士而懷居면 不足以爲士矣니라
선비이면서 편안한 처지에 연연한다면 선비일 수가 없다.
공자는 선비가 지녀야 할 지향의식에 대해 간접적으로 말했다. 懷居는 현재 安住(안주)하고 있는 마을, 가정, 지위에 戀戀(연연)하는 모습을 말한다.
마음은 이해해도 행동은 어려운 것이 세상을 초탈한 수행이 어디 쉬운 일인가?
인간이 나이가 들 수록 자기 중심적으로 사고하고 행동하는것이 습관화 되어 있다.
이것을 懷居하는 모습 일텐데?
아무리 부처라도 남의 씨을 보면 돌아 았는다.는 말이
마음을 내려 놓는다는 것이 힘든 일이다.처럼
가면은 평심,얼굴은 욕심이 보통 사람들의 심정인데
아무리 좋은 말이라도 쓰임이 없으면 먹통이고,
보통 사람의 심정이 상통이고
어떤 처지을 게의치 않는것은 불통이 아니겠는가?
아무리 성현이라도 이런 세상을 보고도 덤덤 할 수 있을까?
자포자기라면 모를까?
邦有道엔 危言危行하고 邦無道엔 危行言孫이니라.
현실의 상황에 따라 적절하게 처신하는 일을 危遜(위손)의 도리라고 한다. ‘논어’ ‘憲問(헌문)’의 이 章에서 나온 말이다. 여기서 공자는 선비가 治世(치세)와 亂世(난세)에 각각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에 대해 말했다. 邦有道는 治世, 邦無道는 亂世를 뜻한다. 危言危行의 危는 높고 바르다는 뜻의 高峻(고준)과 통한다. 세속을 따르지 않고 소신껏 한다는 뜻이다. 言孫의 孫은 遜(손)과 같고 順(순)과 통한다. 해악을 멀리 하려고 말을 공손하게 한다는 뜻이다.
중용’에서는 이렇게 말했다. “행동이란 높게 행하지 않을 때가 없으니, 나라에 도가 있어 벼슬하면 곤궁할 때의 절개를 변하지 않고, 나라에 도가 없으면 죽음에 이르도록 자기의 지킬 바를 바꾸지 않아야 한다” ‘중용’에서는 또 이렇게 말했다. “도가 있으면 그의 말이 쓰이게 되고, 나라에 도가 없으면 침묵하여 몸을 거두어야 한다” 이 두 구절은 여기서의 가르침과 통한다.
이런 것은 말 안해도 일반 사람의 심정 처럼 잘 알아서 행동하게 되어 있다.
잘 해주면 기어 오르고, 독하게 하면 따른다.
누가 달마 처럼 죽음을 맞겠는가?
그러나 누가 옳고 그르다는것은 없다.
세상은 밤과낮이 필요한데,서로 반목하고 질시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이 대목에서 공자 사마천 달마가 동시에 떠오르는것은 무엇 때문일까?
有德者는 必有言이어니와 有言者는 不必有德이니라.
어 눌함,질박함,촌스럼,세련됨,교언영색,탈,실천이란 단어가 로또 숫자 돌아 가듯 뱅글뱅글 돌다가
말로만 하는 저의 불로그가 무덕한것으로 꽝입니다. 라고 나온다.
저의 무례한 말은 사고을 확장해가는 오류가 아닌가 합니다.
때론 오류가 타인에게는 영감을 가져다 주는 행운 일 수도 있지않는가요?
발필 예찬
특히 양발 사용이 건강에 좋다.
돈들여 배살 뺄 필요없다.
못 써도 탈이 없다.
이타 정신이 생긴다.
심신을 맑게 하기로서는 경전을 읽는것 보다 낫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