行義達道는 세상에 나가 이상을 실천함이고 隱居求志는 숨어 살며 덕을 수양함이다.
군자의 사업과 관련해서 隱居求志와 行義達道라는 두 경지를 제시한 유명한 구절이다. 隱居求志와 行義達道에 대해 정약용은 둘을 하나로 연결해 풀이하고 그 예로 백이·숙제를 들었다. 이렇게 두 구를 연속해서 풀이하는 설도 널리 받아들여졌다. 하지만 그 둘을 進退의 상이한 국면에 배당시키는 설도 유력하다. 주자는 이 구절에 해당하는 인물로 伊尹(이윤)과 太公의 예를 들었으니 둘을 진퇴와 연결해 본 셈이다. 후자의 설에 따르면 이 구절은 공자가 ‘述而’편에서 ‘用之則行(용지즉행), 舍之則藏(사지즉장)’이라고 한 것과 관련이 있다.
요즘은 은거란 개념이 무색하다.
공자 이전에는 공자가 사모하는 성현이 있어 들었을것이고 당대에는 없어도
후대에는 귀곡자를 손꼽아 볼만하다.
이런 취지에서 지금 관점으로
자신은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더라도( 隱居求志) 후학에 행동과 가르침으로(行義達道) 만인이 선호하는 인물로 만들어 낸 인물을 많이 들어 보았고 현재에도 드러나지는 않지만 휼륭한 인물이 많다.
千駟의 駟는 4필의 말을 한 단위로 삼는 글자다. 無德而稱은 德 있다고 칭송하는 일이 없다는 뜻이다. 옛 텍스트에는 德이 得으로 되어 있고 而도 없었다고 하니, 그렇다면 ‘칭송할 수 없다’는 뜻이 된다.
齊나라 景公은 靈公(영공)의 아들인데 대부 崔저(최저)가 莊公(장공)을 시해하고 옹립한 제후다. 그가 정치에 대해 묻자 공자는 ‘君君, 臣臣, 父父, 子子’의 여덟 자를 일러주었다. 하지만 그는 끝내 공자를 등용하지 않았다. 경공은 牛山에 노닐다가 도성을 내려다보고 “강물이 질펀히 흐르는 이 고장을 버리고 어떻게 죽는단 말인가!”라고 탄식했는데 晏子(안자)는 ‘莊公과 靈公이 죽지 않았다면 임금께서 어떻게 이 자리에 있겠습니까’라고 비웃었다. 세금을 무겁게 부과하고 형벌을 가혹하게 시행했으며 첩의 아들을 태자로 세워 훗날 난을 초래했으니, 칭송할 만한 인물이 아니다.
伯夷와 叔齊는 孤竹國의 왕위를 서로 양보하다가 함께 나라를 떠나, 周나라 武王의 은나라 토벌을 不義하다 여겨 주나라 곡식을 먹지 않고 수양산에서 고사리를 캐먹다가 굶어죽었다. ‘述而’편에서 공자는 그들이 求仁得仁했기에 아무 원망이 없었다고 했다. 求仁得仁이야말로 남에게 칭송을 받을 만한 일이다.
성현들이 아무리 강조를 해도 현재는 배부른 돼지가 좋다고 아우성이다.
성현이 등신인가?현재인들이 등신인가?
공자의 제자 陳亢(진항)은 선생님의 아들 伯魚(백어)가 특별한 가르침을 받지 않을까 궁금해했다. 伯魚의 본명은 鯉(리)다. 진항은 백어에게 “그대는 異聞(이문)이 있지 않겠소”라고 물었다. 異聞이란 다른 사람은 못 듣고 특별히 한 사람만 들은 내용이란 말이다. 백어는 없다고 대답하고는, 위와 같이 말을 이었다. 언젠가 아버지께서 홀로 마루에 서 계실 때 제가 종종걸음으로 뜰을 지나가며 敬意(경의)를 표한 적이 있는데, 아버지는 “鯉야, ‘시경’의 시를 공부했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아직 배우지 않았다고 말씀드리자 아버지는 “‘시경’의 시를 공부하지 않으면 남을 應待(응대)할 때 말을 제대로 할 수가 없다”고 하셨습니다. 저는 물러나와 ‘시경’을 공부했습니다. 대개 이런 내용이다.
陳亢은 私心(사심)을 지녀서 성인의 마음을 의심한 듯하다. 하지만 공자는 자기 자식을 더 후하게 가르치지 않고, 문하생들에게 그러했듯이 자식에게도 ‘시경’의 시를 배우라고 권했다. ‘시경’은 완곡한 표현 속에 화자의 의지를 담아내는 수사법이 뛰어나므로 대화에 응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교육자라면 공자의 公平無私(공평무사)함을 배워야 하리라.
맹자는 양주 묵적을 실랄하게 비난했다.
양주는 천상 천하 유아독존과 묵적은 공평무사와 상통한다.
이것이 필요없으면 손은 안으로 굽는다고 내편만 줄줄 빨면 된단 말인가?
위의3문장에서는
배움에는 넓고 크게,
쓰기는 그것을 통찰해서 적확하게 하는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