才不才에 亦各言其子也니라
才不才는 ‘재주가 있든 재주가 없든’이다. 賢不賢(현불현), 賢不肖(현불초) 등과 뜻이 같다. 주어는 아래의 其子의 子이다. 亦各言其子也의 주어는 其子의 부모로, 부모로서는 누구나 각자 자식에 대해 말하면서 아끼고 사랑한다는 뜻이다.
재주있는분은 안연,없는분은 공자 아들,로 볼 수도 있다.
안연이 죽자 부친이 공자인데
극찬을 아끼지 안으셨는데,장례을 후하게 치룰것을 요구했다.
부모된 마음은 똑같다. 내 자식도 검소하게 치렸는데
아끼는 제자라고 해서 타는 마차가지 팔아서 후하게 치룰 필요가 있겠는가?
예에 맞게 치르길 원했다.
顔淵이 死커늘 子曰, 噫라 天喪予샷다
공자의 태도가 평소와 달랐으므로 제자들이 수군거렸다. 그러자 공자는 “안연을 위해 통곡하지 않고 누굴 위해 통곡할 것인가?”라고 반문했다. 공자는 또 제자 子路(자로)가 죽었을 때도 “아, 슬프다! 하늘이 나를 망쳐버렸다(天祝予)”라고 했고, 노나라 서쪽의 사냥에서 기린이 잡히자 “나의 도가 궁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만년의 공자는 도가 행해지지 않는 데다가 기대하는 제자가 먼저 죽어 도를 전할 수 없게 되자 매우 슬퍼했다. 소맷자락을 뒤집어 얼굴의 눈물을 닦으니 눈물이 도포 자락을 적셨다.
공자와 안연의 사제간에 눈물겨운 삶의 스토리가 공자의 사상이 지금가지 전해지게 하는 원동력이 아닌가 생각해본다.
鬼神은 분리해서 말하면 鬼가 조상신, 神이 산천 등의 자연신이다. 季路의 질문은 사람이 죽은 뒤 鬼가 된다는 통념을 중점에 둔 듯하다. 未能은 ∼할 수 없다, 焉能은 어찌 ∼할 수 있는가이다. 焉能事鬼는 반문의 어법 속에 부정의 뜻을 싣는 구문이다.
‘중용’은 “귀신의 덕이라고 하는 것은 성대하다. 그것을 보려 해도 보이지 않고, 그것을 들으려 해도 들리지 않으며, 만물의 체가 되어 만물을 낳아 하나도 빠뜨림이 없다.
중용도 주역의 이치에 의거 하여 귀신을 보고 있다.
자로가 귀신 조화을 묻자 사람의 일들도 잘 모르는데 어찌 자연이 하는 조화를 언급하겠는가?
자네가 귀신에 기도 하는것도 자연이 흐름에 정도을 찾아 내가 아픈곳을 찾아 낮길 바라는것이지.
공자도 자신의 때을 알고 유유자적하는 모습을 읽을 수가 있지않을까?
사후세계에 대한 질문에서도
공자의 생각을 조합해보면
내가 지금 먹고 자고 싸는 이 몸둥아리도 어찌 돌아가는지 알지 못하는데
사후를 알아서 무엇하겠는가?
敢問死하나이다. 曰, 未知生이면 焉知死리오
공자가 高弟인 子路에게조차 귀신과 죽음의 문제를 명료하게 설명해 주지 않은 사실을 두고 呑棗(탄조)에 가깝지 않나 의심할 수 있다. 탄조란 골륜呑棗(골륜탄조) 혹은 渾淪呑棗(혼륜탄조)를 줄인 말이다. 음식물을 씹지 않고 그냥 넘기는 것을 혼륜탄이라 하는데, 대추를 씹지 않고 그냥 삼키면 맛을 알 수 없듯이 학문을 논하면서 조리를 분석하지 않고 모호하게 처리한다는 말이다.
지금은 귀신과 죽음에 관하여 공자의 듯을 명료하게 조명할 때가 아닌가 본다.
그의 이름은 損(손)이고, 자건은 字(자)이다. 魯(노)나라 사람이며, 孔門十哲(공문십철)의 한 사람으로 寡默(과묵)하면서 溫厚(온후)했다.
魯人(노인)은 노나라 정치를 맡아보는 사람으로, 昭公(소공)을 가리킨다. 爲長府는 장부라는 창고를 개축한다는 말이다. 소공은 三桓(삼환)이라 불리는 세 대부를 억누르려고 장부를 확장해서 무기를 비축하려 했다. 민자건은 소공이 결코 삼환을 정벌할 수 없거늘 괜스레 장부를 개축한다면서 백성들을 괴롭힐까 봐 염려했다. 仍(잉)은 ‘그대로 따르다’, 舊貫은 ‘옛 일’이다. 如之何는 ‘어떠할까’, 何必改作은 ‘어찌 반드시 고쳐 지어야 하는가’이다.
문화와 제도에는 바꿔야 할 것도 있지만 보존해야 할 것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