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어’ ‘里仁(이인)’에서 공자는 曾子(증자)에게 ‘吾道(오도)는 一以貫之(일이관지)’라 했는데 증자는 동문에게 ‘선생님의 도는 忠恕(충서)일 따름이다’라고 부연했다. 주자는 忠이란 자기 마음의 정성을 다하는 일, 恕란 자기 마음을 미루어 다른 사람의 마음을 헤아려 자기가 싫어하는 일을 다른 사람에게 행하지 않는 것이라고 보았다. 一貫의 道를 忠과 恕로 구분한 것이다. 그런데 ‘衛靈公(위령공)’의 이 章에서 공자는 ‘일생토록 행해야 하는 하나를 든다면 恕일 것이다’라고 했다. 그렇기에 정약용은 一貫의 道란 恕로, 忠은 恕의 바탕이라고 보았다.
一言은 片言隻語(편언척어)다. 可以는 ‘그것으로써 ∼할 수 있다’이되, 가능을 나타내는 복합어로 보아도 좋다.
공자는 恕에 대해 ‘자기가 바라지 않는 바를 남에게 베풀지 말라는 것이다’라고 정의했다. ‘顔淵(안연)’에서도 仲弓(중궁)에게 仁을 설명하면서 같은 말을 했다. 恕는 곧 推己及物(추기급물)이다. 자기 마음을 미루어 남에게 미치는 것이니 내가 저 사람의 처지라면 어떻게 할까 하는 생각으로 남의 처지를 이해하려고 하는 배려의 태도다.
恕는 仁과 어떻게 다른가? 자기 마음을 미루어 남에게 미치는 것이 恕라면 자기의 마음 그대로 남에게 미치는 것이 仁이다. ‘맹자’에서 ‘恕를 힘써 행한다면 仁을 구함이 이보다 가까운 것이 없다’고 했으니 恕는 仁보다 未盡(미진)하다. 그렇지만 자기를 다스리는 마음으로 남을 다스리고 자기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남을 사랑하는 恕야말로 현대사회에서 가장 중시해야 할 정신태도일 듯하다.
아무리 보아도 막연하다.
이 문장도 사전에 몇가지 단서을 붙여야 바람직 할것이다.
왜야하면 사회의 질서나 경제활동에서 주종 관계가 설립하지않고서는 불가능하다.
어느누가 남 딱가리 하는것을 좋아하겠는가?
그런다고 안 시킬것인가?
어느누가 남의 이윤을 박하게 하는것이 자신의 능력이고 돈이라고하는데
남 싫어 한다고 자선 사업 할것인가?
아침에 일어나기 기찮다고 남에게 폭 자고 일어나라고 권해서야 되겠는가?
그러니 남을 위해하고,음해하여 함정에 빠트리는 류을 전제해두고 보아야 가능 할것이다.
毁는 사람을 비난하는 일이니, 남의 악을 말하면서 그 진실을 덜어내는 것을 말한다. 譽는 사람을 찬양하는 일이니, 남을 칭찬하면서 사실보다 지나치게 하는 것을 말한다. 如는 ‘만일 ∼이라면’이다. 其有所試矣는 일찍이 실제로 시험해 본 바가 있어 그런 것이지, 구차하게 칭찬하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斯民은 지금 시대의 백성, 也는 주제화시키는 어조사다. 三代는 성스러운 군주가 다스렸던 이상적인 시대를 가리킨다. 直道는 선은 선, 악은 악이라고 시비를 분명히 함이다. 三代之所以直道而行也는 삼대에 直道를 실행하였기에 지금 백성들이 純朴(순박)하다는 뜻이다.
공자는 선대 당대 인물을 위 문장으로 보아 객관적으로 판단 했습을 알 수있다.
巧(교)는 아름답다, 훌륭하다, 꾸민다는 뜻으로 巧言(교언)은 말을 꾸미는 일, 혹은 번드르르하게 꾸민 말을 가리킨다. 巧言亂德에 대해 공영달은 巧言과 利口가 德義(덕의)를 어지럽힌다고 했는데 德義의 주체는 분명하지 않다. 주자는 巧言이 옳고 그름을 變亂(변란)시키므로 그 말을 들은 사람은 지킬 바를 상실하게 된다고 보았다. 이에 비해 정약용은 巧言이 덕 있는 어진 사람을 해치게 된다고 재해석했다.
小不忍은 작은 것을 참지 못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주자는 이 구절을, 작은 것에 차마 하지 못함과 하찮은 일을 참지 못함의 두 가지로 풀이했다. 차마 못하는 마음이 지나쳐 일을 결단하지 못함을 婦人(부인)의 仁이라 하고, 하찮은 일을 참지 못해 지나치게 과감한 것을 匹夫(필부)의 勇(용)이라 한다. 남성과 여성을 성적으로 차별한 말이 아니라 사태의 특성을 음과 양으로 대비시킨 말이다. 亂大謀는 大事를 실행할 큰 계책을 어지럽혀서 그 大事가 완수되지 못하게 만든다는 뜻이다.
不忍은 맹자에 자주 등장한다.
망설임 없이 본능적(사리 분별없이)으로 행동하는것,
즉 小不忍은 작은 것을 탐하는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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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3문장은 자신이 부귀을 가져도 임의대로 시키고,판단하는데 주관적인 집착을 자제하고
객관적이고 종합적인 행동을 하라는 의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