仁者는 必有勇이어니와 勇者는 不必有仁이니라.
봉건 조정의 신하가 時政(시정)의 잘잘못을 따져 直諫(직간)해서 그릇된 일을 반드시 바로잡고야 말았던 것도 이런 용기에 속한다. 맨손으로 범을 때려잡고 맨몸으로 큰 강을 건너는 용기를 血氣之勇(혈기지용)이라 한다. 혈기지용만 지닌 사람은 용기 때문에 죽더라도 후회하지 않지만 仁者라고는 할 수 없다.
仁者之勇은 선을 좋아하고 악을 미워하는 好善惡惡(호선오악)에서도 살필 수 있다.
우리가 수학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인자가 반드시 용기가 있다는것은 인(대)안에 용(소)가 포함하고 있다면
용자는 인하지만(작은 만큼) 이것을 제외한 인의(대)만큼은 규모가 작다는 의미가 성립된다.
그런데 반드시 인이 없다는 것은 논리상 하자가 있어 보인다.
예(예)는 夏(하)나라 때 有窮國(유궁국)의 군주로, 열 개의 태양이 나타나자 활로 아홉 개를 쏘아 떨어뜨렸다고 한다. 하나라 相(상)의 왕위를 빼앗았으나 寒착(한착)에게 살해됐다. 한착의 아들 &(오)는 땅 위에서 배를 끌 만큼 힘이 셌는데 제후가 됐다가 相의 아들 少康(소강)이 나라를 찾은 뒤 죽임을 당했다. 不得其死는 非命(비명)에 죽었다는 뜻이다. 不得其死然으로 끊어, 죽음의 자연스러움을 못 얻었다고 풀이하기도 한다.
禹는 부친 곤(곤)의 뒤를 이어 治水(치수)를 맡아 洪水(홍수) 조절에 성공했다. 舜(순) 임금의 禪讓(선양)을 받았지만 舜 임금이 죽자 그 아들에게 양위했는데 백성이 자기를 따르자 천자가 되고 夏나라의 시조가 되었다. 稷은 舜 임금 때 농사를 맡은 后稷(후직)으로, 周(주)나라의 시조가 되었다. 다른 章에서도 공자는 ‘천리마는 힘이 아니라 덕 때문에 칭송한다’고 하여 尙德을 강조했다. 오늘날에는 덕보다도 재력, 권력, 인맥을 더 중시하는 것 같다. 고전의 가르침에서 너무 멀어지지 않으면 좋겠다.
요즘도 우직처럼 농사를 짓고도 천하를 얻을 수 있을까?
공자가 ‘논어’ ‘憲問(헌문)’의 이 章에서 君子 및 小人과 仁者의 관계를 논한 이후, 어떤 이는 仁을 心德(심덕)이나 天理(천리)로 대체했다. 또 어떤 이는 군자와 소인은 지위를 말하고 仁은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일이라고 풀었다. 하지만 정약용은 仁이란 어버이에게 효도하고 임금에게 충성하며 남들을 사랑하는 구체적 人倫(인륜)을 의미한다고 보았다.
仁은 心德이나 天理로도,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일로도, 구체적 인륜으로도 풀이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군자이면서 어질지 못한 사람이 있을 수 있다’는 말이 주제화하는 내용이다. 이 말은 현상을 지적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다. 이 말은 仁에 뜻을 둔 君子로 하여금 仁의 영역에 여전히 이르지 못했음을 자각하고 發奮(발분)하라는 뜻이리라. 小人과 달리 덕을 닦는다는 자부심이 君子를 仁의 영역에 이르지 못하도록 방해하기 마련이며, 君子는 그 사실을 수시로 자각한다. 공자는 그 자각의 빛을 끄지 말고 매 순간 勤愼(근신)하라고 촉구한 듯하다.
‘군자이면서 어질지 못한 사람이 있을 수 있다’는 말이 군자가 인자와 같지 않느다면
인자보다 군자의 개념이 훨씬 크다는 말인데
仁은 心德이나 天理로도,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일로도, 구체적 인륜으로도 풀이할 수 있다.
는 인의 개념으로 본다면 군자는 사차원의 인간이 아니고서는 가능 하겠는가?
모두 개념이 추상적이고 논리적이지 못한점이 있는것 같다.
왜 소인이라고 인을 품고 있지 않겠느가?
앞에서 인과 용의 문제 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