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미/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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土談 2013. 8. 23. 22:07

‘중용’에 보면 어떤 이는 태어나면서부터 알고 어떤 이는 배워서 알며 어떤 이는 곤혹을 겪고서 알되 앎이란 점에서는 동일하며 어떤 이는 편안히 행하고 어떤 이는 이로움으로 행하며 어떤 이는 힘써 행하되 성공이란 점에서는 동일하다고 했다. 선천적 조건에 약간의 차이가 있다고 해도 학문과 수양을 통해 誠(성)의 영역에 도달하는 것은 결국 같다고 한 것이다.

 

九思는 ‘禮記’에서 말한 九容과 상관이 있다. ‘예기’에 보면, 군자의 용모는 점잖고 조용해야 하기에, 발은 진중하고 손은 공손하며 눈은 단정하고 입은 듬직하며 말소리는 조용하고 머리는 곧으며 기운은 엄숙하고 서 있는 모습은 덕스러우며 낯빛은 씩씩하도록 해야 한다고 했다.

容儀(용의)는 神氣가 바깥으로 드러난 것이다. 신기를 닦는다면, 거울에 비춰 보거나 남에게 물을 필요도 없이 바른 용의를 지니게 된다. 나의 용의는 나 자신의 책임인 것이다.

공자는 善을 보면 마치 도망가는 것을 뒤쫓되 아무리 뒤쫓아도 미치지 못할까 염려하는 그런 마음으로 열심히 善을 추구하고, 不善을 보면 마치 熱湯(열탕)에 손을 집어넣었다가 델까봐 재빨리 손을 빼듯이 주저 없이 不善에서부터 벗어나야 한다고 말했다. 善과 惡을 제대로 알아서 진실로 善을 좋아하고 진실로 惡을 미워하는 것을 그렇게 비유한 것이다.

려 때 이규보는 어느 高僧(고승)을 칭송하여 “묵상하여 세간 인연이 허망함을 깨닫고, 도를 즐겨 그 맛이 긺을 깊이 알게 되니, 橫陳(횡진)일랑 죄다 밀초 씹는 맛으로 돌리고, 정욕을 혐의하여 끊는 물 더듬듯이 하네”라고 했다. 橫陳을 밀초 씹는 맛으로 돌린다는 것은 불교의 ‘능엄경’에서 ‘횡진을 맞닥뜨릴 때는 맛을 밀초 씹듯 여기라’고 한 구절에서 따왔다. 횡진은 美色(미색)이 옆으로 눕는다는 말이고, 밀초 씹는다는 것은 아무 맛도 없다는 뜻이다.

 

위의3문장에서는

배움에는 옳고 그릇된것이 있는데,

옳은 배움은 항상 그리운 듯하고

그릇된 정보는 교통사고 난듯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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