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대절명의 고난을 이겨 낸 기적의 인생 드라마
절대절명의 고난을 이겨 낸 기적의 인생 드라마 1949년 당시 12세 임종덕은 중국 용정에서 독립 운동하던 부모님과 함께 서울에 왔다. 6.25전쟁 61년이 지난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였다. 당시 서울중고등학교는 인민군들이 주둔해 있었는데 이곳에 수감된 수십 명의 청년 이 훈련받고 북한 의용군으로 전쟁에 가는 것이다. 불 지르고 북아현동 자신의 집으로 도망갔다. 잠시 후 인민군 찌프차가 집 앞에 도착 대문을 박차고 들어와 마당에 있던 어린 여동생 머리에 총검을 대고 부모님을 찾았다. 인민군은 반동분자이기 때문에 처형 하겠다 했다. 총 소리와 함께 부모님은 쓰러졌다. 기름을 부어 불을 질렀다. 길에끼어 정처없이 걷다가 다시 9.28 수복 때 미군을 만났다. 고아로 거지생활을 시작했다. 희망원으로 갔다. 그때 그의 나이는 열다섯 살이었다. 자신보다 어린 고아들을 동생처럼 보살폈다.
들어 가 사무실을 박살냈다. 원장은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산으로 도망쳤다. 임종덕은 고아원을 나와 서울역을 향해 달렸다.
계속 돌멩이를 던지면서 저지했으나, 어린 소년, 소녀들은 함께 손을 잡고 울며불며 임종덕을 따랐다. 저녁때가 되어 서울역에 도착한 임종덕은 염천교 다리 밑에 임시 두 시간 후에 이들이 얻어온 각종 음식을 모아서 비빔밥을 만들어 골고루 배식을 했다. 임종덕은 행복했다. 즉 큰 방공호로 만들어 놓은 장소를 깨끗이 청소하고 그곳에 많은 살아가는데 지켜야할 중요한 규칙을 교육받았다. 1) 밥을 얻으러 갈 때 대문을 두드리지 말고 깡통 소리를 내라. 소매치기와 절도범으로 변했다. 한꺼번에 죽는 날도 있었다. 약 사먹을 돈이 없어 감기만 걸려도 고열로 쓰러져 죽어갔다. 서울역 대합실에서 임종덕은 미국 공군 장성이 탄 승용차 한 대가 미군 전용 주차장에 도착하는 것을 목격했다. 미군 헌병들의 호위를 받으며 차에서 내린 장군은 환송 중이던 사람들과 악수를 나누며 잠시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하나를 훔쳐 비호처럼 도망갔다. 그러나 그는 멀리못가고 미군 헌병들에게 붙잡혔다. 자신이 데리고 있는 고아들이 굶어 죽는다고 말했다. 에게 임종덕을 조선호텔 장군의 숙소로 보내 하우스보이로 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임종덕은 이 절호의 기회, 이 좋은 직업을 사양했다. 내가 없으면 100여명의 고아 들이 당장 굶어죽는다고 했다. 장군은 헌병들에게 100여명 고아들의 생활 현장을 확인하고 그것이 사실이면 그 고아들 전원을 미 공군이 운영하는 제주도 고아원으로 입소시키고 그리고 임종덕은 자신의 하우스 보이로 일하게 명령했다. 전투비행기 조종사인 그의 외아들이 전투비행 중 전사했다. “너는 오늘부터 내 아들이 되었다” 며 양자로 입적을 시키겠다고 했다. 임종덕은 사령관을 따라 수원의 미공군 기지를 찾았다. 그는 이곳에서 좋은 친구를 만났다. 같은 하우스 보이로 이곳 공군기지 막사에서 일을 하는 김장환이란 소년을 만났다. (후일 수원중앙교회 원로 목사) 김장환 소년은 임종덕을 아주 경계하는 눈초리로 보면서 “너는 도대체 누구냐 너는 무엇 때문에 여기 왔느냐”며 매우 못 마땅한 표정으로 임종덕의 어깨를 툭툭 쳤다. 오해를 한 것이다. 