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자는 利보다 仁義를 우선해야 하는 적극적인 이유를 위와 같이 말했다. 군주가 利를 추구하지 않고 몸소 仁義를 행하면 아랫사람이 교화되어 군주를 친애하고 받들 것이라고 말한 것이다. 何必曰利章의 이 문장은 같은 짜임의 어구를 나란히 두는 對仗法(대장법)을 사용했다. 未有는 ‘지금까지 결코 ∼이 있지 않았다’는 말이다. 遺는 버릴 棄(기)와 같다. 後는 급하게 여기지 않음이다.
이문장을 대하면 답답하다.
인하면 그 부모를 버리는자 보지 못했으며
의하면 그 군주를 뒤로하는자 있지아니하나이다.
모두가 이런 관점으로 본다.
인이 어렵다는데,
결론은 숫하게 보았다는 것이고 널린게 인한것이다.
아니면 인이 어려운데 인하지 못해서 세상 사람들 대부분이 부모를 버리기를 헌신짝 버리듯한다.
의도 이런 논리로 보면 의 " 군주 " .
이런 논단이 언나 볼에 밥풀 띠먹는 소리겠는가?
너나 할것없이 거름지고 장에가니 따라하는 격인지라
답답한데, 모두가 그러하면 내가 답답해 보일 뿐이아니겠는가?
위의 논리에 모순을 없에려면
인을 행하는데 미흡하면 부모를 등한시 할수 있고
의을 행하는데 미흡하면 군주를 업신 여기게 된다.
未가 완전 부정 보다 아직은 부족하지만 언젠가 는 긍정으로 갈 가능성이 포함되어 있는 의미에서 그렇고
而을 주어가 생략된 대등한 관계에서도 그러하다.
즉 막말 판사가 인에 문제가 있지만 예의 절차을 통과해 임용이되어
의의 행위인 판결에 하자을 만들어 부모 군주 욕먹이는 것과 같다.
인과의의 관점에서
사회적인측면에서는 인(외) 의(내)
자신의 입장에서는 인(내) 의(외)을
따져보면 이해하는데 도움이 있지않을까?
주역과 공자의 흐름과도 일관된다.
인을 행하는 것은
투자와 생산하는 과정에서 여건이 여의치 않으면 주변인들을 일일이 어떻게 챙기겠는가?
의를 행하는 것은
이익과 분배하는 과정에서 성과가 부족하면 국가 탓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