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국이 인정을 베풀지 않고 그 백성을 함정에 떨어뜨리고 물에 빠뜨리거든 왕께서 가서 바로잡으신다면 아무도 對敵(대적)하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彼는 적국을 가리킨다. 陷溺에서 陷은 陷穽(함정)에 떨어뜨림, 溺은 물에 빠뜨림이다. 暴虐(포학)하게 군다는 뜻이니, 塗炭(도탄)에 떨어뜨림과 같다. 도탄은 진창과 숯불이란 말로, 극도로 고통스러운 처지를 비유한다. ‘상서’ 즉 ‘서경’의 ‘仲(회,훼)之誥(중훼지고)’편에 ‘有夏昏德(유하혼덕), 民墜塗炭(민추도탄)’이라 했으니, 하나라 군주가 덕에 어두워 백성들이 위험에 처한 것이 마치 진창에 빠지고 불에 떨어진 것과 같다고 비유한 말이다.
王은 여기서는 양혜왕을 가리킨다. 아래의 王도 같다. 征은 흔히 征伐(정벌)을 뜻하지만, 여기서는 바로잡는다는 뜻으로 풀이한다. 저들이 그 백성들을 포학하게 대하고 있을 때 이쪽에서는 仁政을 실행하여 나의 군주를 존경하고 윗사람을 친애하는 우리 백성들을 거느리고 가서 저들의 죄를 바로잡는다는 뜻이다. 夫는 발어사다. 與는 ‘∼에 대해서’이다. 誰與王敵은 ‘저 백성들은 그 윗사람을 원망하고 있으므로 기꺼이 왕에게 돌아올 것이니 누가 왕에게 대적하겠는가’라는 뜻이다.
맹자에 따르면 군주가 省刑罰(생형벌·형벌을 줄임)과 薄稅斂(박세렴·세금 거둠을 적게 함)의 仁政을 행하고 奪其民時(탈기민시)하지 않는다면 백성들은 그 군주를 존중하게 된다. 만일 군주가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백성들은 도탄에 빠져 윗사람을 원망하여 仁政을 베푸는 이웃나라 군주가 와서 자기 군주의 죄를 바로잡아 주길 고대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상서’, 즉 ‘서경’의 ‘武成’편에 보면 주나라 武王이 殷(은)나라 紂(주)왕을 정벌할 때 牧野(목야)의 전투가 하도 치열해서 ‘피가 철철 흘러 절굿공이가 떠내려갔다’는 말이 있다. 맹자는 仁者無敵의 뜻을 미루어 포악한 자를 정벌하는 데 전투가 그토록 치열했을 리 없으니 이는 과장된 말이라고 단언하기까지 했다.
맹자는 양양왕을 만나 본 뒤, 양양왕에게는 군주로서 위엄이 없다고 말했다. 멀리서 보아도 군주답지 않고 가까이서 보아도 敬畏(경외)의 마음이 일어나지 않았다고 했다. 見梁襄王의 見은 뵙는다는 뜻인데, 맹자를 높이기 위해 ‘견’으로 읽는다. 望之는 멀리서 바라봄, 就之는 가까이 다가감을 말한다. 不見所畏는 경외할 만한 구석을 찾아볼 수 없었다는 뜻이다. 焉은 종결사이다.
‘논어’ ‘衛靈公(위령공)’편에서 공자는 지도자라면 知, 仁, 莊, 禮의 네 요소를 지녀야 한다고 했다. 知는 사태의 본질과 변화에 통달하는 슬기, 仁은 어질어서 남에게 은혜를 끼치는 덕, 莊은 권력을 지닌 자로서의 威嚴(위엄), 禮는 秩序(질서)와 條理(조리)를 가리킨다. ‘先進’편에서는 ‘論篤(논독)을 是與(시여)면 君子者乎(군자자호)아 色莊者乎(색장자호)아’라고 했다.
위의 문장을 보고
모두들 자신의 입장에서는
연애을 해도 로맨스고 남이 하면 불륜이 아닌지 살펴 볼일이아닌가?
맹자의 자신만의 설득은 진리이고 현실에서 살아 남을려는 왕은 패륜아 취급하는것이 당연한것인가?
맹자 입장에서는 손자병법이 전쟁을 위한 썩을 것으로 생각하겠지만
현대에도 따라오기 어려운 초 현실적이고 전쟁을 하지않기 위한 면에서는 인의을 외치는것보다 더 절실하게 강조하고 있다.
"省刑罰(생형벌·형벌을 줄임)과 薄稅斂(박세렴·세금 거둠을 적게 함)의 仁政을 행하고 奪其民時(탈기민시)하지 않는다면 백성들은 그 군주를 존중하게 된다".
이 명제에서도 인이 무엇인지 의심게 한다.
즉 착하게 잘해주면 인 하다는 입장이다.
그러니 장자 외편(후대 추종자의 글)에서 인을 고리타분한 도덕군자로 나무란다.
장자도 자연을 동경하지만 현실에서 찌지고 뽁는것도 자연 스러운 하나의 형태로 볼 수있는 아량은 없는것이 그들의 맹점일 수밖에 없는 붕어빵(실체가 없는)이 아닐까?,
춘추 시대에서는 "省刑罰(생형벌·형벌을 줄임)과 薄稅斂(박세렴·세금 거둠을 적게 함)의 仁政" 이것을 왕이 통제하지 못해서 제후들이 대부들에게 놀아나고 생존 게임을 하는 전국 시대는 이런 상황이 출현 할 수도 없고 현대의 입장에서는 인정과 반대이다.
전국시대에 힘의 남용을 부릴 수없는 것이 대부들인데
맹자는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자유분방하게 일방통행 한것이
소설에서나 있을 수 있는 일이 아닌지?
맹자가 생각하는
양양왕에게는 군주로서 위엄이 없다고 말했다. 멀리서 보아도 군주답지 않고 가까이서 보아도 敬畏(경외)의 마음이 일어나지 않았다고 했다.
요즘은 이런 왕을 동경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런 관점에도
인의의 진정한 의미을 모른다고 터부시 할것인가?
아무리 돈의 좋음에는 경계가 없다 할지라도 필요 할때 쓰여야 효과을 보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