그러나 잠시 후 오해가 풀린 김장환은 임종덕에게 “너는 어떻게 장군의 하우스 보이가 되었느냐, 누구 빽이냐”며 너무나 궁금하다면서 계속 캐물었다. 이었다. 임종덕은 하는 수 없이 자신의 살아온 과거와 특히 장군과의 인연이 된 사건까지 다 말해 주었다. 임종덕의 말을 다 듣고 난 김장환은 임종덕의 손목을 꼭 잡고 간단하게 말했다. 즉 김장환이 동네 아이들과 지게를 지고 산에 나무를 하러 가는 길에 먹었다. ?슬컥? 다 먹고 나자 한 친구가 흙투성이가 된 미군 군화가 몇 켤레 있는 것을
형무소에 간다” 면서 적극 만류했다. 런히 놓아 주고 일어섰다. 그때 뒤에서 누군가가 김장환 어깨를 쓰다듬어 주었다. 김장환의 얘기를 다 듣고 난 임종덕은 마음 속으로 우리는 다 절도와 관련된 운명으로 하우스 보이가 되었구나 하면서 앞으로 자주 만나자고 했다. 찾아갔다. 김장환을 꼭 찾아가는 첫째 목적은 여중생을 사귀기 위해서였다. 양아버지 화이트 장군과 함께 당시 여의도 비행장에 있는 미군 교회를 찾았다. 미군들의 예배가 끝나자 바로 한국 공군 장병들의 예배가 시작되었다. 화이트 장군과 그외 외국 고관들이 앉아 있었다. 거리게 했다. “지금 이 나라는 온갖 부정부패의 척결을 단행하지 않으면 이 자유당의 정부는 오래가지 못할 것입니다.”… 까지 앉아 있는 자리에서새파란 20대의 청년 군종목사가 거침없이 설교를 해나갔다.
걱정이 되었다. 그러나 예배가 끝나자 이승만 대통령은 강대상에서 내려온 군종목사를 덥석 안으면서 “아주 훌륭한 설교였소, 이 자리에 참석한 여러분들이 목사님의 설교를 모두가 다 깊히 생각하고 각자의 소임을 성실히 해 나가십시오” 하면서 다시 군종목사의 손을 잡고 목사로서 애로사항이 있다면 말해보라고 했다. 교회를 빌려 쓰는데 하루 빨리 우리공군도 자체 교회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먼저 건축하라고 공군참모총장에게 지시했다. 이날의 설교를 했던 공군 군종감이 지금 한편 임종덕 소년은 서울중학교를 졸업후 양아버지의 권유로 미국으로 가게 되었다. 이유는 공산당에 의해 부모님의 그 처참한 현장을 목격했기 때문에 자신은 앞으로 군인이 되어 공산당을 타도 한다는 것이 그의 목표였다. 군인이 될 수 있다고 임종덕을 타일렀다. 아버지를 따라가지 않으면 자신은 또다시 고아 신세가 된다는 것은 뻔한 일이었다. 자랑하는 풋싱 아카데미에 입학한다. 단어 100개를 못 외우는 날은 그날 저녁 식사를 굶으면서 밤을 새워 가며 단어를 외었다 향학열은 더욱더 불타올랐다. 기숙사에서 방학 숙제와 리포터 작성에 여념이 없었다. <21세기는 중국의 시대가 올 것이다>라는 논문을 썼는데 이 논문이 하바드 대학교 학생 잡지에 게제가 되면서부터 이 논문은 미국의 언론과 정계에 비상한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첨가해서 “중국이 앞으로 문화 중심이 될 수도 있다”고 썼는데 미국의 뉴스위크가 이 글을 크게 보도했다. 한편 임종덕은 <2차 대전후 바이 아메리칸 정책이 아시아에 끼친 영향> 이란 졸업 논문으로 하바드 대학교 국제관계 정치학 박사가 된다 흘리며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하고 있었다. 참석하게 한 하나님의 섭리에 화이트 장군은 계속 감사 기도를 드렸다. 럼 임종덕을 껴안고 박사 학위를 뜨겁게 축하해 주었는데, 하버드대학 개교 이래 그야말로 최고의 “별들의 잔치”였다. 낙하산 훈련과 특공대 훈련에서 1등으로 수료했다. 지원 특수부대로 갔다. 