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미/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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土談 2013. 7. 21. 20:08

흔히, 무례하게 구는 사람도 은혜로 대하라고 말한다. 그런 厚德(후덕)함을 진심으로 실천하는 사람은 드물다. 더구나 有意(유의)의 私心(사심)에서 그런다면 원망스러운 사람을 대하는 일도 은혜로운 사람을 대하는 일도 모두 공평하지 못하게 된다. ‘논어’의 ‘憲問(헌문)’에서 공자는 원망스러운 사람에 대해 정직의 태도로 대하라고 가르쳤다. 사랑하고 미워함과 취하고 버림을 지극히 공평하게 하는 것이 정직이다.
以德報怨은 원망스러운 사람에게 은혜의 덕으로 갚는다는 말이다. 주자는 이것이 老子(노자)의 방식이라고 했다. 何以報德은 만일 원망을 덕으로 갚는다면 덕은 무엇으로 갚느냐고 반문하는 말이다. 直은 至公無私(지공무사)를 말한다. 以德報德은 은혜를 끼친 사람에게는 반드시 은덕으로 갚아야 한다는 말이다.
천지가 하는 일이 해마다 일정할 수없고 날씨 또한 죽 끓듯하지만 사계는 어김없이 반복된다.

사람이 하는 일도 해마다 동일할 수없고 사건 사고 다양다색하지만 생노병사 어김없이 반복된다.

사건사고때 느림과 사랑으로 원한을 바름과 덕으로 돌려 주는것이 불합리 한것으로 생각이 들지라도

하늘과 사람이 하는 사계와 생노병사가 어김없이오듯 중용의 덕을 가지듯

해도 도움도 되지않지만 어둠으로 기울러지는것을 경계하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바름과 덕을 실천해야한다.

밤낮없이 개을러 잠으로 보내던가,밤낮없이 땀흘러 일할 수없듯이

낮잠이나 밤일은 원한(밤낮의 불규칙한 습관)을 생체 리듬을 바로 잡고,합리적이고 긍정적인 덕을 찾는 것이다.

 

만년의 공자는 그 令名(영명·아름다운 이름)이 천하에 널리 알려졌다. 그런데 ‘논어’ ‘憲問(헌문)’의 이 章에서 공자는 “나를 알아주는 이가 없구나”라고 慨嘆(개탄)했다. 세상에 이름이 알려지지 않아서 정치에 참여하지 못하는 탄식을 鶴鳴之嘆(학명지탄)이라고 한다. 공자는 제자에게 “남들이 알아주지 못한다고 걱정하지 말라”고 가르쳐 왔으니, 이때의 개탄이 학명지탄이 아님은 분명하다.
공자는 실은 사람들이 자신의 덕을 칭송하는 데 대해 “그들은 나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 이야기하고 있다”고 개탄한 것이다. 子貢도 그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어찌 선생님을 알아주는 이가 없습니까? 사람들은 선생님의 令名을 듣고 흠모하지 않습니까?”라고 위로했다.
莫我知는 나를 알아주는 이가 없다는 뜻이다. 짧은 부정문에서 빈어(목적어)가 일인칭 대명사이므로 빈어가 동사 앞으로 도치됐다. 也夫는 단정한 뒤 다시 개탄하는 어조를 나타낸다. 何爲∼也는 ‘어찌∼한단 말입니까’로 풀이하며, 의문형의 반어법이다. 莫知子는 남들이 선생님을 모른다는 말이다. 짧은 부정문이지만 빈어가 이인칭 대명사 子라서, 빈어가 도치되지 않았다.
‘사기’ ‘공자세가’에 보면 공자가 鄭(정)나라의 성곽 동문에 홀로 있을 때 정나라 사람이 그의 모습을 보고 喪家之狗(상가지구)라고 평했다고 한다. 정나라 사람은 공자의 실의에 찬 모습을 집 잃은 개와 같다고 한 것이다. 공자는 그 말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공자는 세상이 나를 써주지 않는다고 自嘆(자탄)하지 않았다.

우리가 세상을 살다보면 자신의 뜻과 무관하게 흘러 답답하거나 왜곡되어 원하지 않는 결과을 가져오는 것을 느껴 본 일이 있을것이다.

전체적인 생각을 읽지 못하고 일부을 가지고 모두 그릇된 것인냥 목숨 걸때도있다.

공자가 자신을 알아 주지않는다고 탄식을 했지만 이것이 공자는 제자에게 “남들이 알아주지 못한다고 걱정하지 말라”고 가르쳐 왔으니, 이때의 개탄이 학명지탄이 아님은 분명하다.보는것이

공자을 읽는 묘미다.

저의 불로그을 보면서 쾌쾌하고 진부하고 비현실적이고 미신적인 요소로 폄하 할 수있다.

또 특정 단어 을보고,색을 밝힌다,골수분자다,개으르다.등등 낙인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전체을 이해해 가다보면 아주 현실적으로 보편 타당한 생각으로 모든 분들과 과거,현재,미래을 상통하는 문제을 애기하고 단편적인 글들이 현재와 동화되어 모든 분야에서 표출 되는것을 느끼는 묘함을 알 수있다.이 것이 남보다 특이해서가 아니라 서로가 가능한 사물을 분석하고 관찰하는 습관을 명사화 된것을

누구나 알 수있는 동사화 시키는 것에 불과하다.

고전에 이름이 불러지면 그것이 그것이 아닌것처럼

즉 고정관념을 활성화시켜 변화을 살피고자함이다.

 

공자는 인간이기에 하늘을 원망하지않고,나를 알 아주지않더라도 남을 원망하지않을 것이다.라고

강한 부정을 하였다.

이것은 긍정을 의미한다고 볼 수도있다.

그러나 이것을 깊이 깨달아 자연으 흐름을 따를 것을 맹세한다.

즉 하늘은 자신의 듯을 알 것이다.

이또한 공자도 자기 중심적이다.

인간은 지금까지 자연에 역행하고 있다.

개발하여 훼손하고,개체수를 임의로 조절하여 수명을 늘리고,과학으로 편의성을 넓히고,전쟁을 하고,더위을 식히려 추위를 이기려 냉난방을 한고,주어진 은하을 벗어나 미지의 세계을 알려고하고,교육으로 인식을각인하지만,자연을 극복하려고 안간힘을 써 보아도 자연 손바닥에 벗어나지 못한다.

즉 인간의 힘으로는 풀 한 포기도  만들 수없다.

공자도 인간인지라 원망도하고 한탄도 했을것이다.

그러나 궁극적인 목적은 자연을 닮는 것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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