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자 공손추 상편에 나오는 부동심에 관한 전후 문장들인데
이해하기 어려운 문장이다.
다양한 문헌과 많은사람들의 해석이 있지만 만족 할 만것을 못 느꼈다.
이러다 보니 맹자 자신은 이것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을까?
궁금하지않을 수없다.
그러나 모든 것을 溫故知新해서
쉽게 자연의 이치를 근거로 저의 생각을 궁구해보려고한다.
우선 서설로
仁慈隱惻
造次弗離
節義廉退
顚沛匪虧
천자문에 나오는 유가의 仁義실천을 통해 바름을 표현한 문장이 떠오른다.
전후로 나누어 인의로 생각할 수있고,음양의 변화로 또는 반대로 양음의 변화로도 볼 수있다.
앞문장이 덕목을 뒷문장이 실천을
전후문장에서도 앞뒤문장의로나누어 인의을 잘 알 수있다.
맹자가
설명하는不動心 揠苗助長 浩然之氣
知言= 詖辭 淫辭 邪辭 遁辭
이런 말로 너스레를 떠는 것이 위의 문장과 다를것이 없다.
부동심 과 호연지기는 내용없는 막연한 허풍에 가깝고
지언은 소인이 사고하는 나쁜 말 모음의 기미로 세상의 말을 알 수가 있다고 하고
성인도 다시 온다면 자신의 말을 따를 것이다 허풍2
알묘조장은
농사꾼이나 송나라 사람의 어리석음을 지적 할 것이아니라
위정자들의 그릇됨을
농사꾼도 실 수하지 않는 것을 배우고 잘 난 분들의 성급함을 탓해야 될 일이다.
농사 짓는 분들은 절대 그런 실 수을 할 일이 없다.
비유의 어리석음이 허풍3다.
坐朝問道
垂拱平章
焉=於是=義
이 문장의 앞문장에서 義에 관한 내용의 연장선에서 대사로 쓰인다.
春秋란 책의 재목도 따지고 보면 仁義와 별개가 아니다.
즉 공자 맹자의 말씀도 음양 오행의 범주내에서 운행되고 있씁을 알 수있다.
동서양의 역사도 또한 같다.
春秋는 인간의 영역에서 인간의 의지로 삶을 영속하기위한 행위을 관장하고
夏冬은 인간이 살아가는 자연 환경의 지배 속에서 일부을 모방하고 활용하여 삶의 질을 풍요롭게
만드는 영역으로사람의 의지보다 주변 환경이 더 크게 작용한다.
이 또한 오행 속에 음양의 다른 측면을 읽어 낼 수있다.
坐朝問道=仁
垂拱平章=義
위의 4구절은 인의의 개인 실천 행동양식 측면을
이 2구절은 인의의 사회 정치 실현 형태측면의 두가지을 고려하면
개인과 사회의 각각 음양변화와 상호 관계속에서의 음양 변화로
원인과 결과의 인과 관계을읽어 내는 사고의 확충이 필요하다.
必有事焉而勿正 心勿忘 勿助長也 無若宋人然
必有事焉而/勿正心/勿忘/ 勿助長也/ 無若宋人然
반드시 義을 실현하는데 있어서는
바른 마음도 망녕된 것 서두를 것 잘나고 어리석음 조차 필요없다.
垂拱平章=義
의가 실현 된 상태에서는
즉 두 바퀴가 균형맞게 잘 굴러 갈때는 당연한것 처럼 아무 생각 없다가
넘어지면 어런 저런 이유로 말이 많아 지는 것과 같다.
소풍가는데 버스을 일찍 타야 하는데 고민이 많은데
버스을 탄 이상 다양한 경우의 수들이 필요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케인즈의 경제 이론 도
불안정한것이 인간 세상의 다양한 변화을 고려하지 못하고
완벽한 시장경제 구조에서만 가능한 좌표이기때문에
말도 많고 탈도 많은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이 문장을 보면 맹자가 다시 태어 나더라도
자신의 생각과 부합하지 않더라도 저의 입장을 부정 하지는 못 할 것이다.
