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철학

좁은 생각

土談 2016. 10. 5. 06:00

남자는 솓가락 드는 힘만 있어도 걸떡 된다는 이야기가 있지만 우시게 소리일뿐 나이가 들어가며 육체 적인면은 쇄하고 정신적인 면은 흥해야 건강하게 장수하는 비결일텐데 어떨지 모르겠습니다.
여자가 이제 3명이 등장 하는데 이들의 유형을 심리적으로 고찰해 보면 또한 글을 보는 재미을 더하지않을까 생각해봅니다.
본처는 선심형으로 손해보고 무조건 퍼주고 싶어 안달이나 다 주고 나면 자신에게 남는것이 하나도 없는 스타일로
이런 분들이 많으면 세상에 도덕이니 종교니 등등 가르침이 없어도 평화로서 넘칠것인데 참으로 드물고
세파에 견더 내기가 어렵고 이로 인하여 일찌기 도퇴대는경우가 많다

커텐 여자는 사기형으로 손 안되고 코푸는격으로 처음에는 간 쓸게 다 빼줄것처럼 하다가 뒤에서는 호박씨 까는 형으로 근방은 잘 잘못이 잘 드러나지않지만 소기의 목적이 미치지못할때는 본색이 드러나 마귀로 변하는 못된버릇이 있다.
이런 유형이 의외로 많으며 선심형보다 생존력이 높은 편이다

전도사는 아직 소개 정도라 잘 모르지만 소설에 독자로서 바램이 있다면 이런 여자였으면 사기형의 여자을 만나더라도 서서히 카운터 펀지을 날려 최후의 승자가 되지않을까?
이열치열식으로 이에는이 눈에는눈으로 되 갚아주는 원한형이였으면 가능하지않을까 생각한다.
이렇게 하자면 몆가지 전제가 있어야한다. 먼저 남을 해하지않아야한다. 되갚음은 방어적인 범위을 벗어나서는 않된다.
이런것이 모두의 공공의 선을 위해서 해야한다.
이런 분이면 흐름의 이치에도 맞고 소설의 전개에 자연스러운 면으로 부드럽게 수긍이 가지않을까 생각해본다

 

원한형이 나타나 카운터 펀지을 날닐분이 나온다고 예상했는데 전도사와 이심전심이였던 현지가 대신 했군요!
속이다 시원합니다.독자들이 격한 반응이나와 오만욕 찌거리가 나와야 성공인데 말입니다.
고상해야만 차원이 높은 소설이라고 생각하지않습니다. 공감이 더 중요한것이지요. 섹스피어가 그리스 로마 문학을 동경하고 독파했다지만
아이수킬로스 소포글레스 에우리피데스 등등 따지고 보면 삼류소설이나 별차이가 없습니다. 힘이문제죠 강한 즉 주류가 그렇다하니 표장도하고 이쁘게 바죠서 그렇게 흘러 갈 뿐이지요.
요즘 드라마에 나오는 일상사나 하늘 처럼 떠받드는 고전이나 자세히 드러다보면 그게 그것인것이 아닌가.

생각해봅니다.현지가 질러보듯 저도 부족한듯한 요즘 소설도 날개을 못 달아서이지 탁월한것도 많다고 내리 질러봅니다. 절대 옛날 죽은 고전에 주늑 들지 말라고.
짜고 고스돕치듯이 저의 영감을 읊으면 술술 풀러 나오는것처럼 하니 저 스스로도 의아해집니다.
그러나 이글 속에는 현지의 일방적인 기준에의해서 전개하다보니 등장인물들의 입장이 배려 되어 있지않는 점이 아쉽습니다.
즉 부부지간에 싸움 은 칼 로물베기라지만 한번 없퍼진 물은 주어 담기 어렵듯이 갈라서면 백발백중 자기닷보다 남의 닷입니다.
이것이 모두 돈 문제가 연류되어 있기 때문입니다.이런 문제는 수면위로 떠오르지않고 서로의 이해득실의 항변들이 소설에 케릭터의 인물 구성을 구체화해서 재미을 더할것 같은데요.
소설도 그차체의 특성과 개성의 글 개인이든 민족이든 같은 문화권이든 간에 재미있는 글들이 많은데도 불구하고
힘의 논리 돈의 논리에 푹 빠져 그 우산속에 놀아야 비도 덜맞고 떡이라도 얻어먹고 그들만의 리그 속에서 졸졸 따르는 격에서
벗어니지 못하는 것이 이 소설속에 장면 과 다를 바가 있겠는가 생각해봅니다.
더무 질러나 함여인을 위해 저가 이래라도 질러야 안되겠습니까? 그게그거니까?
어쩔 수가 없지만 퍼부어 보는것이 안티고뇌와 닮아보이지않습니까? 요즘은 전부다 잘 먹고 잘살아 이런 년을 미친년 치급한다던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개 만도 못한 놈인 크레온이 힘있고 돈있어 허벌레 처다보고 춤흘리고 졸졸따라다니는 개세끼가 넘쳐나는 대세고 이렇게 못하는 놈이 어리석다고 하는데 어떻습니까?
감사합니다.

