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가 말한 性은 ‘중용’에서 ‘하늘이 명한 바’로 규정한 인간의 본성이다. 단, 북송의 程이(정이)는 氣質之性을 가리킨다고 보았고 남송의 주희(주자)는 氣質之性과 本然之性을 아울러 가리킨다고 보았다. 정약용은 性을 실체로 보지 않았다. 그는 ‘맹자’와 ‘도덕경’, ‘시경’의 고전을 종합해서 인간 정신의 虛靈(허령)한 본체를 大體라 하고 大體의 구체적인 활동의 국면을 道心이라 하며 大體가 善을 좋아하고 惡을 싫어하는 嗜好(기호)의 측면을 性이라고 보았다. 性을 嗜好라고 규정하는 性嗜好說을 주장한 셈이다. 한편 習은 習慣 習熟(습숙) 親習 薰習(훈습)을 가리킨다. 본인이 선한 행위나 악한 행위를 익히는 것이 아니라 교육이나 환경의 영향을 받아 선이나 악의 기질을 형성해 가는 것을 가리킨다.
성의 범위가 넓어
사람의 특성,기타 동물,식물,광물등등들의 특성
사람중에서 성
자신들의 주 특기
즉 주특기을 골프로 가진 사람 중에서 연습 여하에 따라 천자 만별이다.
이분법적인 성악을 위한 성,보다도 다양한 자기 개발 차원에서의 성이 쓰임이 많고
이것이 전자을 충분히 흡수하고 남는다.
왜야하면 자신의 분야에서 최선을 다 하다보면
무엇이 옳고 그르다는것은 명확히 알수 있기때문이다.
공자는 인간은 선을 추구하고 악을 미워하는 본성의 면에서 비슷하지만 교육이나 환경의 영향을 받아 선이나 악의 기질을 형성해 가기 때문에 서로 달라진다고 했다. 다시 그 말을 이어 공자는 上知와 下愚는 습관 때문에 변화하는 법이 없다고 했다.
이런 말은 이해하기 어렵다.
습관도 불변한다는것은 없다.
오직 지극히 지혜로운 자와 지극히 어리석은 자는 변화되지 않는다.
보다도 지혜로운자와 어리석은자는 같이하기 어렵다.
즉 부촌과 빈촌에서는 서로 옮겨가기 어렵다.
‘割鷄에 焉用牛刀리오’는 줄여서 牛刀割鷄라 하며, 작은 일을 처리하는 데 큰 도구는 필요하지 않다는 뜻이다. 또 割鷄라고 하면 작은 재능을 시험해 보는 일로, 흔히 작은 고을을 다스리는 일을 말한다. 옛날의 어떤 지방관은 집무 기록을 모아 ‘割鷄錄’을 엮기도 했다. 焉은 의문사인데, 여기서는 反語의 표현법이다.
어느 날 공자는 문인들을 데리고 제자 子游(자유)가 맡아 다스리는 武城으로 갔다. 之는 ‘가다’라는 뜻의 동사다. 武城은 노나라의 한 마을이다. 子游는 춘추시대 吳나라 사람으로 성은 言, 이름은 偃인데, 魯나라에 벼슬하여 무성의 수령이 되어 있었다. 무성에서 공자는 子游가 백성들에게 禮樂을 가르침으로써 그 작은 마을을 다스리고 있는 사실을 알고는 빙그레 웃었다. 夫子는 ‘선생’인데, 공자를 가리킨다.
莞爾는 동사 莞의 뒤에 ‘그러할 爾’를 붙여 의태어로 만들었다. 공자는 子游가 그릇된 통치기술을 사용했다고 비웃은 것이 아니다. 子游는 王佐(제왕을 보좌함)의 인물이거늘 고작 작은 마을을 다스린다고 애석해한 것이다. 세간 사람들이 인재를 몰라보는 것은 옛 일만이 아니다.
위의 3문장에서는
도구나 말이나 개념이 고정된 것이 아니라
때에 따라 수정하고 구체적으로 당대에서 알기쉽게 변화해야 한다.
즉 무엇이든 쓰임의 용도가 맞아야 가치가 있는것이다.
닭이 한마디 한다.
온세상 금은 보화을 나에게 다 준다한들 나는 쌀 한톨이 낫다.
그러니 사람도 자신의 기준에 빠져 세상을 그릇되게 보는 우를 범해서는 안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