이런 것은 이런때 쓰는것이지 허풍2와 같은 경우가 아님을 또한 알아보자.
말을 안다는 것은 다양한 변수가 고려 되어 많은 경우 수을 낳을 수 있는데
단편적인 측면으로 만 대상이 되어서는 안된다.
그러나 모든 것이 익숙하면 못느끼듯 이면적인 측면은 맹자가 너무 당연하여 언급하지 않을 수 있다.
부귀을 갖춘 다리를 져는 사람이 바로 걸어 다니는 사람을 가장 부러워하는 상대적인 이치와 같다.
성자가 된 구두딱쇠가 돈의 필요성을 가장 많이 느끼듯
告子曰 ‘不得於言,勿求於心 不得於心,勿求於氣。’
不得於心,勿求於氣,可 不得於言,勿求於心,不可。
夫志,氣之帥也 氣,體之充也。
夫志至焉,氣次焉。故曰 ‘持其志,無暴其氣。’
고자의 말에
맹자의 평인
不得於心,勿求於氣,可 不得於言,勿求於心,不可。
이 말을 이해 하는 중심으로 생각해보자
得於言=말을 이해하는 것
법 조문이 대표적인데
법을 이해 하기위하여
동양의 유가의예,한비자 =권력자 중심
서양의 마그나 카르타 ,마키아벨리 군주론=민중 중심
어렵게 생각할 필요가 없고 일반적으로 법이 약자을 보호하기 위한것인가?
그것을 악용하여 쓰는자를 막기위한 것인가
다양한 사상과 철학과 이권이 난무하고 표현이 시공을 넘나들지만 이 범주안에 있다.
즉 법이란 말 에서도 시공의 표리관계에서 음양의 변화을 상호 보완 관계로 작용하는 것을 알 수있다.
혹자는 서로 비난의 대상으로 우열의 이분법적인 논리을 펼치지만 옳은 방법이 아닌 것 이다.
涉外을 이해 하기위하여
목재에 긴 나사못을 칠때
처음 해보면 쉬운 일이 아니다.뻔 한데
아직 못 하나 똑바로 못박어! 섭외을 해야지!
도대체 무슨 말이여 정치 판도 아니고 다시 힘으로만 박을려니 똑 바로 될리가 있는가?
왜 말을 안들어! 어디봐
중간쯤 밖고 잘 안들어 갈때 역회전을 해서 충분히 공간을 다시 확보하고 다시 밖으면
끝까지 잘들어가는거야!
일을 잘 할 려면 섭외가 꼭필요하지!
정치나 연애나 못밖는거나 어디 다른것이 하나도 없는것이야!
得於心
마음에 맞는것, 마음이 일치하는것 ,여론의 지지
마음이 무엇인가?
말은 무성한데 어디에도 실체는 없다.
저는 이것이 정신과 몸 환경이 삼위일체하여 자신의 경험을 통하여
유기적으로 변형하여 나타나는 실체로 이해하고 싶다.
늘 사용하든 도구을 수도 없이 반복하고 같은 위치에 익숙하다면
바로옆에 있어도 보이지 않고 찾을 때가 많다.
당황하고 급할때는 아이을 업고도 아이을 찾는 경우도 있다.
연장이 제자리에 없을 때는 자신이 아무 곳에 둔것이지
남이 가져간 것으로 누구는 성향이 그러니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날짜을 정할때 ,선택을 할때 유세을 할때
가치관,정책,여론이 상호 유기적으로 작용하는 이해 관계이지
개인의 성향으로만 일치하는것이 아닌것이 마음과 같다.
대표를 선출 할때
모든 것을 통섭할 휼륭한 인물이 선출되지 않는 것 처럼
아무리 좋은 인물이더라도 자신의 공천에 문제가 있다면 배제 하는 것과 같다.
다소 부족하더하도 아니 내가 상대하기 편한사람을 선택하는 아이러니한 경우 수가 있다.
不得於心,勿求於氣,可 不得於言,勿求於心,不可。
여려 경우을 대입해도 마찬가지지만
대표가 되지 못한것은 당원들의 소신과 이념적 기질이 아니라 이해관계에 있고
섭외라는 말을 이해 하지 못한경우 상대방의 말을 진심으로 체득하는 것이 필요하다.