딱 똥낀 놈이 성낸다는 격입니다.
조폭이 우리는 옛날에 연장들고 싸우지는 않았는데
정치하는분들은 옛날에는 나눠먹기 해서 싸우지는 않았는데
집안에서는 옛날에는 어른 말이면 절대 복종인데 요즘 것들은.
직장에서는 작은 유동성이라도하면 벼락이라도 떨어진듯하는것이
자기똥 더러운것은 모르고 남의 똥만 더럽다고 추잡을 떠는 것과 다를 봐가 없는것 같습니다.
서로 이런 모순을 이해하는 것이 어려운 것인가요? 아니면 다른 무엇이 존재하는건가요?
賊反荷杖(적반하장)도 有分數지 !

이런 문제을 다양성이란 측면으로 서로 인정 하자니 속에 천불이나고 안하자니 도리가 없고 어찌 하란 말인가?
이런것이 다양한 방면에서도 즉 철학 과학 등등 고민하고 갈구해도 각각 개체는 있어도 답을 줄 수없는것이 동전의 양면성이 아닐까? 칼 포퍼는 생각을 바꾸어 양면을 서로가 발전시켜며 자아을 비판하며 오류을 포용할 수 있어야만 끝없이 진보하는 열린 사회가 될 수 있는 개방 사회 철학 이념이 있습니다. 이것은 기존 데카르트 칸트 니체의 존재와 실존의 관념을 넘어 구조주의와 자연 철학을 유기적으로 사용하는 다양성을 열어 준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이 자체도 문제가 있지만 서로 소통하는 연결고리을 만든다는점에서는 누구도 부인하기 어려운것 같습니다.
이것이 과학 철학 경제에 다양하게 응용 되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예로서 소로스가 예측 불가능성을 강조하면서 모든 경제 지표와 이론 들이 완전한것은 있을 수없다는 것을 전제하면서 즉 경제학은 모래위에 세워진 누각에 불과하다.
세계 경제의 흐름을 읽어 투자로 대 부호가 된 경우입니다.
현지도 아부지와 사이에 시간이 문제이지 칼 포퍼와 소로스처럼 열린 공간으로 안 나오겠습니까?
자아를 비판하고 오류를 포용하고 지속적으로 나가는 것이 열린 사회로가는데
이것을 턴닝 포인트로 삼아 소로스가 있듯이
현지도 새로 나타난 남자가 이런 개기을 만들어 아부지와 소통할 수있는 물꼬가 아닐가 기대해봅니다.
감사합니다.

너무 일찌기 백기을 들었는지 용서을 했는지 구분하기 어려운 문제인것 같습니다.
동양에서는 양단을 잘 마름질하여 중을 잡으라하고 이런 것이 새로운 매개체을 만들어 내듯이
현지도 새 동생에의해서 화해의 무드로 들어서게 되네요.
동서의 냉전도 우주전쟁이란 허풍에 눌려 공산주의가 무너지는 것처럼
그 본래의 모습은 그대로인데 허울만 펄럭이는것이 쓰러져가는 나라의 기빨과도 닮았습니다.

싸움에 화해하는 방법에는 다양한 방법이 있겠지만
우리 역사의 고려 조선 내내 이런 문제에 시달려왔고
현재도 이런 고민을 멈출 수가 없는것 같습니다.
동네 돌마니들이 학생 몇명을 붇들고 으슥한 골목길로 데리고가서 맞고줄래 그냥줄래 너희들끼리 상의해봐!
그냥 주자,튀자,한판붇자,정답은 없습니다. 이렇때을 위해 뭐라도 비장한 필살기라도 갖추어 놓을걸걸걸
하지만 마음은 뻔 한데 쉽지가 않습니다.
현지의 가정사의 화해무드도 역사속에 보편적인 각본 중에 하나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너무 싱겁게 끝난 느낌도 있지않은가? 아쉬움도 있습니다.

양단은 조심해야합니다.즉 극좌나 극우는 아무리 좋은 명분과 이론을 갖추었더라도 늘 문제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위의 사진을 보니 마음이 점점 더 아파오네요. 안되는 줄 알면서 어쩌던지 해 볼려는 의지가 너무 간절해 보입니다.
저가 이르면 부모의 입장에서는 어떻겠습니까?
이래서 曾子가 孝란것은 죽을때가지 욕신을 온전히 보전 하는 것이다.
자신이 죽음을 맞이하고 제자들에게 육체을 살펴 보라고 하고 효을 행한것을 다행으로 생각했다.
이 생각이 지나치게 편협된 생각이 아닐까 보았는데 현지의 입장에서는 절대적이지않는가 싶어 다시 떠오르네요.저도 다리가 0자형이여서 늘 무릎이 신경쓰이고 불편함을 느낌니다.
한번은 대퇴부가 삼각형으로 뿌러져 고생한적이 있습니다.
이때는 어려을때 동네 돼지 잡을떼 나는 소리을 내가 지르고 있다는것과 다름이 없었습니다.
차라리 죽는 것이 훨씬 좋겠다는 생각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그 고통이란 것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지경 이였습니다.
육개월후 다 낳고도 신경이 어찌 됬는지 죽음보다 더한 통증이 엄습해왔습니다.
엉덩이부터 무릅가지 잡아째서 수술을 해서 어쩔 수없었겠죠.

