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어릴때 놀던 추억이 떠오른다.
말타기 해바라기 오징어 등등 그중에 말타기는 사람과의 관계를 잘 표현하는 전인 교육이라고는 할까?
재미가 있는 만큼 위험한 요소가 많다.그당시는 부정적인 면은 전혀 생각하지않고 놀았으니 이 보다 즐거운 일이 드물었다.천당의 맛을 보았다고는 할까?세상의 일이 모두 양면성이 있는지라 말의 입장이 되면 지옥의 면도 느낄때가 있다.그때는 무아지경에서 놀기만 해서 인간이 생각하는 의식이나 이해관계 의미부여 교훈같은 것은 개입 할 수있는 여지가 없었다. 이런 상태가 종교가 이상을 연모하고 동경하는것은 아닐까?
인간이 나이을 먹어감에 거추장스런 탈을 쓰고 살아가는것처럼 경험과 교육이 이럴땐 드러내고 저럴땐 감추고 양면성이 보여 주는 차이가 크면 클 수록 사회가 복잡하고 실타래 처럼 얽혀서 독자적인 면보다 뭉쳐서 같이 굴려가는 습성이 이 놀이의 이면에서 발견 할 수있다.
말타기의 다른 이름으로 말뚝박기라지만 표현이 머하지만 머리박기가 더 사실적이다.
마부와 말로 동수로 편가르기하고
말은 리더 한사람이 벽쪽에 바로서고 다른 말들은 리더 가랭이 사이로 머리을 박고 양손으로 허벅지을 감싸잡는다.
이런식으로 다음 말이 또 앞사람의 가랭이 사이로 머리을 박고 양손으로 허벅지을 감싸잡는 모양을 반복한다.
마부는 말의 형태에 올라타고 즐기는 놀이다.
승패는 말에 마부가 올라타고 리더들끼리 가위바위보을 해서 이기는 쪽이 마부 지는쪽이 말을 한다.
단 마부가 타다가 떨어지거나 발이 땅에 닿으면 그팀은 말이된다.
마부가 말을 타는 중에 말의 형태을 유지 할 수없으면 유지 할때까지 반복해서 말을 한다.
인간의 사상이나 전쟁사에 거창한 것이 있는것처럼 보이지만 이 놀이 속에서 모두 느낄 수있다.
편가르기 할때 동시에 손을 앞뒤을 내 밀어 결정하기도하고
동네에서 동서남북으로 가르기도하고
딱지치기 잘하는 그룹과 구슬치기 잘하는 구릅으로 나누기도하고
축구 잘하는 팀과 달리기 잘하는팀으로 갈라지는 경우 수가 있다.
게임이 진행되면 승패가 나는데 서로 일정하게 번갈아가면서 하면 문제가 없는데
어쩌다 보면 전력이 기울어 지는 경우
즉 리더가 가위바위보을 못해 매번 진다던지, 약한 사람을 집중 공략해서 무너지게 만들던지,덩치가 차이가 많이 난다던지,반칙을 쓴다든지해서 경기가 끝나면 전쟁이 종식되고 조약과협상을 맺듯이 불합리한점을 수정하길 요구하고 타결한 방법으로 다시 진행하고 잘 맞지않으면 반복해서 고치고 순환한다.
인간의 사상이나 전쟁은 모든 역량이 집중되고 선택 받은 자들이 영웅처럼 뽐내지만
생각이 안 맞으면 서로 비방하고 승패가 갈라지면 패자에게 모두 덮어 씌우고 더 어렵게 만드는것이 악 순환으로 반복되는것이 아이들의 머리박기 놀이에서 불합리한 점을 반복 수정하는 순환 보다가 휼륭하다고 할 수있겠는가?
이런것이 못마땅 하서 즉 알렉산더 하니발 진시왕 씨이저 황우와유방 구스타프아놀드 칭기스칸 나폴레옹 히틀러 신돈 세조 유자광 김자점 기타등등등 비슷한 분들이 나타나서 자기 하자는데로 하자고 욱박지르면 놀이는 오래 가지못하고 판이 깨지는것이 역사에도 그대로 반증하고 있다.
판이깨지면 회복을 위해 단테의 신곡의 지옥 연옥 천당을 설정하고 그동안 불합리한 일들에 공과을 따져 권선징악을 드러내어 후세들이 전철을 발지않고 부흥을 바라듯이
혼자서 놀 수는 없는 노릇이라 배제당하거나 자신을 죽이고 어울릴 수밖에 과정을 놀이에서 알 수있다.