임종덕의 임무는 미군 포로수용소를 습격 미군들을 구출하는 작전 을 수행했다. 전투가 벌어졌다. 그러나 숫자적으로 불리함을 판단 부하 3명을 살리기 위해서 그들에게 후퇴할 것을 명령하고 대신 자신이 포로가 되었다. 대로 몇 장을 찢어 몸속에 감추고 성경을 풀 속에 던졌다. 여기고 “너는 키도 작고 연약한 몸이니까 앞으로 전쟁터에서 하나님이 너를꼭 지켜 주실 것이다. 그러니 이 성경을 열심히 읽어라” 임종덕은 그 친구의 강력한 권고로 성경을 임종덕은 그 때 비로써 예수님을 영접하고 모든 것을 하나님께 의지했다. 회장이 되었다고 했다. 한편 앞서 포로가 되기 직전 성경에서 몇장 찢어서 늘 간직한 것이 희망을 주었다. 임종덕은 수용소에서 “하나님은 왜 나를 포로가 되게 했느냐”고 짜증석인 그는 절박함 속에 간절한 기도가 끝나자 야음을 틈타 포로수용소를 무조건 탈출했다. 벗어나 자신의 부대로 찾아왔다. 도 알고 왔다. 한편 임종덕은 이때 국방성으로부터 정식 그린베레 대원으로 임명 받았다. 를 납치하며 그리고 미군 포로들을 구출하는 임무였다. 야 앞으로 전쟁터에서 하나님이 분명히 너를 도와 줄 것이다”라는 그 말이 지금에 와서 자신에게 큰 용기와 희망을 주었다. 서 한국말로 심문하는데 임종덕은 그들에게 전혀 알아들을 수 없다고 영어를 사용했다. 즉, 자신은 중국에서 태어난 미국인이라고 강력하게 말했다. 튀어 나오면 한국군으로 인정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임종덕은 고통과 신음 속에 “오 마이 갓” 이란 말만 계속했다. 북한군은 자기들끼리 조용한 음성으로 “이놈이 진짜 남조선 놈은 장교 4명과 경호원 1명이 각자 권총을 차고 있었는데, 임종덕이 보는 앞에서 소련제 권총에 실탄 1발만 장전해서 임종덕에게 건네는 것이다. 6발이 장전되는 탄창에 1발만 넣고 탄창을 몇 바퀴 돌렸다. 놀음판을 매일 한 번씩 하는데 어떤 날은 권총 소리가 나면 죽은 자의 시체는 바로 옆에 있는 강으로 던져 악어가 순식간에 먹어치운다. 그들을 무력화 시키고 도망칠 계획을 세웠다. 부르지 않았다. 임종덕은 날로 초조했다. 곧 월맹을 떠나 북한, 중국으로 끌려 갈 것으로 마치 운동 연습하는 흉내를 내면서 “4초 탈출”의 연속 훈련을 한 달 동안 계속했다 완벽하게 성공시키기 위한 훈련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고 깨달았다. 의 탄환이 첫 번째 탄창에 들어가게 해 주십시오. 그러면 상대방 한명이라도 사살할 수 있습니다”…… 에게 건넸다. 권총을 받은 임종덕은 순간 용기가 생겼다. 확신이 생기면서 한 달 간 연습한 “4초 탈출” 작전을 개시했다. 당겼다. 총소리와 함께 상대방이 꼬꾸라지자 임종덕은 평소 그린베레의 무술로 상대방이 권총을 꺼내기 전 평소 훈련했던 4 초 만에 그들을 격파하고 강을 향해 뛰었다. 사격을 퍼부었다. 잠깐씩 숨을 쉬기 위해 순간 수면에 올라와보니 월맹군들은 멀리 2백 미터 쯤 떨어진 강물에 사격을 하고 있었다. 물뱀들이 나를 보지못하게 저 동물들의 눈을 가려 주옵소서” 계속 이 기도만 했다. 나무 위에 걸쳐 말리면서 1주일간 먹었다. 걸었다. 어느 날 미군 헬리콥터 소리가 아주 가까이에서 들려왔다. 펄쩍 뛰면서 손을 흔들었다. 그러나 헬리콥터는 베트콩 복장을 한 임종덕을 발견하고 그가 베트콩인 줄 알고 기관총 사격을 퍼부었다. 소리가 들려왔다. 임종덕은 순간 정신을 차리고 “하나님! 내 영혼을 하나님께 맡깁니다!” 펄쩍 뛰었다. 그 순간 미군 헬리콥터 조종사는 중요한 판단을 했다. 즉, 비록 베트콩의 비상 착륙을 감행했다.