진심으로 체득 한다는것은
시범을 보고 말로만 이해하는것 =현재 통용되는 마음
섭외란 말을 이해하고 경험하여 자신의 것으로 체득하는 것=삼위일체 관점에서 마음.
어느 정도 이해가 되었는지 모르겠다.
왜야하면 많은 설명이 필요한데 생략 된 부분이 많고
글이 상호 이해 관계가 어려울 수도 있고
짬짬이 쓰는 글이라 논술적이지 못한 이해 중심임을 감안하면
누구나 경험해본 실 생활의 일을 미시적 거시적 예로 들어 전제적인 윤곽에 도움이 될것 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맹자의 허풍과 저의 허풍이 어떤지 생각해 보시고
不動心 에서
주관이 아닌 객관적인 관점에서 사물을 관찰하는 부동심을 필요한것 같습니다.
顚沛匪虧=不動心 이런 마음으로 정치 경제가 垂拱平章으로 실현 되길 바람니다.
부동심은
인도의 경전 베다(절차 의식-기독교요소)
우파니샤드(누구나 이성 실현의 잠제요소을 가짐-불교요소)
바가바드기타에(옳고 그름 조차 구분안는 평정심=부동심=도교요소)
바가바드기타에 구체적이고 다양한 관점에서 부동심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시대적으로도 맹자보다 먼저 일 것입니다.
인도의 간디가 바가바드기타를 심봉하여
자신의 정치 노선에 실현 하다가 (이슬람인과 인도인의 상호 교환이주에서 동등하게대우)
극우 힌두교인에게 살해되는 안타까운 일이 맹자가 말하는 不忍人之心이 아닐까요?
仁}
仁
仁慈隱惻=仁
造次弗離=義
義
節義廉退=仁
顚沛匪虧=義
義}
坐朝問道=仁
垂拱平章=義
이 맹자의 허풍 속에서表을
맹자가 추구하는 뜻에서 천자문 문구에 나타나는 인의의 열정에서裏를
表裏관계을 읽어야만 맹자의 진정한 기계가 누구보다 뛰어남을 알 수있다.
꿈같은 상상의 만화가 현실이 되듯이
허풍의 쓰임이 필요할때도 있다.
허풍4 남이하면 불륜 내가하면 로멘스처럼
정치를 구체적이고 문헌이많고 업적을 이룬 관중은 패권으로 비하하고
내가 하면 말로만 해도 손바닥 뒤집는 것 처럼 쉬운 일이라고 장담하는 기계을
현재 국제 구조의 모순을 극복하고
맹자의 허풍이 통하는 세상이 만들어 지길 기대한다.
생각의 차이가
단순한 글귀에서 시공을 초월한 세상의 다양한 이치가
통 하는 글을 다른 곳에서도 자주 만날 수있길 바라며
감사합니다.
클레안테스(Cleanthes)의 송시(訟詩)
··· 아 우둔한 자들이여!
그대들은 언제나 재화를 소유하는 데만 급급하여
온 자연을 다스리시는 신의 뜻을 어기고 있나니,
실로 자기가 복종만 한다면 행복한 삶과 지혜를 누가 하사해
줄 것인가를 귀담아 들으려고도 하지 않는도다. 마침내 그들은
그 어디서나 모든 선한 것을 그대로 스쳐 지나가 버릴 뿐이니,
··· 비천한 물욕(物慾)을 채워 줄 소득에만 눈이 어두워 버린 채,
마침내 명성과 감미로운 욕정의 씨앗만을 탐내는가 하면 또한
하찮은 욕망만을 충족시키려고 애태울 뿐이라네
[스토아 학파의 한 사람인 클레안테스가 제우스 신에게 바친 송시]
→ 스토아 학파의 아파테이아(부동심)을 나타냄.
헬레니즘 문화에서 탄생해 절충적인 모습을 보이며, 유물론과 범신론적 관점에서 금욕과 평정을 행하는 현자를 최고의 선으로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