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엣세이

사인암

土談 2019. 2. 6. 16:58






舍人巖

충청북도 단양팔경의 하나. 한강 상류 단양에서 8km 지점의 강변에 있는 깎아 지른 듯한 암벽. 기기묘묘한 암석들이 병풍을 두른 듯 치솟아 있고 바위 아래에는 청연암이라는 작은 암자가 있어 좋은 경치를 이룸. 고려 말한학자 우탁이 사인의 벼슬로 있을 때 늘 이곳에 와 휴양하였기 때문에 사인암이라 불렀음


고려 충선왕 때의 학자인 우탁( 1263~1343). 자는 천장, 호는 역동, 시호는 문희. 제주는 그의 벼슬 이름. 역학과 정주학을 연구하여 후진들을 가르쳤음. 시조 2수가 전함

한 손에 막대 잡고 또 한 손에 가시 쥐고

늙은 길 가시로 막고 오는 백발 막대로 치렸더니

백발이 제 먼저 알고 지름길로 오더라.


춘산에 눈 녹인 바람 건듯 불고 간 데 없네.

저근듯 빌어다가 머리우에 불리우고자

귀 밑에 해묵은 서리를 녹여 볼까 하노라


진흥왕 북진정책의 전초기지, 적성

남쪽으로 죽령, 북동쪽으로 남한강 상류, 북서쪽으로 남한강을 따라 청풍과 충주가 한눈에 보인다.


기묘사화 때 극형에 처해지게 되었으나, 영의정 정광필() 등의 옹호로 금산()에 유배되었다가, 진도를 거쳐 다시 제주도로 옮겨졌다. 그 뒤 신사무옥에 연루되어 사림파의 주축인 생존자 6인과 함께 다시 중죄에 처해져 사사되었다. 1545년(인종 1) 복관되었고, 1646년(인조 24)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왕도정치의 실현을 위한 개혁 정치를 폈는데, 그 일환으로 미신 타파와 향약의 실시, 정국공신의 위훈삭제() 등을 추진하였다.

제자로는 김봉상()·김고()·최여주() 외에 조카인 김천부()·김천우() 등이 있다. 보은의 상현서원(), 청주의 신항서원(), 제주의 귤림서원(), 금산의 성곡서원() 등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충암집()』이 있는데, 여기에 실린 「제주풍토록(] )」은 기묘사화로 제주도에서 유배 생활을 하면서 견문한 제주도의 풍토기이다. 시호는 처음에는 문정()이고, 나중에 문간()으로 고쳐졌다.

[네이버 지식백과] [金淨]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사인암 기묘한 바위들의 풍류를 즐기든 우탁의 기계와 닮아

알만한 사람이 얼마나 답답했으면 연장을 들고가 조정을 바르게 하고자 했겠는가?

우선생의 도끼 사건은 김선생의 국회 분뇨 투척사건보다 잊혀지고


젊은 조광조와 더불어했던 김정은 사화의 고초에 유배를 전전하다 꿈을 펴지 못하고

그의 재능이 같은 집안의 김정희는 내력인가 북학의 영향인가?그또한 비슷한 이유로

어려움을 격는 중에도 변화하는 메세지을 전하고 도왔다.


사인암 위쪽에 수운정은 지금은 없으나 류성룡이 하사받은 호피로 바꾼정자가

붉은 비탈 푸른 절벽도 탄핵의 빌미을 제공했다라고 탄식했고

권상하는 구석 구석 명승지에 자신이 딱은 도의 흔적을 남김이 이 일대에도 예외가 아니었다.

김장생 이이을 흠모하고 송시열을 따르던 모습이 글씨에 인품과 공경심이 배여있다.


사인암에들러 단양 상행휴게소에 신라 적성비를 산책하고 회인 대청호을 타고 내려왔다

역사의 한 부분이였던 이분들은 적성비을 알고 있었던 모르던 물심의 변화을 충족 시키는 곳이

이 일대 였던것을 부정 할 수는 없지않는가?

삼봉 우탁과 김정, 적성비, 텐트를치고 명절을 보내는 수몰지역 실향민

새로운 세상에 대한 열정은 모두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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