그러나 이런 분들을 위인전에 나오는 영웅이라고 하는데.
화가의 열정을 가진 프리다 같은 분들이 영웅 대접 받는 세상이 어떨까?
지옥의 문턱을 드나드는 분들이 세상을 통합하는 귀한 재주가 있는데
그들만이 잘먹고 잘살기위한 하나의 세계을 만드는 세상보다 처절한 상태에서 자신의 꿈을 키우는 프리다 같은 사람들이 잘 사는 세상을 위해 하나가 되고자 한다면 어느누가 자신들의 이기와 세의확장을 위해서 라이벌 의식을 느끼며 반대을 위한 반대가 없을 것 같지만 이 또한 대항 세력을 만들어 낼것이다.
그러나 이런 세상은 피안의 세상을 동경하는 것 처럼 밤낮이 없이 자신의 세상에 몰입하여 놀고 있는 아이들의 놀이가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세상이 아니겠는가?
머리 박기 놀이가 사후 불합리한 것을 공감하고 수정하는 절차가 얼마나 민주적인 것인가?
민주 정치을 부르짓지만 권력에 대한 정책의 사후 평가제가 도입되어 성공 사례는 프리다 같은 영웅 대접과 세상을 이롭게한 만큼 재단화해서 성장 동력으로 사업 이름을 부여하여 후세에 길이남기고 잘못 입안된 정잭으로 해롭게 만든만큼 손해에 대한 연대 책임을 분명히 할 수 있는 정치 제도는 없다
붕어빵만 산더미처럼 쌓아 놓고 먹으며 흐뭇해 감동의 눈물을 흘리고 있지는 않는지
머리박기에서 생각해 볼 일이다.
모내기하면
맹자에 揠苗助長곡식이 빨리 자라도록 하려고 이삭을 뽑아 올린 때문에 모두 죽어 손해를 보게 된다는 뜻으로, 성급하게 이익을 보려다가 도리어 해를 보게 되는 일을 두고 하는 말 인데
揠苗助長 宋人有閔 其苗之不長而揠之者,芒芒然歸,謂其人曰:“今日病矣!予 助苗長矣!”其子趨而往...
이 문장에서 인간의 어리석음을 깨우치는 가르침은 휼륭하지만 이치을 궁구해 볼것은 경험이 많은 어른이 실수나 성급함이나 결정에 오류가 젊은이 보다 상대적으로 적음에도 불구하고 등장인물의 설정이 바뀐점을 어떻게 생각해야할까?
뿌리깊은 나무 가뭄 안 탄다. 빠른 바람에 굳센 풀을 안다.
이 두명제을 만족시키는 것이 모가 아닌가 한다.
아래 사진에 모판을 말아 보았다.모의 뿌리들이 얼키고 설키어 카페트 처럼 따듯하고 부드러운 느낌이 신기할 정도이다.
밀도가 얼마나 촘촘한지 겨울에 입는 파카보다 더 포근한 뿌리다.말았다 펴보니 보드라운 모가 꺽겨서 죽을 줄만 알았는데 스폰지가 원상회복하듯이 원형을 그대로 유지하는 것도 경이로웠다.
과거에는 논 한편에 미장하듯이 고르게 펴서 씨을 뿌리고 흙을 살짝 덮어 일정하게 자라면 모를 찐다고 한다발씩 묶어 논 한가운데 군데군데 던져 놓으면 나누어 심고 진일보하면 양쪽에 줄을 쳐서 여러명이 같이 심는 경우였다.
어릴때 경험에 기억은 모심는 일이 상체와 하체가 분리되는 듯한 허리 아품이 아련하다.
지금은 모판의 편리성과 이양기로 심으니 일의 효률성이 뛰어나다.
인간은 머리을 잘 쎠야하고 식물은 뿌리을 깊게 박아야한다.뿌리와 머리는 같은 역활을 하는데 하나는 하늘을 보고 하나는 지표아래로 향한다.사람이 물구나무서기하고 나무을 꺼구로 들면 모양이 비슷하다.이 생명체가 왜 반대 모양을 하면서 살아야 하는 운명인가?
벼가 자라는데는 물과 뿌리가 근본이된다.
인간도 가족 국가의 혈통관계을 사물의 근본과 유래을 나무의 뿌리와 물의 원천에 비유한다.
지구와 태양도 황도의 기울기에 따라 사계절이 순환하는 가운데 에너지로 벼를 키우며 인간의 사회성의 관계 리듬을 갖는 근원은 제공하는 것이 천지인 이 형태는 달라도 하나의 원리로 작용한다.