했다. 임종덕은 미국 공군 참모총장이 자신의 아버지라고 하면서 연락을 취해 달라고 했다. 즉시 미국 공군 참모총장 화이트 대장과 전화 통화가 되었다. “이게 혹시 꿈이 아니냐 아들아 너가 포로로 잡혀간 그날부터 네 어미와 나는 밤낮으로 너를 위해 기도했단다”…… 제1호 탈출이었다. 그래서 미군은 물론이며 미국 내 참전 가족들의 환성이 대단했다. 갈림길에서 끝까지 자신의 생명을 지켜준 하나님께 감사 기도를 드리고 있었다. 백악관에 들어가니까 너무 긴장하지 말라고 했다. 은성 무공 훈장을 받으면서 감격했다. 것이 결정적 요인이었다고 한다. 지었다. 키가 1m64cm의 이 작은 체구에서 어떻게 그 엄청난 행동과 지혜가 있었는지에 고 훌륭한 아들을 두었소.”하고 물었다. 하십니다.” 라고 말하자 존슨 대통령은 다소 놀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임종덕의 굳건한 신앙에 큰 미소를 지었다. 룰렛 즉, 권총 살인게임등을 소재로 한 영화가 제작 되었다. 출연한 이 영화가 바로 디어헌터 (The Deer Hunter)였다. 그 후의 남은 이야기 백악관서 은성무공 훈장, 대통령 안보비서관 존슨 대통령이 화이트장군에게 어떻게 이렇게 훌륭한 아들을 두었냐고 해서 “하나님이 함께하기기 때문이라”라고 하였다. 전 미 국무장관 키신저와 함께 외교활동을 했다. 미국과 중국이 적성국가로 외교가 단절된 상태이고 당시 중국은 모택동의 문화혁명으로 외국의 어떤 문화도 침투할 틈이 없었는데 오직 탁구경기만이 중국정부와 국민이 거부 반응이 없어서 임종덕 비서관은 미국 탁구선수단을 베이징 상하이 광저우등지로 순방하면 서 탁구를 통한 양국의 스포츠 교류를 서서히 진행시켰다 베풀면서 임종래라는 이름도 지어주고 모택동도 다섯 번 만났다. 키신저가 가는 길에 인접한 일본에도 알려야겠다고 할 때, 한국도 알려야 한다고 하자 한국은 당신이 가서 알리시오 해서 처음으로 박정희 대통령을 만났더니 그렇게 좋아하면 서 일 하느라 장가 못간 노총각이니 중신은 내가 서겠다고 하며 육여사에게 당부하여 한국 의 전통 가문인 민 씨 가문의 규수를 소개하여 결혼하고 더욱 친밀해졌다. 어 세계를 흥분시켰다. 대통령과 아버지 화이트장군과 여의도 미군공군교회에서 예배를 드릴 때 한국공군군종감 임동선 목사의 설교를 듣고 감동받은 목사였다. 서로 위로 받을 이민교회를 세우자고 하여 1970년 동양교회를 창립하여 8000명의 교포가 모인 가장 큰 한인교회가 되었다. 장로란 책 두 권을 필독하고 부족하다고 사양했다. 임종덕을 훌륭하게 교육시킨 하버드대학과 모교인 미 공군사관학교에 기증했다. 카터대통령은 임종덕비서관에게 “당신의 조국이란 입장을 떠나서 나의 철군계획과 한반도 정책에 대해 말해보시요”하여 “ 현재 4만여 미군이 주둔하여 북한이 도발 못하며, 한국은 경재부흥과 더불어 미국이 바라는 민주주의 국가로 성장하고 있다”하였다. 지시에 아무도 말 안할 때 장군 진급심사를 두 달 앞둔 임종덕은 싱글러브장군과 같이 불이익을 받을 줄 알면서도 “전투 중 자기만 살겠다고 도망친 자를 대통령이 사면하면 앞으로 전쟁터에서 누가 미국을 위해 생명 바치겠냐?”고 했다. 하여 백악관을 떠나면서 몇 번이고 뒤돌아보면서 발길은 교회로 향하고 텅 빈 교회에 들어 가서 모처럼 하나님께 긴 시간의 감사기도를 드리고 1986년 육군대령을 예편하면서 LA동양교회 장로가 되었다. 지처 힘없이 누어있던 임종덕 아이를 6.25 타임즈 종군기자가 찍은 사진이 유명한 풀브라이 트 종군기자상을 수상한 사진 ‘우물가의 소년’이다. 고 또한 미국 육군사관학교는 임종덕의 수용소 탈출과 15일간의 정글 생활에서 살아나온 과정을『정글 탈출기』란 책으로 만들어 육군사관학교 정식 교과서로 사용했다. |
임종덕과 비견할분 故 강영우 박사 글로벌 리더는 시각 장애를 딛고 한국인 최초로 미 행정부의 차관보급까지 올랐던 강영우 박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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