君子坦蕩蕩하고 小人長戚戚하니라
군자의 坦蕩蕩은 深淵(심연)에 임하고 薄氷(박빙)을 밟는 듯이 戒愼恐懼(계신공구)하는 자세에서 우러나온다.
長은 항상, 늘이란 뜻이다. 戚戚(척척)은 근심하는 상태를 나타내는 첩어다. 부귀에 汲汲(급급)하고 가난에 戚戚하는 것을 아우른다. 長戚戚은 영구히 마음속 근심이 떠나지 않음을 말한다. 소인은 외물에 휘둘리고 命의 존재를 모르기 때문에 마음이 늘 불안하다. 戒愼恐懼하기에 조심조심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自主性이 없기 때문에 불안해한다.
마음으로 즉 수행으로만 가능할까?
선현들이나 지금이나 재물의 궁핍함의 피해도 강조되는 경우가 많으니까?
恭而無禮則勞에서 恭은 恭遜(공손)이란 뜻이다. 勞는 勞苦(노고)나 不安(불안)으로 풀이한다. 而는 앞말의 흐름을 역전시켜 ∼하되 ∼하다로 이어준다. 則은 원인, 조건의 구와 결과의 구를 묶어준다. 같은 짜임의 구가 이어지므로 아래 세 구문도 첫 구와 같은 식으로 풀이하면 된다. 愼而無禮則사에서 愼은 愼重(신중), 사(사·시)는 畏懼(외구)나 不怡(불이·기쁘지 않음)의 뜻이다. 정약용은 예에 맞지 않고 지나치게 조심하면 안색이 언짢게 된다는 뜻으로 보았다. 勇而無禮則亂에서 勇은 勇猛(용맹), 亂은 亂暴(난폭)이나 紊亂(문란)이다. 直而無禮則絞에서 直은 剛直(강직), 絞는 急切(급절)이나 迫切(박절)이다.
啓予足하며 啓予手하라. 詩云, 戰戰兢兢하여
如臨深淵하며 如履薄氷이라 하니
而今而後에야 吾知免夫로다, 小子여!
‘논어’ 泰伯(태백)편에 보면 曾子(증자)가 병이 들자 제자들을 불러 위와 같이 말했다. ‘孝經(효경)’에 보면 공자는 증자에게 ‘신체는 부모에게서 받았으므로 감히 훼손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증자는 가르침을 잊지 않고, 임종 때 제자들에게 자기 몸을 살피게 했다.
啓는 열어젖힌다는 말이다. 予는 ‘나의’로, 나 吾와 구별된다. 詩는 ‘시경’의 小雅(소아) 小旻(소민)편이다. 戰戰兢兢(전전긍긍)은 두려워하고 조심하는 모습이다. 如臨深淵(여림심연)은 깊은 못에 임해 떨어지지 않을까 조심하듯 한다는 말이다. 如履薄氷(여리박빙)은 얇은 얼음을 밟아 꺼지지 않을까 조심하듯 한다는 말이다. 而今而後(이금이후)의 而今은 ‘바로 지금’이고, 而後는 以後와 같다. 吾知免夫(오지면부)는 내가 형벌이나 사고로 몸이 毁傷(훼상)됨을 면했다는 사실을 잘 알았다는 뜻이다. 夫는 감탄의 어조를 나타낸다. 小子는 門人들을 부르는 말이다.
조심하고 심신을 바로하려는것을 경계하라는 취지에서는 좋으나
현대에도 먹고 살기위하여 심신을 무리하게 사용하여 병들고 명을 단축하는 것이 많다.
과거에는 말할것도 없을것이 아닌가?평균 수명도 형편없었을텐데.
또한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전쟁에 의한 상처들도 엄청 날것이다.
효의 입장에서 부모에 걱정을 끼치지 않는다는 입장에서는 최상일지라도
그 당시 누구나 인식할 수있었던 백성의 아픈 상처을 불효로 규정 할 수있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
위정자을 위한 다 하지만 건강과 몸에관한 입장에서는 너 나 할것이 따로 있겠는가?
서로 말로 다 못할 마음의 짐을 갖고 있었을 것이다.
나서 죽을때까지 정상적으로 살 수있는것이 불가능한 시대에서는 단편적인 입장에서는
이해가 가지만 하늘로 여기는 백성의 마음을 다스리는 것은 말에 불과 것일 수있다는 생각이 든다.
어떤 명제든 과거와현재 입장에서 조명해보는 재미도 있다고본다. 쓸데없는 일일지라도.
논어는 덜한데 맹자는 상대방의 변론은 무시하고 일방적인 주장이 많음을 느낄때가 많다.
鳥之將死에 其鳴也哀하고 人之將死에 其言也善이니라
‘논어’ 泰伯(태백)편에 曾子(증자)가 위독해지자 魯(노)나라 가신 孟敬子(맹경자)가 위문을 간 이야기가 나온다. 증자는 위의 옛말을 끌어온 뒤 그에게 格言을 남겼다. 우리 선인은 죽을 각오를 하고 上疏(상소)할 때 위의 말을 흔히 인용했다. 將은 장차 ∼하려 한다는 뜻이다. 其鳴也哀와 其言也善의 也는 ‘∼으로 말하면’이라는 식으로 어떤 사안을 주제화하는 어조사다. 풀이할 때는 흔히 주격조사 ‘∼가’나 ‘∼이’를 이용한다.
君子는 終始(종시)를 삼가서 마지막까지 흔들리지 않기 때문에 令終(영종)의 말을 한다고 했다. 令終은 考終命(고종명)이라고도 하며, 아름다운 臨終(임종), 편안한 죽음을 말한다. 자기완성을 위해 부단히 노력하는 사람은 임종 때에도 正道를 지키고 명백한 교훈을 남기는 것을 잊지 않는다. 그 교훈을 善言이라고 한다.
예나 지금이나 느끼는 일반적인 현상이 아닌가 한다.
아무리 악하고 삐뚤어진 삶을 산 자라도 죽을때는 지난 날의 행위에 부끄러움을 뉘우치고,
상대적으로 부귀영화을 산자들이 욕심을 버리지못하고 끝내 죽음을 아까워하며 가는경우가 많다.
三貴(容貌. 正顔色.辭氣)와 九容(예기’에서는 足(족) 手(수) 目(목) 口(구) 聲(성) 頭(두) 氣(기) 立(립) 色(색)에서 지녀야 할 자세)은 行動擧止(행동거지)를 일일이 檢束(검속)해서 硬直(경직)된 태도를 지으라는 것은 아니다. 자기 성찰의 敬虔(경건)한 자세를 잊지 말라는 가르침이다.
발은 무겁게, 손은 공손하게, 눈은 단정하게, 입은 그친 듯하게, 소리는 고요하게, 머리는 곧게, 기운은 엄숙하게, 선 모양은 덕스럽게, 안색은 장중하게 가지라고 했다.
이런 모습이 어떤 형상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