季文子가 三思而後行하더니 子聞之하고 曰, 再斯可矣라 하다
‘논어’ 公冶長(공야장)편의 이 장에서 공자는 優柔不斷(우유부단)을 경계하였다. 季文子는 魯(노)나라 대부로 이름은 行父(행보, 행부가 아님)이다. 文子는 죽은 뒤에 조정에서 내린 諡號(시호)이다. 높은 벼슬로 있으면서 사사로이 재물을 쌓지 않았지만 지나치게 思慮(사려)가 깊어서 정치를 잘 했다고는 할 수 없다.
계문자는 대부의 병사를 몰아다가 齊(제)나라를 공격한다든가 노나라에 弑逆(시역)이 일어났을 때 제나라에 사신으로 갔다.
그에 따르면 공자는 “계문자가 멋대로 군사를 일으킨 일과 역적에게 붙은 일을 보면 두 번 생각도 하지 못했거늘 어찌 세 번 생각한 뒤 실행한다고 자부할 수 있겠는가?”라고 말한 셈이다.
乞(걸)은 본래 구름 기운을 나타냈지만 ‘빌리다’의 뜻으로 차용해 쓴다. 醯(혜)는 식초이다. 焉(언)은 종결사로, ‘∼에게’의 뜻도 지닌다.
자기 집에 없는 물건을 이웃에서 빌려다 주면 친절하다 할 수 있지 않을까? 공자는 옳다 여기지 않았다. 자기 집에 없으면 없다고 해야 하거늘 그러지 않았고 이웃에 가서는 자기가 쓸 것이라 했기 때문이다.
‘史記(사기)’에서는 29세로 머리가 희어져 죽었다고 했으나 ‘孔子家語(공자가어)’에서는 32세로 죽었다고 했다. 魯(노)나라 哀公(애공)이 공자에게 “門人(문인, 제자) 중 누가 가장 학문을 좋아합니까?”라고 묻자, 공자는 안회가 그런 제자였으나 불행하게도 단명했다고 말했다.
不貳過(불이과)는 ‘잘못을 두 번 거듭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貳(이)는 세발 솥 鼎(정)의 새김 글자를 창으로 깎아 고치는 일을 가리켰으나, ‘거듭’이나 ‘둘’의 뜻으로 쓰인다. 不幸(불행)의 幸(행)은 수갑을 나타냈지만, 형벌을 받되 수갑 차는 정도로 그치면 다행이라 ‘행복하다’의 뜻을 갖게 된 듯하다.
이 일화는 재물에 대한 공자의 생각을 알 수 있게 한다. 제자 公西赤(공서적)이 齊(제)나라에 사절로 가게 됐다.
공서적의 字(자)는 子華(자화)로 외교의 예법에 밝았다. 다른 제자 염求(염구)가 공서적의 어머니에게 곡식을 보내자고 청하자 공자는 “여섯 말 넉 되를 보내라”고 했다. 염구가 더 보내자고 청하자 공자는 “열여섯 말을 보내라”고 했지만 염구는 여든 섬을 보냈다.周急(주급)의 周는 보탤 주(주)의 本字(본자·본래 자)이다. 急(급)은 窮迫(궁박)하여 火急(화급)함을 뜻한다. 不繼富(불계부)의 이을 繼(계)는 ‘여유 있거늘 더 보태준다’는 뜻이다.
공자는 ‘君子周急不繼富(군자주급불계부)’의 속담을 인용해서 이미 부유한 사람에게 부당한 이익을 더 주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犁牛之子(이우지자)는 얼룩소의 송아지라는 말이다. 성(성)은 털빛이 붉은 말을 가리킨다. 周(주)나라에서는 제사 때 붉은 소를 사용했다. 且(차)는 ‘또한∼하다’의 뜻을 나타낸다. 뿔 角(각)은 여기서는 뿔이 곧음을 가리킨다. 雖(수)는 ‘비록∼할지라도’라는 뜻의 접속사이다. 欲(욕)은 ‘∼하려고 한다’는 뜻이다.
勿(물)은 금지사로 쓰이지만, 여기선 ‘∼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또 用(용)은 제사에 씀을 말하고 山川(산천)은 산천의 신을 가리킨다. 其(기)는 앞말을 받아 강조하는 어조를 띤다. 舍(사)는 버릴 捨(사)의 본 글자이지, ‘집’이 아니다. 글 끝의 諸(저)는 지시와 의문의 어조를 나타낸다. ‘∼을 ∼하겠는가’로 풀이한다.
주자(주희)는 “얼룩소 송아지라도 붉은 털과 곧은 뿔을 지녔다면 산천의 신이 희생으로 받아주듯이, 아버지가 천하고 악하다 해도 그의 선량한 자식까지 버려지는 법은 없다”고 타일렀다고 풀이했다.
정약용은 犁牛를 ‘여우’(검은 소)로 보고, “검은 소의 송아지가 털이 붉고 뿔이 곧다면 천지 신에게 사용할 수는 없다고 해도 산천의 신에게까지 쓰이지 못하는 법은 없다”는 뜻으로 풀이했다. 아버지를 닮지 못한 不肖子(불초자)라도 노력하면 훌륭해질 수 있다고 격려한 말로 본 것이다.
저는 좋은 재목이 당연히 쓰이지만 아끼고 아껴 신주모시듯 해도 알게 모르게 누가 써도 쓰게(미생물) 된다는것으로 휼륭한 인격을 갖춘자가 출사를 하지 안터라도 자신의 역활의 재목으로 쓰임(공,맹자처럼)을 다하게 만들어
밝은 사회로 변화시키게한다.는 입장이 적합한 표현이 아닐까 ?
돈 버는 사람,쓰는 사람 따로 있듯이,국밥과 따로 국밥이 그게 그건데 이래 저래 쓰나 쓰임은 같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