신경이 잘못 된다는것이 골절된것은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가만있다가도 갑자기 극도의 통증으로 전신을 꼼작할 수없었습니다.
쉽게 표현하면 철로가 역에서 바꾸는 구간이 있는데 잘가다 갑자기 통증 구간으로 이동하는것과 같았습니다.
병원에서도 방법이 없었습니다.이때 환자는 죽도록 공포스러운데 그 발달된 의료가 무력한것을 보면 분노가 끟어 올랐습니다.
내 스스로 해결하는 방법밖에 없다는것을 깨닭았습니다.壯子에는 죽음 병을 피할 수없는것이라면 그대로 받아들이고
죽음도 즐거움으로 병도 있는그대로 인정하고 큰 흐름의 일보로 생각하는 관점을 가지고 있어
마음이 한쪽으로 쏠리는것을 평정심을 갖고 즐기려는 자세가 어려움을 극복하는 방법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감사합니다. 이렇게 힘들때 이것이 모두 나를 축복해주기 위한 증표로 생각하는 배짱이 필요할것 같습니다.
장자의 지혜로 공자의 절차을 보테는 현지의 방법이 현명해 보입니다.
현지가 "어려움을 극복하는것은 책에 있는것이 아니라 생활에 있는것이다."강조하고
장자공자을 몰라도 내가 한것이 그 들과 다를것 없고
내가 나비인지 나비가 내인지 분간이 안가는 것처럼
고난은 내가 주체가 되는것이 중요한것 같다.
저는 늘 동물들은 스스로 주어진 먹을것 먹지말아야될 것 결정하는 것을 아는 것이 신기 했습니다.무었이 이런 능력을 터득하게 한것인지?인간은 대부분 고유의 자신들이 학습한 부분들에 대한 것에 대하여 먹을것들이 결정된 것같다.왜야하면 지역 곳곳에 생산되는것을 바탕으로 먹는 것이 길들어 지기 때문이다.이것이 절대적인 먹거리이겠는가?사람의 위가 즉 신체의 기능이 지역 마다 다른 역활을 하는것이 아닌것이 아니겠는가?이런 면에서 생물들은 모방을 통한 학습을 하므로서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능력이 부여 되는것(정화)이 그들만의 고유한것이 아니라 주어진 환경에 반복 학습을 통하여 만들어진것이 자신들의 유전자을 만들어 다음 세대는 주어진 메뉴얼 대로 교육을 통하여 먹을것과 행동양식이 결정되어지는것이 아니겠는가?이런 측면에서 아이들의 행동을 보면 특히 아이들이다 보니까. 모방하는것이 자연스런 일이고 때가되면 학습에대한 이기적 유전자에 따라 자신들이 받아들이는 것이 결정되는 것이 자동차가 연료을 넣고 달리고 컴퓨터에 인푿 처리기능을 거처 아욷푿으로 나오는 기능과 다른것이 있겠는가?그러나 막상 당하는 입장에서는 모든 촉각이 한곳에 집중하는 것이 마치 시 청각 장애가 남들보다 다른 기능을 하는것과 다를 것이 없는것 같다. 이런 시각에서 현지는 사물을 균형잡인 판단을 하고 있는지 돌이켜 볼 필요가 있지 않는가?
남편이 너무 일거리진 형상으로 표현 되는것이 좁은 시각에서의 분노로 표출 되지는 않는지 궁금하다.
이런 모든 행동양식이 흡사 최진실이나 최순실이나 모방을 통한 학습이 그릇된 모습으로 나타나 심미적인 새로운 창조을 만들지못한 결과는 아닌지 반추해보는것도 좋은 생각이 아닌가? 마음이 아프지만.

얼마 나타나지않는 김상태의 표현이지만 아주강렬하게 나쁜 시각으로 각인 되어진다.아주 경제적인 표현 방법이 인데
현지가 아들에 집중하는 시각에서 만들어진 일그러진 형상은 아닐지 궁금해진다.
현지는 김상태 같은 인물을 원망하기 보다 고마워해야 아닐지 생각해본다.
균형잡힌 감각에서 같이 편협된 시각으로 빠지기보다 이런 상황에서 자신만의 학습에서 적절한 자신 행동 양식을 터득 한것은 아닌지.
이런것이 심도있게 묘사되면 좋지만 표현하지않고도 이런 구도을 만들어 내고 독자가 알아주면 금상첨화가 아니겠는가?
이런측면이 요즘 정치 현실에 국민들이 알아서 스스로 터득한 행동양식과 유사지않는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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