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금자리
서건석
습관)
동우리 사랑할 줄 모르는 새는 없고
가족과 가정을 사랑하고 소중한 사람
새도 먹는 것으로 길들여지고
연못가에 발자국 소리에 물고기 모여들고
맹수들도 순종하게 하고
반목하는 원수들도 함께하는데
하물며 동포인들 어떠하겠는가?
형상)
먹을 것 중심으로 아파트 만들어 사랑이 피어오르고
새 둥우리 여러개 모여 사랑의 심벌
둥지둥지 아파트을 얼기설기 역어 세워
시골 학교 나란히 줄선 코흘리게의 향수가 있는 안식처처럼
둑길 풀밭에 떠가는 흰 구름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앞집 뒷집 순이와 철수가 뭐하고 지내는지
마을 한가운데 나란히 전원 단지 빚었네
욕심)
음식의 미혹에 빠지듯
蓄財에 보금자리가 많아도 부유함과 거리가 멀고
미색에 하나 둘로 만족 못하고
미술관에 있어도 아름다움을 보지 못하고
중앙에 있어도 귀함을 모르고
법과 교화도 뒷전으로 밀리고
소리는 탐욕의 북소리로 삼네
반목)
사람과 새가 먹을 것 때문에
총소리 그물망 반짝이 허수아비로 미워히고
호랑이 똥도 우숩을 정도로 절박하면 멧돼지 도심을 날뛰고
날짐승도 허구를 촉감으로 능멸하기에 이르고
서로가 웬수 처럼 지내지만
노래와 해충을 없에는 설득을 공유하여
분신인듯 한 마을에 동주하고 있네
변화)
말 못하는 미물과도 더불어하는데
아래 위를 아우르는 새들이 정성껏 꾸며서
하트로 전하려는 알고리즘 날리는데
우린 아직 호모 사피엔스의 깊은 잠에
서로 함께하고 싶어도
고양이 먹이로 주체성이 길들어진 것 이냥 하지만
두리번 두리번 鼠生 발가락을 닮았네
관전 포인트)
사물을 보고 스쳐가는 파노라마 속에
스포트 라이트처럼 순간순간 복선에 영감이
다이나믹하게 철학,역사와 사회성을 번복하며
내적인 뇌관에 방아쇠을 당기는 찰라묘사
지상에 살아있는 유기물의 대명사인 주거을 통해
현재 실생활에서 느끼는 새와 사람의 구조적인 틀 속에서
자유롭지 못하는 부자연스러움 속에 극복하고자하는 고뇌를 반추해본다.
새는 동주의 대가로
메세지을 전달하는데 (알고리즘_요리로 말하면 구체적인 레시피,제품사용 설명서 같은것
즉 인본,신 이런 것들이 첩가되어 술수가 없는 고정적인 방법)
사람은 아직도 이기적인 유전자로 인본 ,신,무슨주의해가면서
편한대로 해석해 반목하는 아타까움을 전하고자한다.
이런것을 애기 하고자하니 가장 원초적이면서 근본적인 먹는 것을 빼고는 말할 수없고
세상의 모든 번뇌가 먹고사는 문제에서 출발한다.
이 것으로 인한 불합리한 점들을 느껴보고 분노하고 조율이 필요하다.
이러자니 사람이 얼마나 피곤 하겠는가?
서생 발가락을 닮았다는 것은
모든 동식물들은 대칭을 이루고 있는데 즉 손가락 발가락 수가 똑 같이 홀수 아니면 짝 수.
식물은 잎들이 양쪽이 같은 모양을 하는 것이 당연한데
쥐는 앞뒤 발가락수가 홀수 짝수을 하고 있어
자시하면 쥐을 애기하고 11시 -1시 사이을
기준 12시로 보면 양다리을 걸치고 있는 형상을 나타내고
시간과 쥐의 발가락을 닮아 있다
즉 양이면 양 음이면 음 이면 번뇌 할것도 없는데
음양 양다리을 걸치고 있자니 얼마나 심적인 고통이 많겠는가?
이런 일상 현상들이 우리 모두을 대변하고 있지는않는지
여기서 삶의 지혜가 절실히 요구된다.
개인이나 사회나 국가의 이해관계 관점에서도 .
감사합니다.
나는 시를 잘 모르지만
단면을 극단적으로 묘사하는 것 보다
스토리가 있고 그속에 사회 역사 철학이 적날하게 미시적이것과 거시적인 것이 어울려
현실성을 반영하여 새로운 알고리즘을 투영하는데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내용이면 자신의 푸념이든 경험이든 주변이야기든 형식은 시의 구조와 시어가 아니어도
짧은 글에 많은 느낌과 감동이 있다면
즉 산골 할매의 삶에서 묻어나온 진솔한 사투리 썩인 무식해 보이는 한마디에서
그분 삶의 스토리을 읽어 가슴이 물클하듯이
주체적인 의지가 있는 것이 같이 호흡하는 생활이 아닌가?
시의 구조와 시어의 틀에 맞추면
얼굴에 비하면 화장빨 처럼 이래 저래 꾸며야 시란것이지 그외에는 쓰레기야 하면
민 얼굴은 찾아 보기 어려운것은 아닌가?
자신을 빼고 객관화하니까?순수함은 사라지고 꾸민 화장빨인 가장을 버릴 수가 없다.
성추행을 해도 끌려서 그랬다하면 하수
정신 차리고 운전하라고 하면 상수 이렇게 되고
애인과 해어짐을 썼는데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가을을 노래 했다고 칭송하는것들이 얼마나 많은가?
저는 모든 글을 보는 기준은
만인이 공감하는 명언이나 어록은 관심이 없고
자신만의 색갈과 의지가 묻어있는 글이면 장르 구분없이 즐긴다.
즉 마운틴 맨 처럼
심지어 욕지거리가 감언이설보다 호감이가는것이
주체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부족한 관점이지만 버리고 싶은 생각은 없다
그러나 제도권의 구조도 더 많이 배워야겠다.
민 얼굴이 보기싫듯이 화장하는 법을
僖公二十... :
二十年,春,新作南門,書不時也,凡啟塞從時。
滑人,叛鄭,而服於衛,夏,鄭公子士,洩堵寇,帥師入滑。
秋,齊狄盟于邢,為邢謀衛難也,於是衛方病邢。
隨以漢東諸侯叛楚,冬,楚鬥穀於菟帥師伐隨,取成而還,君子曰,隨之見伐,不量力也,量力而動,其過鮮矣,善敗由己,而由人乎哉,詩曰,豈不夙夜,謂行多露。
宋襄公欲合諸侯,臧文仲聞之曰,以欲從人則可,以人從欲鮮濟。
제환공이 죽고 송양공이 패자을 자처할때
노나라 장문중이 자신의 바람을 다른 사람의 바람에 부합하면 성공하고
다른 사람이 자신의 바람에 부합하게하면 성공하기 어렵다.
이것은 좀어색하다
방법론의 문제이지 행동론에서는 맞지않는다.
즉 정치을 어떤 방향으로 이끄는가문제지
모든 창의적인 행위는 이것과 반대로 기존틀을 깨는 아품이 없이는 나올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