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는 군자와 소인의 임무가 다를 수 있다고 논하였다. 해석에는 두 가지 설이 있다. 주자는 知와 受를 서로 다른 것으로 보아 知는 내가 사람을 관찰하는 것, 受는 저 사람이 나에게서 받는 것을 가리킨다고 보았다. 이에 비해 정약용은 知와 受를 모두 ‘맡아 본다’로 해석했다. 곧, 知를 일에 참여하여 주관한다는 뜻의 ‘與知(여지)’로 본 것이다.
‘회남자’에서는, 살쾡이로 소를 잡게 할 수 없고 범으로 쥐를 잡게 할 수 없다든가, 도끼로 터럭을 자르려 하고 칼로 아름드리 나무둥치를 자를 수 없다든가 하는 비유를 들었다.
이 말은 위정자는 군자요,농공상은 소인이다로 분류 된다.
이 당시에는 통 할지라도 현재는 어불성설이다.
일을 맏는 역활이 군자,소인으로 분류하는 것은 조화(플라스틱꽃)를 보고 아름답다는것과 같다.
자신의 주어진 일에 책임감을 갖고 최선을 다하는자가 기준이 되면 문제가 되는것이 있는가?
공자는 仁을 물과 불에 비유했다. 비유의 뜻에 대해서는 두 가지 설이 있다. 하나는 물과 불이 인간생활의 필수품이듯이 仁도 인간의 필요조건이라는 설이다. 또 다른 하나는 사람들이 물과 불을 위험하다고 여겨 피하듯이 仁도 피한다는 설이다. 앞의 설은 馬融(마융)이 주장하고 주자가 따랐다. 그 설에 따르면 이 章은 물과 불, 그리고 仁은 모두 사람들이 그것에 힘입어 살아가는 바이지만 그중에서도 仁이 가장 중요하다고 지적하고 물과 불을 밟으면 때로는 사람이 죽을 수도 있지만 仁은 밟아나간다고 해도 죽지 않거늘 무엇을 꺼려서 인을 행하지 않겠는가라고 말한 것이 된다.
뒤의 설은 王弼(왕필)이 주장하고 정약용이 지지했다. 이 설에 따르면 사람이 물과 불보다도 더 심하게 仁을 어겨서, 물과 불을 밟은 사람은 보았으나 仁을 밟아나가는 사람은 보지 못하였다고 탄식한 것으로 된다. 여기서는 마융과 주자의 설을 따랐다. 民은 人과 같다. 仁은 인간 마음의 덕이다. 甚於水火는, 마융의 설을 따라, 물과 불보다 緊切(긴절)하다는 뜻으로 풀이했다.
이견이 있지만 어느 해석도 모두 이 장을 ‘殺身成仁’과 연결한다
이문장은 근원적으로 문제가 많다.
1,인의 의미 추상적
=>인은 정도다
정도는 교육을 통하여 선대의 역사(길,도)을 옮고 그른것을 교훈삼아 객관적인 가르침이다.
2인과 수화의 비유
=>수화는 인간의 혈액과 심장에 해당하는 핵심역활을 하는 절대적인 지구만물 생성 활동인자다.
인은 몰라도 생존에는 관계가 없다.
단 인간의 형이 상학적인 학문의 입장에서는 이렇게 비유 가능 하지만 편협된 일이다.
3수화밟고 죽음,인밟고 죽는자 못보았다.
=>수화을 밟고 죽을 수 있는 것은 당연하고
인 즉 정의를 실천하고져 살신성인 한사람이 어디 한둘이겠는가?
未여기서도 공자는 보지못했을 지라도 후세에는 살신성인이 있을 수 있다.
當仁은 ‘인을 실천하는 때를 당해서는’이다. 이에 이설이 많다. 주자는 ‘인을 나의 임무로 삼아서는’으로 풀이했으나 여기서는 孔安國(공안국)의 설을 따랐다. 不讓은 남에게 양보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於는 ‘∼에게’이다. 師는 先生과 長者를 말한다.
仁이란 대체 무엇인가? 難問(난문)이다. 정약용은, 仁을 행하는 근본은 사람의 本心에 있되, 仁이라는 이름은 실천 이후에 붙는다고 보았다. 맹자는 ‘惻隱(측은)의 마음이 仁의 端(단)이다’라고 하여, 仁을 행하는 근본이 본심에 있다고 했다. 하지만 仁이란 개념은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 각자 본분을 극진히 행하는 것을 두고 사용한다. 舜(순) 임금은 아버지 고수(고수)의 마음을 진심으로 기쁘게 해드림으로써 孝를 이루었고, 比干(비간)은 은나라 왕 紂(주)가 暴惡(포악)했지만 그를 위해 간절하게 諫言(간언)함으로써 忠을 이루었으며, 文王은 鰥寡孤獨(환과고독)의 四窮(사궁)을 불쌍히 여김으로써 慈(자)를 이루었다. 그 孝, 忠, 慈의 실천이 仁이다. 성리학에서 말하듯이 仁을 理로 본다면, ‘當仁’의 仁만이 아니라 四書五經(사서오경)에 언급된 仁이란 글자를 모두 풀이하기 어렵다.
양보란것은 물건에 해당하는 경우이다.
사랑을 양보하다.
효을 양보하다.
충성을 양보하다. 가 가능한가?
그런데 어찌 인을 양보하겠는가?
인이 오리무중이면 가능한 일일지라도
위의 3문장에서는 아무리 강판 스타가 한 말이라도
절대적으로 받아드리기 보다 이치에 선후에 어긋남이 없느지 살펴 보는 습관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