모가 모판에 집중해 있다가 이양기로 논에 모심기를 하면서 분리의 효률성을 선택한다.
인간이 모의 뿌리와 물을 통해 벼로 자라 일용할 양식하며 근원을 통한 인식을 바탕으로 자신의 몸과 사회의 분리와 집중하면서 과거 현재 미래을 열어간다.
우주 또한 은하계의 집중과 분리에 일정한 규칙이 지구을 살아가는 동식물에 전달한다.
拔本塞源-근본을 빼내고 원천을 막아 버린다는 뜻으로,
사물의 폐단을 없애기 위해서 그 뿌리째 뽑아 버림을 이르는 말로 두가지 뜻이있다.
이 말을 후자의 뜻으로 관념으로 밖혀 인식하고 있다.
그러나 사자성어의 원천은 나무의 뿌리를 뽑아버리고 물의 원천을 막아 근본을 훼멸하거나 잊고 반역을 도모하는데 쓴다. 이것은 춘추 좌전 소공9년 기원전 533 쓸데없는 짓 하면 못쓴다는 교훈이다.
알묘조장은 춘추보다 훨씬 후에 말이고 모의 뿌리을 뽑에 올리는 것은 농사을 망치고 조상에 누를 끼치는 것이 자명한데
만약에 이런일이 있다면 코흘리게 아이도 대통령을 우습게 볼것이다 라는 주장인데.
맹자는 알묘조장의 코메디을 통하여 스타덤에 올른것은 아닐까?
우리는 발본색원하면 누구나 아는 우수운 구절로 생각하고 알묘조장하면 대단히 존경 스럽게 바라보는 경향이 있다.
아니 둘 사이에는 아무 관계가 없는 별개로 보는 것은 아닌가? 근원을 알아 차리는 지혜가 중요하다.
아래 사진에
한쪽에서는 공익을 위해서 모내기를 하고
한쪽에서는 사익을 위해 공장이 환경을 오염시켜 나무을 병들게 하고
물과 뿌리을 집중 분리하고 벼을 쌀로 집중 분리 유통하여 인간을 이롭게하고
개인의 자산에 집중하여 자연에 분리하여 인간을 해롭게 하는 양면성이 당연한 공식인가?
이 들판이 광화문 광장과 차이가 어디에 있겠는가?
이런 까닭으로 발본색원을 거듭 꺼내어
모내기의 물과뿌리을 도와 근원을(지식이 오히려 고사하는 소나무처럼) 훼손하지는 않는지 수양하고
개인의 배불리는 일로 주변을 오염시키는 패단을 뿌리째 뽑아 공익이 우선하는 변화가 필요하다.
말뚝박기에서
머리를 빼다가 박았다 하는 과정에서 불합리한 모순과 거듭 할 수록 교묘하게 늘어가는 편법을 수정하는민주 방식을
모내기에서
뿌리와 물을 통해 사물의 근본과 원천을 인간관계를
사진의
공익과 사익의 황금률의 게임에서
사람이 살아가는 집중과 분리의 지혜의 관점으로 생각해본다.
모내기을 돕다보니 옛날 일들이 떠올라...
감사합니다.
周甘人與晉閻嘉爭閻田,晉梁丙,張趯,率陰戎伐潁。王使詹桓伯辭於晉曰:我自夏以后稷,魏,駘,芮,岐,畢,吾西土也。及武王克商,蒲姑,商奄,吾東土也,巴濮,楚鄧,吾南土也,肅慎,燕,亳,吾北土也,吾何邇封之有,文武成康之建母弟,以蕃屏周,亦其廢隊是為,豈如弁髦,而因以敝之,先王居檮杌于四裔,以禦螭魅,故允姓之姦,居于瓜州,伯父惠公歸自秦,而誘以來,使偪我諸姬,入我郊甸,則戎焉取之,戎有中國,誰之咎也,后稷封殖天下,今戎制之,不亦難乎,伯父圖之。我在伯父,猶衣服之有冠冕,木水之有本原,民人之有謀主也。伯父若裂冠毀冕,拔本塞原,專棄謀主,雖戎狄其何有余一人,叔向謂宣子曰,文之伯也,豈能改物,翼戴天子,而加之以共,自文以來,世有衰德,而暴滅宗周,以宣示其侈,諸侯之貳,不亦宜乎,且王辭直,子其圖之,宣子說,王有姻喪,使趙成如周弔,且致閻田與襚,反潁俘,王亦使賓滑執甘大夫襄以說於晉,晉人禮而歸之。
2017추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