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는 작심한 듯 염有(염유)와 季路가 노나라 대부 季氏의 전臾(전유) 정벌 계획을 저지하지 못한 사실을 비난했다. 그리고 한 국가나 한 영지를 다스리는 爲政者(위정자)는 다른 지역을 정벌하려고 하지 말고 境域(경역) 안의 文德을 진흥해서 遠人이 信服(신복)하도록 만들어야 한다고 했다. 遠人은 먼 지방의 사람이란 뜻인데 국경 밖의 사람을 모두 가리킨다. 文德은 문화와 도덕이란 말로, 禮樂에 따른 敎化와 信義 있는 政治를 포함한다. 旣來之는 ‘이미 遠人이 信服해 왔으면’이다. 安之는 그들을 安堵(안도)하게 해준다는 말이다.
고려 초에 大學士와 學士들이 임금에게 經書를 講論(강론)하던 곳을 文德殿(문덕전)이라 했다. 1136년(인종 14)에는 修文殿(수문전)이라 고쳤는데 그때부터 고려 말까지 右文館(우문관)이라 했다가 다시 수문전이라 하는 등 명칭이 여러 번 바뀌었다.
당나라의 元結(원결)은 ‘治風(치풍)’ 시에서 “다스림을 어떻게 하는가, 곧 文德을 닦아야 한다. 淸淨純一(청정순일)하기까지 하다면, 어느 누구든 순응하고 본받으리(理何爲兮 系修文德 加之淸一 莫不順則)”라고 하였다
동서고금 이런 나라가 있었던가?
“지금 염구(염유)와 중유(계로)는 계씨를 돕되, 먼 지방 사람이 복종해 오지 않는데도 오게 하지 못하고, 나라가 분열되고 무너지는데도 지키지 못하거늘, 그런데도 창과 방패를 나라 안에서 움직일 것을 꾀하니 나는 계손의 근심이 전유에게 있지 않고 한 병풍 안에 있을까 두렵도다”라고 덧붙였다. 계씨가 전유를 정벌한 사실은 역사서에 나오지 않는다.
恐은 ∼하지 않을까 두렵다는 뜻이다. 季孫之憂란 계손씨의 장래 근심이란 말이다. 不在는 ∼에 있지 않다, 在는 ∼에 있다는 뜻이다. 蕭墻은 군주와 신하가 상견할 때 치는 병풍이다. 蕭는 엄숙할 肅의 뜻이라고 한다. 옛 주석에 따르면 천자는 外屛(외병), 제후는 內屛, 대부는 簾(염), 士는 유(유)를 쳐서 안과 밖을 구분했으나 대부 계손씨가 僭越(참월)하게도 屛을 쳤으므로 공자가 여기서 蕭墻이란 말을 썼다고 한다. 蕭墻之內는 담장 안의 가까운 身邊(신변)을 가리킨다.
後漢(후한) 말기의 袁紹(원소)는 曹操(조조)와 견줄 정도로 세력이 강했다. 하지만 그의 사후, 후계자인 작은아들 袁尙(원상)과 그를 인정하지 않는 장남 袁譚(원담)이 反目하여 交戰(교전)을 일삼는 바람에 원씨 일족은 조조에게 패망하고 말았다. 원씨는 그 憂患(우환)이 蕭墻之內에 있었으니 自中之亂(자중지란) 때문에 무너진 것이다.
憂일을 도모하고자 하는 근심,
즉 세조가 명분상 단종을 상왕으로 모시고 왕족을 약화 시키는 세력을 배척만 했으면 좋았는데(전유)
왕위 찬탈( 蕭墻)을 했으니.
현대에도 이와 비슷한 일들이 있었으니
周나라 幽王(유왕)이 犬戎(견융)에게 살해된 후 平王은 기원전 770년에 洛陽(낙양)으로 도읍을 옮겼다. 때는 노나라 隱公(은공) 원년에 해당한다. 이후 주나라 왕실은 미약해지고 제후들은 僭越(참월)하게 예악을 제정하고 정벌을 명했다.
공자는 下剋上(하극상)의 亂世(난세)를 개탄하는 한편 천하를 안정시키려면 名分을 바로잡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춘추’는 공자가 微言(미언)을 통해 正名의 大義를 力說한 경전이라고 간주된다.
위 3문장은
공자께서는 철저히 주나라을 천자의 나라로 비룻하여 주변에 제후국을 통제하고 규합하는 시스템을 표준 모델로 생각하여 왔으나 춘주시대 후반 부터 제후국들에 강한 무력과 세력을 앞세워 규율이 무너지기 시작했다.도 즉 정의가 없어지지않고 언제든 상존하지만 현재까지 힘의 논리가 지배하고 있다.
그러니 세상(종교,정치,생활등등...)은 늘 음양이 상존하고 있다.
공자,기독교는 양을 지양하고,불교 도교는 음을 지양하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