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미/한문

185

土談 2013. 9. 25. 22:21

微子는 이름이 啓(계)이다. 은나라 帝乙(제을)의 장남으로 은나라 마지막 왕인 紂(주)의 이복형이다. 紂를 諫(간)했지만 받아들이지 않자 조상을 제사 지내는 제기들을 갖고 山西省 潞城(노성) 동북쪽에 있던 微(미) 땅으로 갔다. 周나라 武王이 紂를 정벌하자 항복했는데, 무왕은 그를 微國에 봉하고 子爵(자작)의 지위를 주었다. 그래서 微子라고 한다. 뒤에 은나라의 뒤를 이어 宋에 봉해졌다.

箕子는 이름이 胥余(서여)로, 紂의 아저씨다. 紂를 간했으나 듣지 않자, 거짓으로 미친 척하다가 奴隸(노예)의 신분으로 전락해서 숨어 지냈다. 주나라 무왕은 紂를 정벌한 후 기자에게 천하를 다스릴 방책을 물었는데, 이때 기자는 洪範(홍범)을 진언했다고 한다. ‘사기’에는 기자가 朝鮮에 봉해졌다고 되어 있다. 爲之奴는 紂의 노예가 되었다는 말이다.

比干도 紂의 아저씨다. 미자가 떠나고 기자가 노예가 된 후 비간은 紂를 강력하게 간했다. 그러자 紂는 ‘성인의 심장에는 일곱 개 구멍이 있다고 하니 심장을 열어보자’ 하고는 비간을 죽이고 심장을 열어보았다고 한다. 은나라는 기원전 1100년 무렵에 멸망당했다.

 魯(노)나라 士師(사사)로서 정직함을 신조로 삼았던 柳下惠의 일화를 기록했다. 士師는 獄事(옥사)를 담당하는 獄官의 長이다. 유하혜는 세 번 士師가 되었으나 세 번 모두 직책에서 쫓겨났는데 어떤 사람이 ‘당신은 세 번이나 쫓겨나는 험한 일을 당했거늘 어째서 아예 나라를 떠나지 못하는 것입니까?’라고 물었다. 그러자 유하혜는 正道를 걸으면 어느 나라에 가든 서너 번 쫓겨나는 것은 면하기 어려우며, 만일 벼슬 살면서 부정한 짓을 한다면 굳이 조국을 떠날 필요도 없다고 대답했다. 강조점은 위에 있다. 曰의 주어는 유하혜다.
直道는 자기의 길을 굽히지 않는다는 뜻으로, 반대어가 枉道(왕도)이다. ‘焉∼不∼’은 ‘어찌 ∼하지 않으랴’, ‘何必∼’은 ‘어찌 ∼할 필요가 있는가’로, 둘 다 反語이다. 黜은 退와 같으며, 免職(면직)을 말한다.

 공자는 定公 때 中都(중도)의 宰(재)로부터 司空(사공)이 되고 다시 大司寇(대사구)가 되었으며 제나라와 夾谷(협곡)에서 회합을 할 때 나라의 위신을 세웠다. 또 악독한 대부 少正卯(소정묘)를 죽였으며 마침내 재상의 직무를 겸하였다. 이때 제나라는 미녀 80명에게 아름다운 옷을 입히고 康樂(강악)에 맞춰 춤을 익히게 하고는 좋은 말 120필과 함께 보내어 曲阜(곡부)의 성 밖에 정렬시켰다. ‘사기’ ‘孔子世家(공자세가)’에 나온다.
계환자와 정공이 정치를 소홀히 하자 공자는 노나라를 떠나려고 결심하되 당장 떠나게 되면 군주의 현명하지 못함을 온 천하에 공표하는 셈이 되므로 떠날 기회를 엿보았다. 얼마 뒤 郊祭(교제)가 거행된 후 정공이 대부들에게 희생의 고기를 나누어주어 오던 慣例(관례)를 지키지 않자 공자는 재상의 일을 대행하는 자신의 책임이라 하면서 마침내 노나라를 떠났다.

 

위의 3문장에서는

공통점이 왕의 어리석음을 다양한 형태로 고치려 하지만

한계가 있어도 사계절의 변화가 신묘하듯

인간이 알 수없는 작용에의하여 변화을 시키니

이 들의 노력이 결코 헛됨이 없음을 말해 주고 있다.

인간이 알 수없는 사계의 신묘한 변화 란 명제를 놓고

각계 각층에서 자신들의 대명사을 붙여 힘의 논리로 쓰고 있다.

공자는 모든 것을 이것으로 통일하고

장자는 재물론에서 이것을 풀어 쓴것이나 마찬가지인데

기존 책들은 이런 부분을 간과하는 것 같다.

이런 것들의 모든 근원은 주역에서 찾아 볼 수있다.

'취미 > 한문' 카테고리의 다른 글

187  (0) 2013.09.30
186  (0) 2013.09.26
184  (0) 2013.09.24
183  (0) 2013.09.17
182  (0) 2013.09.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