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같은 일이 기계 같은 인간처럼 살아가는 의미가 무엇인지 조차 잊어버리고
구르는 공이 멈추지않는것처럼 반복하여 거듭 굴러간다.
이럴때 동료들에게 물어본다.
야! 단순노동에 시달리면서 낙이 없는데 뭐 좋은것이 없나!
한결같이 외도을 해봐!
일리가 있는것 같다.
잘 굴러가다가 외부에 힘에 의해서 멈추어지면 가야할지 말아할지
정체성을 일고 어쩔 줄 모르는 것은 훈련이 되어 있지않으면 적응이 힘들다.
이때는 외도가 제일이지!
이것도 처녀가 좋은것이 아닌가?
이왕이면 여러번 해본것보다 처음해본것이 좋다는 생각이들어
여러 스타일을 물색하던 중에
처음해 본 구석구석 후벼파고 비비고 돌리고 끌고 하는것을
강도가 더 할 수록 짜릿함과 묘한 기분이들어
무대포로 무식하게 시도해 보았다.
늘 이런 식이 였다.
병풍 글씨을 쓸대도
평소에 관심은 있었지만 간단한 작품한 점 해본적도 없었고
학교 다닐때 집에서 쓰던 붓 벼루는 손은 못되고
옆반에서 빌리든지 형들이 쓰던 문방구표의 부실한것으로 몇번 끌적한것 밖에 없었는데
그러나 제사때마다 쓰는 지방과 제문은 밥먹듯이 보았다.
동기가 무서운 힘을 발휘하는 것인지
부모님이 살아게실때 변변한것을 해드리지 못했는데
장인 칠순때 그냥 있자니 무기력해 보였다.
그전에 다리가 뿌러져 병원 신세도 오래졌고 금전적으로도 넉넉하지가 못했다.
회복기에 내가 할 수있는길을 찾으니 평소 한학을 틈듬이 공부한것도 있고
병풍을 만들어 드리는것에 도전해서 성의을 보였다.
호텔에서 요리을 할때
야채 조각에 흥미가 있었지만 특히 배울만한 기능자가 없었다.
저는 양식부서에서 최고 꼭데기 층 식당에서 일과을 보았다.
평소 생활이 팍팍한지라
마누라가 임신을 해도
특별히 무엇을 해야 할지도 몰랐고
지나 가다가 풀빵 굽는곳이 있으면 한 봉지 들고 가는것이 전부였다.
미안해서인지 시간이 있어서인지 분간이 안되지만
당근으로 꽃을 파서 손에 감추어 마누라 손에 주었는데
반응이 시큰둥했다. 이런 것이 꽃을 조각한다는 소문이나서
아래층에 중식당이 있는데 하루는 중국 야채 조각책을 들고와서
내가 관심이 있다고 하니까? 당근에 용을 세기는 위풍과 삼세함이 곧 하늘로 날아 갈것갔았다.
자기들은 하기어려우니 한번 해 보라는것이였다.
야채 아니 감자을 샤토 친다는데 먹기좋게 럭비공 모양을 내는 칼이 있었다.
이것 한자루로 시작해서 용보다 봉황이 하고 싶어 만들어 보았다.
호텔은 자신의 맏은 업무가 나누어져있어 할일을 하고나면 시간이 많이 나는 편이여서 가능했다.
저가 숙련된 조리사도 아니였고 어디가나 그렀듯이 겨우 눈뜰정도였다.
이때 호텔 주방 팀들이 실력이 부족하다 하여
총 주방장이 중앙에서 섭외하여 오니
그아래 인력들은 추풍낙엽처럼 점령군이 밀려오는것처럼 물갈이가 되는 시점이였다.
봉황을 조각한것을 부페식당에 내려보내 장식을
이것도 주변에서 구경하든 동료가 들고가서 전시을 했다.
서울에서 온 팀들도 표현은 안해도 신기하고 놀라는 반응이였다.
이래서 팀들이 싹 물갈이되고 그들까지 물러간 다음에 퇴사을 했다.
심지어 군대에서 깍세(머리깍는 일)까지 해보았다.
훈련소에 파견 부대였는데 의무대 인원이 작아
늘 머리를 깍을때면 대대 이발병에게 아쉬운 소리을 해야만했다.
고참이 무슨 생각에서인지
빡박이 도토리 키재기지만
아주 조금 머리카락이 긴듯한 훈련병을 대리고 와서
서일병 머리 한번 깍아봐!
마루타도 아니고
이런 일이 몇번 있은후
고참이 내머리 벌초해봐! 난감한 일 이지만
이일이 있은 후에 우리 육 칠명의 두발을 자급자족했고 전역후 한번도 해본적이 없다.
더욱 심한것은 겨울에 난방을 해야하는데
빼당이란 것도 했다 사회에 빼치카 즉 벽난로다.이것 당번이다.
저장한 석탄과 진흙이 얼어부터서 꼭깽이로 찍어 가루로 만들어 물로 비비고 썩어서 빼치카에 한삽씩 던져 넣으면 이것이 굳어서 불쏘시게로 작용한다.
이것을 반복하여 불쏘시게가 많으면 골고루 펴고 미장하듯이 봉하고 구멍을 몇군데 뚫어 놓으면 화력이 하루가 간다.
