계에서는 그들만의 리그가 벌어져 배경과 그넘의 돈이 없으면 출세을 하기어렵다는 정설로 굳어진지라 조강지쳐를 헌 신짝벌이듯 수체구멍에 쳐박고 쓰레기 같은 부귀한 딸년가 붇어먹고 자식세끼 두었것만 내일이 아니듯 차벌였으니 어느 년인들 한을 품지 않겠는가? 두 부녀(부귀)을 불살라 죽이고 자신의 세끼도 죽이고 잘난 놈은 제정신으로 살수없게 만들어 박 수치는 팬과 독한년이라는 평가가 엇갈리고 있다.
안티고뇌는 현지가 아부지에 대한 분노 군사정부에 대해 민주화의 열망 사회의 고정관념 철페 코페니쿠스의 지동설 주장 소크라테스의 악법도법이다. 사마천의 대변 안중근의 저항과 등등등 닮은 모습을 하고 있다.
구체적인 내용은 이자뿌랬고 그리스 시대에 장례절차로 시신을 묻어주는 것을 아주 중시하는 풍습이 통례인데
어부지리로 왕에 복귀한 크레온이 자신의 그늘을 가리려 강하게 법제정하고 시신을 묻어주는자는 처형하겠다는것을 공포하지만 안티고뇌는 끝까지 시신을 동물과 새들이 뜯어먹는것을 보호하고 묻어주는 내용입니다.
동양의 장례절차가 예의 중심에 있는데 서양에서는 이 보다 더하 다는것을 알고 내가 문가 잘못 알고 있는것은 아닌가? 의아해 한적이 있습니다.
동서양은 알면 알 수록 빙산을 보는것과 같습니다.
빙산과 바다에 잠겨있는 부분 이 서로 표리관계을 번갈아가며 변화을 이루는것이 신기 할 뿐인데 속좁은 인간이 보이지않는 부분은 생략한체 단면을 주장하고 고정관념으로 굳어지니 편협된 세상으로 분란이 늘어나는것이 아닌가합니다.
이 소설의 젊은 인물들도 폭넓은 시야로 새로운 세계를 바라보라는 의미에서 두루 살펴 보았습니다.
설령 돈키호테처럼 허당이 될지라도 무모한 공자가 되는것을 두려워 하지말고 배 부른 돼지는 영속성이 없다는것을 잊지말았으면
하는 바람에서......
감사합니다.

 

종교,역학,엄한교습은 공통점이 있습니다.마음에 혼란 불안에 돌파구의 역활로 자심의 심리를 조률하는 방법으로 인간이면 누구나 격어보고 모방해보고 결과에따라 반복 학습효과를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본능적으로 나오는 것이 일반적입니다.사소한 다툼에 큰소리 치고 본다든지 작은 접촉 사고시 다짜고짜 불뚝 언성을 높이다든지 상하관계에서 수족 부리듯하고 택도 아닌일을 시킨다든지 권력 관계에서 둘로 나누는 경우가 없듯이 자신이 아닌 탈을 쓰고 행동 할때가 많습니다.이것은 때에따라 알만한 사람은 알고도 측은 한 측면에서 그냥넘어가지만 앞뒤 분간이 잘안되는 사람에게는 그들의 의도에 휘말리게 됩니다.정략적으로 쓰는 경우 도 허다합니다.나쁜 버릇이지만 타인의 의도에 부응하기 위해 쓸데없는 짓을 할때도 즉 사냥개 역활에서 독한 놈이 지요.
이성계가 자신이 왕을 할뜻은 없었지만 저질러놓은 일을 수습하기위해서 아니 죽지않기위해서 혁명을 할 수밖에 없었지요.
동양권에서 자고 일어나니까? 왕이 되어있더라.의도적으로 어린왕 무능한 왕을 교사하고 남편을 죽이고 아들을 죽이고 왕이 되고 싶은게 권력의 속성이 아닌가합니다. 바름의 정치가 이윤과 주공의 예에서 휼륭한 표본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혼란이 반복되는것이 이상합니다.그러나 역사는 그들의 과오를 구분하여 탁월함과 쓰레기을 구분하니까. 세상은 공평한것이 아닌가합니다. 서양에서는 중세 내내 왕 귀족 시민 서로가 견제하고 이용하고 연합하고 서로 상승발전하는것이아니라 투견장에 견공들의 싸움을 방불케하는것을 즐거움으로 사는것은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결국에는 이러한 불합리한 점들이 지나가고 큰 틀에서는 역사가 발전하는것이 공평함을 제공하는것 같습니다.영국의 크롬웰 같은 경우도 찰스1세가 존슨의 마그나카르타와 같은 선례가 있습에도 불구하고 자즌 내전과 혼란으로 제정이 궁핍해지자 과도한것을 주변에 요구하고 착취하려하니 크롬웰이 철기군을 앞세워 왕권과 입법기관을 장악하고 토지분배 정책을 쓰니 기존 기득권 세력의 반격이 무서워 살기위해서 독제로 공포정치을 하게 되는것도 인간이면 생길 수밖에 없는 불안한 마음의 돌파구로 작용한것은 아닌가 추론해봅니다.
이런것은 개인 동서양 관계없이 모양만 다르지 그 속성은 하나임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이래서 쥐도 막다른 곳에서는 고양이을 묻다고하고
기원전 2000년경 병법서들이 한결같이 퇴로를 열어두고 공격하라한것 같습니다.
강도의 얼굴을 보지말고 이불을 덥어쓰라
바늘 도독이 소도둑된다.
거짓말을 하면 할 수록 더 큰거짓말을 만든다.
이런 맥락에서는 시공을 초월하는것같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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