절차가 생략되고 에피소드와 사연도 많았었다.
깍세하고 빼당하고 치료하고 야전 수술기물관리하고 약제관리하고 훈련병이다보니 병영소에서 쓰는 약제가 사단전체가 쓰는 규모의 팔 구할 소모하니 우리가 쓰는 예산이 즉 사단이 쓰는 기준이 되었다.
모두 처음하는 일과 관련이 있어 열거 했지만 적지 않는 것이 더 많지않을까?
잘 하던 못하든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할 뿐이였다.
해보니 쉬운 일이 아니었다.
처음 하다보니 생각데로 잘되지않았다.
쓰는 세포마다 군데군데 좀이 쑤시고
이 것도 하다보니 정신없이 빠져들고 시간가는 줄 모르고
많은 것을 희생시켰다.
좋아하는 책도 못읽고 음악도 들을 수없으니
무엇인가 도둑을 맞은 기분이 들었다.
박대리가 방전 된것 처럼 한동안 책에 글씨가 초점에 들어오지 않았다.
처음 부터 책을 좋아한것이 아니고 철들고 부터가 아닌가?
심지어 고등학교 시절까지도 교양도서를 읽어 가지 않아서 방학이 지나면
박달나무로 손등을 맞고 욕이 티어 나올정도로 통증이 한두번이 아니다.
이때는 책을 접할 기회가 없었을 뿐인데.
꺼꾸로 살아보고
책을 읽으니 책속에 경험들이 형태는 달라도
내 몸속에 녹아 있다는 것을 느끼며
나을 알기위해 책에 흥미가 더하고
저녁에 잠시읽은 세계의 역사와 사상 여행이 단순 노동할때
함께 작동하여 세상을 주무르고
피로을 잊고 즐거움으로 변환하는 마인드 컨트롤을 즐긴다.
영화 군함도를 한편보더라도
조각 파편이 피박 받느자들의 피와 땀같은 느낌이들고
그당시 제국과 전체주의 식민지에 고통받는 유라시아 아메리카 아프리카 의 해방이 유기적으로 작동하여
한눈에 들어온다. 분열되고 코바르고 앞잡이하고 이런것은 우리만의 특성이 아니라 통제하는자들의 교모한 술책에 놀아나는 현상으로 통제받는자들의 공통된 행위로 나타난다.
러시아는 이런 어려움이 없었을것 같지만 몽골의 정복당시 300여년이란 간섭을 받았으며 표트르 예카테리나 이반4세에 이르러 챠르형태의 제국을 갖추고 러일전쟁때 수모을 이루 말 할 수없다.큰 나라도 이랬였는데 다른 대륙의 작은 국가들과 소수민족들은 오죽 했겠는가?
우리는 이들에 비교하면 상대적으로 통제가 짧았는데
현재의 감정의 골이 더 깊어 가는것이 바람직한 문제만 아닌것 같다.
특히 집중하다 보니 다리도 아프고
나이들면서 눈이 흐릿해야 세상이 이뻐보인다고
더 아름답게 보라는지 아예 보이지않을 지경까지 다다른다.
세상살이 격을 만큼 격었다고 생각했지만
처음하는 일에는 지난과거에 시행착오들이 스펙트럼처럼 밀려온다.
시작한 것을 멈출 수없고
먹고 사는 걱정 없는 세상, 돈없는세상의 무아지경에 몰입하여
서툴고 힘들고 떼려치우고 싶지만 끝까지
즐겨보았다.
하고 나니 이걸 뭐가 먹고 살거라고 죽을동 살똥 했는지
허탈하기도 하고
성취감도 있어
행복감이 들었다.
역시 처녀작은 쉬운게 아니여!
많이 해본것이 좋은게 아닌가?
선택하기 나름 이겠지만
나이들어가면서 질나고 헐렁한 옷이
편한것이 순리가 아니겠는가?
저의 이런 삶이 편협되어
부정적인 면만 전달 되었는지
아내나 아이에게 신뢰가 떨어지고
혼란만 가중되는 것 같아 마음이 편안하지 못하다.
그러나 주어진 삶에서 스스로 즐기는 방법과 관심에
모르고 없는것같아 아쉽다.
모든 가정에 밝은 웃음과 행복이 함께하길 바란다.
감사합니다.
사가 한 수 떠오른다.
전명숙
自在沙鄕得意遊
雪翔瘦脚獨淸秋
蕭蕭寒雨來時夢
往往漁人去後邱
許多水石非生面
閱幾風霜已白頭
飮啄雖煩無過分
江湖魚族莫深愁
모 단체의 해석과 역사학자들의 자구 해석보다
자신이 역사속에 살아 숨쉬는 체험과
현실에 부합할 수있는 느낌으로
전체문장의 의미가 상통 할 수있는 해석이 사료된다.
어린아이마음과 달관자의 예지가 상통하듯이
군함도을 한편 보는 것같기도하고
시련이 있어도 밝은 웃음과 행복이 있으니
너무상심하지말고 힘내고
기가차게 살라는 의미가 아닐까?
형태 士
장소 느티나무
도구 단순기구 신발딱던 못쓰는 치솔
이름 서, 인각
여름 휴가를 보내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